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청출어람 (3)
“네. 뭐.”
만난 지 채 10분도 안 됐지만, 오 대표를 대하는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어떠한 질문이 이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졸업하면 어느 길드로 가실 겁니까?”
질문의 주제는 태주의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네? 길드요?”
사적이라고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오 대표의 지시를 받아 태동을 추천하려는 속셈 같았다.
“글쎄요.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확답을 피했다.
최 총장과의 거래 내용상 졸업하기 전까진 특정 길드에게 확신을 주면 안 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럼 태동은 가지 마세요.”
“……?!”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다 생각했던 문 비서가 결국 선을 넘는 발언으로 태주를 당황케 했다.
“어제 태동을 1순위로 뽑으셨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박스 정리를 마친 문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제가 태동을 택하면 안 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기에 문 비서의 뜬금없는 충고가 더욱 의아하게 다가온 태주였다.
“청출어람.”
문 비서가 퀴즈의 정답을 외치듯 단답형으로 말했다.
“네? 청출어람이요?”
태주가 되물은 건 사자성어의 뜻이 아닌 비유의 의도였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 원래는 노력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보통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일컬을 때 사용되곤 하죠. 태주 씨가 오 대표님보다 더 뛰어난 헌터인 것처럼.”
“……?!”
오 대표의 귀에 들어갈까 무서운 문 비서의 아슬아슬한 발언이 또 한 번 선을 넘었다.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하지만, 동의할 순 없는 평가네요.”
불필요한 구설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문 비서의 의견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전 아직 헌터가 아닙니다. 예비라는 수식어도 과분한 걸음마 단계의 각성자지.”
“네. 하지만 언젠가 되실 거잖아요. 오 대표님을 뛰어넘을 최고의 헌터가.”
문 비서는 신화의 단성혁 대표가 했던 일침을 인용한 태주의 겸손한 대처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지 잘 모르겠네요.”
“모든 스승이 제자의 청출어람을 기뻐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태주 씨 팬이라서요.”
협회장을 너무 믿지 말라 경고했던 오 대표의 길드로 들어가지 말라 하는 문 비서의 경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미묘한 의심의 연결 고리가 태주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뭐지? 오승훈 대표님께서 내 성장을 질투하실 거란 뜻인가?’
오 대표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 비서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였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태주의 입장에선 팬이라는 말에 혹해 무작정 경계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태동엔 가지 말라고 했던 그 말. 혹시 인턴십에도 해당하는 겁니까?”
“아니요. 인턴십은 꼭 참여해 주세요.”
“왜죠? 문 비서님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일찌감치 거리를 두는 게 더 나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가까이에서 대표님을 자극해야 티를 내시지 않겠습니까? 인턴십과 취업이 별개이기도 하지만, 5대 길드가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마당에 태동만 제외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
오 대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마저 의심되는 문 비서의 노골적인 코칭에 태주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물론 문 비서의 의견이 어떠하든 인턴십의 순서를 변경하거나 불참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럼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실례 많았습니다.”
사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고마움보단 의아함이 앞서는 조언을 일방적으로 마친 문 비서가 박스의 잔해를 포개어 왼쪽 옆구리에 낀 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 잠시만요.”
대화의 마무리가 개운치 않았던 태주가 현관 쪽으로 향하던 문 비서를 불러 세웠다.
“네. 듣고 있습니다.”
태주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춘 문기윤이 비서다운 꼿꼿한 자세로 돌아서며 말했다.
“제가 오승훈 대표님께 이 사실을 고자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상식적으로 초면인 문 비서보단 학연으로 이어진 오 대표와의 관계가 더 긴밀할 수밖에 없었을뿐더러, 자신의 팬이라는 확인할 수 없는 고백이 이간질을 감싸주는 면죄부가 될 수도 없었다.
“아, 제가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진짜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는 문 비서의 빠른 인정에 묻는 쪽이 오히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럼 차라리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가뜩이나 불경기인데, 이런 사유로 쫓겨나면 재취업도 힘들거든요.”
부탁의 형식을 취하곤 있었지만, 태주에게 간청하는 문 비서의 표정과 말투, 그 어느 곳에서도 해고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참 아이러니하네요. 대표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분의 마음이 대표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다는 게.”
“대표님을 싫어한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팬의 한 사람으로서 태주 씨의 앞날을 응원할 뿐이지.”
