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76화 (176/242)

176. 청출어람 (4)

“방어구는 착용 금지니까 활만 빼곤 다 집어넣고.”

후배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신고식답게 인내심에 도움이 될 만한 변수들은 미리미리 제거해 두려는 근석이었다.

“방어구를요?”

당초에 예상했던 대로 견제의 의도가 뻔히 보이는 테스트 조건이 노골적으로 추가되었다.

물론 일일 과제를 통해 틈틈이 올려둔 능력치만으로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지만.

“최악의 상황에 적응해야 실전에서 멘탈이 안 나가지. 그래야 날씨와 기후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똑똑히 체득할 수 있고.”

악조건의 이유를 합리화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근석은 자신의 선배가 자신에게 그랬듯, 또한 자신의 선배의 선배가 자신의 선배에게 그러했듯 그럴싸한 명분으로 태주를 설득했다.

‘핑계가 좋네.’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서의 수업 중 최소한의 복장으로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온전히 체험해 보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누가 봐도 지금은 태주의 포기를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하다 볼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협의의 여지가 없음을 받아들인 태주가 과잠, 목걸이, 반지 등 몸에 걸친 모든 장비들을 순순히 집어넣었다.

“그래. 잘했어. 활은 이종도 교수님께서 주신 거지?”

태주가 어제 새로운 활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근석이 기존의 정보를 바탕으로 확인차 물었다.

“설마 활의 종류에도 제한이 있는 겁니까?”

전설 등급의 활에 붙은 강력한 공격력 버프로 인해 사용을 자세할 생각이었던 태주가 교체 가능성을 염두에 둔 질문으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아니. 활은 네가 원하는 걸 써도 돼.”

이 교수의 활엔 방어적인 메리트가 없다고 판단한 근석이 태주의 질문에 선심을 쓰듯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서로가 생각하는 활의 허용 범위가 다를 수 있음을 밝히지 않은 태주가 다른 활의 존재를 숨긴 채 이 교수의 활부터 꺼내 들었다.

“대단하네. 이종도 교수님한테 활을 다 선물 받고…….”

장비 덕후인 이 교수의 활에 대한 애착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근석이 태주의 왼손에 나타난 고뇌하는 하급 정령의 활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 저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4학년 수업을 듣게 된 것도 다 이종도 교수님께서 밀어붙인 덕분이라며?”

태주에 대한 선망과 질투가 마음속에 공존하는 근석이 자신도 모르게 테스트와 무관한 질문들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기수에 따라 도제식 트레이닝의 스승 역할을 맡긴 했지만, 그 자격에 대해 스스로도 의문을 품을 만큼 태주의 각성 등급과 커리큘럼 구성은 가히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과장님과 총장님께서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학과장을 비롯한 동료 교수들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어차피 근석의 초점은 과정이 아닌 결과에만 맞춰져 있었다.

“네. 특히, 이종도 교수님이 중간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들었습니다.”

근석의 말투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캐치한 태주가 자랑으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신중하게 대꾸했다.

만에 하나 태주의 잘난 척으로 인해 시샘하는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가뜩이나 목적이 분명한 테스트의 난이도가 급상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종도 교수님께서 좀 열정적이긴 하시지. 재능 있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시고.”

근석 역시 피크닉의 멤버로 선발될 만큼 실력 있는 궁수였지만, 이 교수가 태주에게 쏟고 있는 정성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수준의 관심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너 엄 교수님한테 슈팅 글러브도 받았다며.”

법사인 함희준 교수의 반지도 있었지만, 근석은 유독 궁수 클래스 교수들의 선물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교수님들의 관심은 어때? 부담스럽진 않아?”

“아니요. 다행히 성과적인 측면을 강조하신 분은 안 계셔서…….”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탓에 기대감에 대한 이야기는 누락시켰지만, 사실, 인재 양성에 대한 욕심이 있는 이 교수는 활을 선물함과 동시에 4학년 수업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했었고, 동료를 잃은 아픔이 있던 엄 교수는 슈팅 글러브를 건넬 당시, 베팅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해 가며 블랙홀 게이트에 대한 클리어를 부탁한 바 있었다.

“다행이네. 두 분 다 워낙 의욕이 넘치는 스타일이라 관심이 과했으면 꽤나 피곤했을 텐데.”

겉으론 걱정해 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지만, 교수들의 관심이 과하진 않다는 태주의 빈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진 눈치였다.

“아이고, 얘기가 잠시 이상한 데로 빠졌네. 고글은 내가 갖다 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입구 위에 설치된 시계를 돌아본 근석이 증강현실을 위한 장비를 챙기기 위해 보관실 쪽으로 뛰어갔다.

‘얼마나 굴리려나.’

근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주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회귀 전엔 교수의 관리 감독하에 정도라는 것이 지켜졌지만, 자연의 현상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만큼, 더구나 후배에게 무력감을 주는 것이 주된 목적인 만큼 근석이 프로그래머에게 어떠한 요구를 전달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 여기.”

