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78화 (178/242)

178. 청출어람 (6)

태주를 노리던 늑대 인간들의 포효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야.”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태주를 비추고 있는 화면만 넋 놓고 바라보던 프로그래머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기가 막히네. 내가 지금까지 본 학생들 중에 가장 뛰어나. 아주 물건이야 물건.”

트레이닝 돔에서의 경력을 운운할 만큼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극찬을 쏟아내던 프로그래머가 자신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혹시 설정이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근석이 프로그래머의 모니터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참 나, 학생이 보면 뭐 알아?”

태주의 성공 요인을 자신의 실수에서 찾으려는 근석의 억지에 심기가 불편해진 프로그래머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리고 정 못 믿겠으면, 본인이 직접 나가서 확인해 봐. 아직 설정도 그대로니까.”

키보드에서 손을 뗀 프로그래머가 팔짱을 낀 채 턱 끝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프로그래머의 으름장에 당황한 근석이 빠른 사과로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했다.

대놓고 무안을 당하긴 했지만, 프로그래머와의 관계가 틀어져 아쉬운 쪽은 부탁을 하는 입장인 근석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앞선 안개 모드에서의 전투도 의아했지만, 산소 부족이 동반된 극한의 추위 속에서, 심지어 방어구는커녕 과잠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평소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 역시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봤을 땐 뭘 해도 안 통할 거 같은데.”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린 프로그래머가 산소 보충과 동시에 기온을 정상화시키며 물었다.

“아니요. 아직 마지막 카드가 남았습니다.”

2단계로 구상해둔 작전이 시작부터 어그러졌지만, 태주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데 실패했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근석이었다.

“마지막 카드?”

“네. 벼락을 사용할 겁니다.”

“뭐? 벼락?”

“네. 비바람과 몬스터로 시선을 빼앗은 뒤 벼락으로 마무리할 겁니다.”

신고식을 떠나 태주가 좌절하는 모습을 단 한 컷이라도 담아내고 싶었던 근석이 결국 무리한 요구 사항으로 프로그래머를 당황케 했다.

“어이, 학생, 혹시 저 학생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한 프로그래머가 근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요. 전 그냥 동아리의 전통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저 역시 작년에 똑같은 경험을 했었고요.”

입으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선명하게 주름진 미간에선 집요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근데 이걸 어쩌지? 난 저 친구의 안전을 위해서 여기까지만 하고 싶은데?”

근석의 말이 아닌 표정을 믿기로 한 프로그래머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네? 테스트를 중단하시겠다고요?”

보다 못한 프로그래머의 일방적인 결정에 당황한 근석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왜? 안 돼?”

“아니, 그래도 이게 마지막 미션인데…….”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승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근석이 난처한 얼굴로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안전상의 문제가 생기면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이번 한 번만 제 뜻대로 해주세요. 네?”

“책임? 책임은 나처럼 권한이 있는 사람이 지는 거야. 학생처럼 허락이나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근석의 발언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를 아는 프로그래머가 정색을 하며 다그치듯이 언성을 높였다.

“……?!”

프로그래머의 매서운 일침에 말문이 막힌 근석이 정지 자세로 마른침을 삼켰다.

“올해로 2학년이라고 했지? 다닌 지는 만 1년이 조금 넘었을 거고.”

“네.”

기세에서 밀린 근석이 고분고분한 말투로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근데 내가 여기서 몇 년이나 근무했는지 알아? 자그마치 11년이야 11년. 강산이 바뀌고도 1년이나 더 흘렀다고.”

평소, 꼰대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지만, 근석의 잘못을 지적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이와 경력을 끌어들인 프로그래머였다.

“지금 저 친구 기 꺾어 놓으려고 그러는 거지? 자기보다 잘난 후배가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알까 봐. 나도 자네 선배 때 들어가 봐서 다 알아.”

작년에 있었던 근석의 신고식 땐 다른 프로그래머가 조작을 맡았지만, 트레이닝 돔에서만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건 그냥 저희 동아리의 통과 의례 같은 겁니다.”

“통과 의례? 그래서 자네는 작년에 통과했고?”

“네?”

“못 들은 척하는 걸 보니 중간에 포기했나 보네. 맞지?”

프로그래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근석의 얼굴에 검지를 들이밀며 집요하게 물었다.

“포기한 게 아니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뿐입니다.”

태주에겐 자신이 당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놨던 근석이지만, 자존심상 자신의 신고식 당시에 없었던 프로그래머에게만큼은 거짓으로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 자네 말대로 비바람에 벼락까지 싹 다 추가시켜서.”

“네? 제가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던 근석이 프로그래머의 생각지도 못한 참여 제안에 화들짝 놀랐다.

“아님 말고.”

트레이닝 필드의 환경을 초기화시킨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머뭇거림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왜 일어나세요?”

프로그래머의 돌발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근석이 소심하게 손을 뻗으며 말렸다.

