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청출어람 (5)
쉬이익!
목표물을 설정한 태주의 화살이 역풍을 가르며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꾸웨엑!
화살촉이 이마를 관통하자 태주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던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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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역시 명불허전이네.”
증강현실이 반영된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바람의 저항을 극복한 태주의 퍼포먼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게요.”
같은 장면을 목격한 근석이 프로그래머의 감탄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테스트의 목적상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눈치 없는 후배가 시작부터 난관을 준비한 선배의 입장을 무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다음 수를 물었다.
“글쎄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여유로웠던 얼굴엔 어느덧 조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솔직히 태풍 카드가 이렇게 허무하게 뚫릴 줄은 몰랐거든요.”
근석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유지, 강화, 변화.
물론 몬스터의 숫자나 종류도 변수가 될 순 있었지만, 말 그대로 하나의 변수에 불과할 뿐, 태주를 항복시키기 위해선 결국 날씨와 기후를 이용해 도전 의지 자체를 꺾는 것이 중요했다.
“으음. 일단 다음 건 안개로 가주세요. 몬스터는 궁수로 하되 소리를 내지 않는 놈으로 3마리 정도만 배치해 주시고요.”
통제실 안에서만큼은 인간을 자연으로 시험하는 전지전능한 위치가 된 근석이 고심 끝에 정한 두 번째 시련을 태주에게 제시했다.
“안개 속에 숨어 있는 과묵한 궁수들이라……. 이렇게 되면 태주의 장점이 모두 사라지는 거 아니야.”
역시나 클래스의 이해도가 높은 프로그래머라 시야가 제한된 궁수의 핸디캡을 단번에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엔 태주라도 애를 좀 먹겠는데?”
근석의 새로운 요구사항을 입력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라고.”
물론 테스트의 조건은 달라져도 태주를 포기시키려는 근석의 마음은 한결같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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휭!
‘어? 바람이 약해졌다.’
고블린의 죽음 직후 급격하게 잦아든 역풍의 세기에 첫 번째 테스트가 끝났음을 직감한 태주였다.
‘그나저나 고글이 아니었으면, 눈도 제대로 못 떴겠는데?’
태주의 말대로 증강현실을 위해 착용한 특수 고글이 바람을 이겨내는 데 한몫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근석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다음 미션으로 고글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지만.
‘이번엔 뭘 준비했으려나.’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다시금 트레이닝 필드의 중앙으로 이동한 태주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음 과제를 대비하던 바로 그때.
푸쉬이이이!
‘안개구나.’
사방에서 방출된 희뿌연 가스가 태주의 가시거리를 순식간에 악화시켰다.
‘역시 뭘 해야 궁수가 난감해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네.’
궁수의 마음은 궁수가 제일 잘 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 태주가 근석의 노골적인 견제 방식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근석의 의도를 알게 된 태주가 갑자기 직사각형으로 생긴 트레이닝 필드의 모서리 한 곳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회귀 전,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수업 당시, 안개 속엔 늘 적이 숨어 있었고,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상대방의 공격 각도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와라.’
360도 전체가 노출되어 있던 방어 범위를 90도로 좁힌 태주가 활시위를 당긴 채 좌에서 우로 천천히 화살촉을 이동시켰다.
조준된 목표물을 끝까지 따라가는 체이싱 애로우의 특성을 이용한 태주의 즉흥적인 발상.
육안이나 마력으로는 증강현실로 구현된 안개 속의 적을 찾아낼 수 없었지만, 화살촉의 방향이 적의 신체 일부를 가리키는 순간 타격 의사를 묻는다는 점을 레이더처럼 활용하면, 원거리 딜러의 장점을 무색하게 만든 시각적인 불리함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체이싱 애로우가 목표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어! 찾았다!’
체이싱 애로우의 에임이 적을 감지하는 순간, 목표물의 실루엣이 머릿속에 표적처럼 그려졌다.
‘이 와중에 스켈레톤 궁수라니.’
근석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른 태주가 화살촉의 움직임에 따라 표적 위를 옮겨 다니는 빨간 점을 적의 이마에 위치시켰다.
쉬이익!
활시위에서 손을 떼기 무섭게 활시위를 당긴 태주가 다시 오른쪽으로 천천히 화살촉을 이동시키며 다음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또 어디 있나.’
태풍이 불었을 때 한 마리였다고 해서 안개가 끼었을 때 역시 한 마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 체이싱 애로우가 목표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또 한 마리의 스켈레톤 궁수를 찾아낸 태주가 적의 공격 타이밍을 고려해 살짝 위치를 옮겼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쉬이익!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발사.
위치 정보를 파악해둔 태주가 활시위를 놓아 목표물을 제거한 뒤 남은 각도를 화살촉으로 빠르게 탐색했다.
▶ 체이싱 애로우가 목표물을 발견하였습니다.
‘네가 마지막이구나.’
90도 각도를 모두 조사한 태주가 세 번째 스켈레톤 궁수를 찾아낸 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같은 시각,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통제실 안.