먼저 도착해 테스트 준비를 해둔 근석이 발 빠르게 돌아와 고글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미련하게 버틸 생각하지 말고, 힘들면 그냥 CCTV 쪽으로 신호를 보내. 알았지?”

“네.”

고글을 착용한 태주가 CCTV의 위치만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정확한 피드백을 위해 테스트 부분만 따로 녹화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훈련 영상을 남기는 것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실패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 공유하려는 목적이 녹화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의도의 불순함을 모를 리 없는 태주가 자신의 흑역사를 호락호락하게 남겨줄 리 만무했지만.

“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저기 저 바닥에 보이는 노란 선 안으로 들어가 있어. 테스트가 시작되면 그 선 위로 벽이 하나 내려올 거니까.”

근석이 전체 면적의 3분의 1 지점에 그어진, 폭이 1미터나 되는 두꺼운 경계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대기실과 테스트 공간을 나누는 거대한 차단벽이 노란 선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아는 태주가 근석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그럼 행운을 빌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근석이 태주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던 바로 그때.

웨에에에엥!

귀가 다 먹먹해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미리 녹음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경고. 노란색 경계선 밖으로 물러나시오.]

‘드디어 시작인가.’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서서히 내려오는 육중한 차단벽을 등진 태주가 본격적인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증강현실이 구현됩니다.]

이번엔 고글의 전원이 켜지며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피해가 누적되면 테스트가 중단된다는 메시지가 생략된 정도.

물론 표적으로 삼을 만한 몬스터가 간간히 등장하긴 하지만, 학생들을 다양한 환경에 노출시키고 적응시키는 것이야말로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목표이자 설립 취지였기 때문에 앞서 근석이 설명했듯 포기 의사를 확인하기 전까진 테스트가 중단되지 않았다.

쿵!

어느새 천장에서 내려온 차단벽이 바닥을 울리며 안착했다.

[“아. 아. 태주야, 잘 들려? 들리면 오른손을 들어 봐.”]

“…….”

태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근석의 목소리에 따라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오케이.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할게.”]

위이잉! 위이잉!

근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후좌우, 그리고 천장과 바닥에서 날씨와 기후를 인공적으로 구현할 특수 장치들이 사이렌만큼이나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정체를 드러냈다.

‘설마 워밍업도 없이 초반부터 달리진 않겠지?’

트레이닝 필드의 중앙으로 이동한 태주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바로 그때.

휭!

오른쪽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태주의 뺨을 스치며 시련의 서막을 열었다.

*

*

*

같은 시각,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통제실 안.

“뭐? 바로 태풍으로 가자고?”

모니터 앞에 앉아 설정을 입력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근석의 무리한 요청에 두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적응할 시간은 좀 줘야 되지 않을까? 딱 봐도 여기가 처음인 거 같은데.”

“아시다시피 쟨 평범한 신입생이 아니잖아요. 아마 본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을걸요?”

프로그래머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근석의 주문엔 변함이 없었다.

“근데 다른 클래스면 몰라도 궁수면 강풍에 쥐약 아니야?”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업무의 특성상 클래스의 이해도가 높은 프로그래머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 제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서 있던 근석이 대형 화면에 잡힌 태주의 모습을 응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

*

‘스타트는 바람인가?’

통제실 안의 상황을 알 수 없는 태주가 오른쪽 손가락을 활시위에 걸치며 자세를 낮췄다.

‘역시 궁수의 마음은 궁수가 제일 잘 아는 법이지.’

근석이 어떠한 의도로 바람을 준비한 것인지 눈치챈 태주가 주저 없이 화살의 종류를 교체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휘이이이잉!

뺨을 스치던 바람이 어느덧 어깨를 밀어내는 수준까지 이르렀을 무렵.

꾸웨엑!

활을 든 고블린 한 마리가 바람을 등진 채 나타나 태주를 향해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위치 선정 한번 기가 막히네.’

역풍을 이겨내야 하는 태주의 화살과 달리 고블린의 화살엔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는 불리한 자리 배치였다.

물론 이 또한 몬스터의 생성 지점을 지정할 수 있는 근석의 입김이 반영된 의도적인 구도였지만.

꾸웨엑!

쉬이익!

선제공격을 시도한 쪽은 역시 풍향의 이점을 지닌 고블린이었다.

‘빠르다.’

마치 화살 속도에 버프를 받은 듯 고블린의 손끝을 떠난 화살촉은 태주의 코앞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물론 바람과 달리 고블린의 화살은 증강현실에 불과했지만, 프로그래머의 조작을 통해 얼마든지 풍속을 고려한 화살의 진행 속도를 높이거나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가 좌우가 아닌 과감한 앞점멸을 통해 화살을 뒤로 흘려보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

‘아슬아슬했네.’

고블린에 가까워질수록 역풍은 더 거세지지만, 한편으론 바람의 영향을 받게 되는 구간이 줄어들어 적중률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내린 과감한 판단이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 태주가 두 번째 화살을 준비하고 있는 고블린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