“말했잖아. 저 친구의 안전을 위해 여기까지만 할 거라고.”

통제실을 나서려다 멈춘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태주의 생존을 확신하는 프로그래머의 진짜 의도는 근석의 참여를 유도시킨 뒤 후배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씨, 어떡하지? 이대로 끝내면 결국 태주만 띄워 주는 꼴인데.’

가뜩이나 복잡한 근석의 머릿속이 프로그래머의 실감 나는 연기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후배의 기만 살려주는 그림으로 신고식을 마치고 싶진 않았지만, 태주의 압도적인 실력을 목격한 상황에서 경쟁을 수락하는 것 또한 선뜻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다른 프로그래머에게 부탁할 생각은 하지 마. 어차피 내 선에서 다 거절하게 만들 거니까.”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 근석의 심각한 표정을 마주하던 프로그래머가 참여와 포기 이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단단히 못 박아 두었다.

“…….”

그리고 이어진 근석의 침묵.

“낚싯줄 끊어진 거 맞네.”

잠시 기다려주는가 싶었던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통제실의 문을 열었다.

물론 통제실의 경우 대기실로 사용되는 차단벽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트레이닝 필드에 남아 있는 태주로선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미치겠네 진짜.’

화면 속 태주의 여유로운 모습과 프로그래머의 냉정한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근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바로 그때.

“저, 아저씨, 잠시만요!”

선택의 기로에 놓인 근석의 다급한 외침이 프로그래머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또.”

근석을 향해 돌아선 프로그래머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할게요.”

“한다고?”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쯧쯧. 저 친구는 뭐 조건 달고 저 고생했나?”

동등한 대결만큼은 피하려는 근석의 얄팍한 협상 시도를 눈치챈 프로그래머가 태주의 화면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혀를 끌끌 찼다.

“쇼 앤 프루브(Show and prove). 진짜 기강을 잡고 싶으면, 비겁하게 숨어서 괴롭히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 그럼 후배가 아무리 잘났어도 학생 말을 따를 테니까.”

“…….”

반박할 수 없는 프로그래머의 두 번째 일침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힌 근석이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휩싸여 눈꺼풀조차 끔뻑이지 못했다.

*

*

*

같은 시각.

‘끝난 건가?’

저항 스킬의 발동이 멈추었다는 것은 곧 세 번째 시련의 종료를 의미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폭풍 전야와도 같은 불길한 고요함.

실제론 프로그래머와 근석의 견해 차이로 인해 테스트가 미뤄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별도의 안내 방송이 없다 보니 긴장감을 유지한 채 새로운 미션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철컹!

차단벽에 마련된 비상 출입문이 열리며 근석이 등장했다.

‘어? 뭐지?’

웃음기가 사라진 비장한 표정과 어깨에 짊어진 활과 화살통, 거기에 마지못해 들고 온 증강현실용 고글까지.

테스트의 종료를 알리러 온 것이 아님을 직감한 태주가 활을 내린 뒤 근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 활은 뭡니까?”

“아, 이거? 나도 너랑 몸 좀 풀려고.”

태주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답변을 피하는 근석이었다.

“네? 지금요?”

신고식의 목적상 근석이 나설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태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 너 혼자 고생하는 게 좀 안쓰러워서.”

철컹!

억지웃음을 짓던 근석이 비상 출입문을 굳게 닫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전했다.

“그럼 같이 고생할 거 없이 그냥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10분 만에 나가는 건 좀 아깝잖아. 내가 여길 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설득력이 부족한 명분을 내세운 근석이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트레이닝 필드를 둘러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냥 앞으로 있을 도제식 트레이닝의 어색함을 줄이기 위한 오리엔테이션 정도라고 생각해.”

승패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한 근석이 태주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스쳐갔다.

물론 근석의 성향을 단시간에 파악한 프로그래머가 가만히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을 리 없었지만.

[“저기, 신태주 학생, 내 말 들리지?”]

‘으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낯선 음성에 반응한 태주가 가장 가까운 CCTV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거기 옆에 있는 학생이 너무 얄미워서 내가 일부러 들여보낸 거니까 선배라고 봐주지 말고 확실하게 보여줘.”]

‘아아,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프로그래머의 도움으로 상황 파악을 마친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근석을 향했다.

[“참고로 벼락이 동반된 마지막 미션은 한 쪽이 포기할 때까지 계속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안심하지 말고.”]

“거 참, 아까부터 쓸데없는 소리만 하시네.”

태주의 눈길을 외면한 근석이 고글을 쓰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 그럼 행운을 비네.”]

태주에게만 응원의 말을 남긴 프로그래머의 목소리가 그치자 천장에 설치된 장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투두두둑!

‘벼락이라…….’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미션의 내용을 곱씹어 보던 태주가 소리 없는 미소와 함께 이 교수의 활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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