“우와!”
상식을 벗어난 플레이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프로그래머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자신의 식견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프로그래머가 같은 궁수 클래스인 근석을 올려다보며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
물론 머릿속이 하얘진 근석의 귀엔 어떠한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대체 어떻게 한 거지?’
태주가 직면하길 원했던 벽을 본인이 먼저 마주한 근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지만, 체이싱 애로우의 존재를 모르는 근석으로선 의심하는 수준에 그치는 부족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숨기고 있는 스킬이 있는 게 분명해.’
물론 정진천과의 5차 웨이브 직후, ‘유도 화살 신태주’라는 헤드라인이 언론에 등장한 적도 있었고, 엄 교수와의 수업 당시 1000번 연속 10점을 맞힌 불가사의한 기록도 있었지만, 태주가 침묵을 이어가는 이상 그 누구도 스킬의 존재를 단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 정도면 그만하는 게 낫지 않아? 딱 봐도 통할 카드가 없는 거 같은데.”
태주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 프로그래머가 추가 테스트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아니요. 시작한 지 3분도 안 됐는데 벌써 끝내면 섭섭하죠.”
물론 원하는 그림을 영상 속에 담아내지 못한 근석이 프로그래머의 의견을 수용해 신고식을 중단할 리 없었지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글쎄요. 일단 체력부터 빼놓고 생각해 보죠.”
세 번째 대안으로 유지나 강화가 아닌, 변화를 택한 근석이 화면을 노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체력을? 어떻게?”
“지금 저 상태 그대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뭐? 에베레스트산? 그럼 극한의 추위에 산소 부족
상태까지 추가하자는 거야?”
안개를 걷히게 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정도를 더해 가는 근석의 살벌한 아이디어에 두 귀를 의심했다.
“네. 낚시를 할 때처럼 지치게 만드는 거죠. 원래 손맛은 고기의 힘을 뺄 때 느낄 수 있거든요. 그래야 대물을 올릴 수 있기도 하고요.”
“대물이라……. 그러다 낚싯줄만 끊어지는 건 아니고?”
근석의 비유를 이해한 이후에도 여전히 태주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프로그래머였다.
“그래서 힘을 빼는 겁니다. 승부는 다음 라운드 때 지을 거고요.”
앞선 단발성 테스트들과 달리 2단계로 미션을 구성해둔 근석은 프로그래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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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걷히고 있다.’
자욱했던 연기가 환풍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세 번째 시련을 맞이하기 위해 트레이닝 필드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이번엔 또 뭘까?’
미리 활시위를 당겨둔 태주가 예리한 눈빛으로 사주 경계를 하던 바로 그때.
휭!
‘……?!’
단순한 서늘함을 넘어 스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강력한 냉기가 태주의 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얄미웠나 보네.’
회귀 전에 체험한 냉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아진 실내 온도가 곧 근석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여긴 태주였다.
휭!
‘이래서 과잠도 못 입게 했구나.’
완연한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캠퍼스 속 유일하게 겨울을 맞이한 태주의 손끝이 점점 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뭔가 숨쉬기도 더 힘들어진 거 같은데?’
극심한 추위로 인해 미처 의식을 못 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움직임 없이도 호흡이 가빠지는 산소 부족의 대표적인 현상이 태주의 신체 능력을 서서히 저하시켰다.
바로 그때.
▶ 패시브 스킬 『저항』이 발동되었습니다.
활로를 모색하던 태주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상태 이상(빙결, 마비, 호흡 곤란, 둔화, 현기증) 공격의 대미지가 100% 감소되었습니다.
‘그렇지.’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는 순간, 얼어붙었던 몸이 풀리면서 손끝의 감각이 되살아났고, 가슴이 들썩일 만큼 불규칙했던 호흡마저 한결 평온해졌다.
▶ 패시브 스킬 『저항』이 발동되었습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 다시 말해, 온도와 산소의 양엔 변화가 없는 만큼 환경이 달라지기 전까진 저항 스킬의 발동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지만.
▶ 상태 이상(빙결, 마비, 호흡 곤란, 둔화, 현기증) 공격의 대미지가 100% 감소되었습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또 한 번 위기에서 벗어난 태주가 활을 쥔 손가락을 까딱이며 몸 상태를 체크하던 바로 그때.
크릉! 크르르르르!
태주의 힘을 뺄 목적으로 준비된 늑대 인간 30마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먹잇감을 포위하듯 생성됐다.
연사가 버거울 만큼 움직임이 둔화되고, 손끝의 감각이 무뎌진, 심지어 산소 부족으로 인해 집중력마저 저하된 태주의 남은 체력을 바닥내기 위해선 늑대 인간처럼 빠르고 강한 녀석들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쿠와아아!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오던 늑대 인간들이 태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항 스킬이 없었으면, 대미지 좀 먹었겠는데?’
물론 근석의 바람과 달리 태주의 컨디션은 늑대 인간과 놀아줄 만큼 충분히 쌩쌩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