마지막까지 자신을 변호한 문 비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채 현관문을 나섰다.
삐리리!
도어 록 소리와 함께 다시금 찾아온 정적.
‘누가 같은 길드 아니랄까 봐.’
공교롭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남긴 두 사람 모두 태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나저나 문 비서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네.’
일단은 오 대표와 하 대표의 불화를 처음 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판단을 유보하기로 한 태주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보 내용의 신빙성 못지않게 중요한 제보자의 신뢰성부터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
*
*
다음 날 오후.
궁수 모임 아이들 모두 엄 교수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트레이닝 돔을 빠져나갔지만, 태주만은 근석과의 선약을 위해 훈련장에 남아 있었다.
【수업이 끝났는데 어디로 갈까요?】
[어? 오늘은 좀 일찍 끝났네?]
태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근석이 1이 사라짐과 동시에 답장을 보냈다.
[그럼 B6에 있는 웨더 트레이닝 센터로 와.]
【네? 웨더 트레이닝 센터요? 그게 어디쯤에 있는 거죠?】
태주가 모른 척, 신입생의 관점에서 답장을 보냈다.
B12, 다시 말해, 지하 12층까지 존재하는 트레이닝 돔의 지하는 개미굴에 비유될 만큼 그 구조가 복잡하여 이름만 듣고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아, 아직 1학년이라 잘 모르겠네. 일단 궁수 훈련장에서 가장 가까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6층까지 내려간 다음에…….]
태주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근석이 자신이 있는 곳을 장문의 메시지로 알려 주었다.
【네. 일단 찾아가 보겠습니다.】
물론 태주의 발걸음은 이미 지하 3층에 위치한 날씨 훈련장을 향하고 있었지만.
*
*
*
잠시 후.
웨더 트레이닝 센터에 다다른 태주가 문 앞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는 근석의 모습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도 잘 찾아왔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근석이 태주의 인사에 고개를 들어 반겼다.
“선배님께서 잘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도착 시간을 조절하면서 온 태주가 근석에게 받은 장문의 메시지를 보여주며 훈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잘 알려주긴. 네가 잘 찾아온 거지.”
예의상으로 건넨 말임에도 불구하고 근석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무튼 들어가자. 사용 허가는 내가 미리 받아 놨으니까.”
헌터관에 있는 빈 강의실의 경우 별도의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트레이닝 돔 지하에 위치한, 특히, 강의실로 배정되지 않은 훈련 공간의 경우 교수나 관리자들의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물론 이건 최 총장이 준 마스터 카드로 인해 3급 통제 구역에 위치한 개인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는 태주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원칙이었지만.
“네.”
태주가 근석의 뒤를 따라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내부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평범한 입구의 크기와 대조적인 아파트 4층 높이의 천장고.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한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달리 감회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태주였다.
“어때? 엄청 넓지?”
앞장을 선 탓에 태주의 표정을 읽지 못한 근석이 한 박자 늦게 돌아보며 물었다.
“네. 정말 크네요. 천장도 높고.”
“여기가 바로 웨더 트레이닝 센터야. 쉽게 말해, 던전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날씨별 전투 상황과 급격한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하는 곳이지.”
“아아, 그럼 인위적으로 전투 환경을 설정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바로 저곳에서.”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용도를 설명하던 근석이 태주의 영혼 없는 질문에 통제실을 가리켰다.
“물론 조작은 내가 아닌 프로그래머분께서 하실 거야.”
전문적인 교육 없이 게임처럼 다룰 수 있는 형식도 아니었거니와 오작동으로 인한 신체적인 위험 또한 내재되어 있다 보니, 사용 허가와는 별개로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 자체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설마 3시간짜리 수업을 하고 왔는데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훈련을 하는 겁니까?”
태주가 입구 위에 설치된 시계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작년 이맘때쯤 딱 너와 같은 상황이었거든. 물론 전 시간이 직업 탐구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3시간 연강에 밥도 못 먹은 상태로 여기까지 끌려왔었지.”
‘역시 도제식 트레이닝 때문에 부른 건가?’
만남의 목적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태주가 근석의 경험담에서 확신을 얻었다.
“3학년 임성호 선배라고 알지? 저번에 면접 뒤풀이 때 봤던.”
“네. 기억납니다.”
근석으로부터 선배들을 소개받았던 태주가 A급 궁수인 26기 임성호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리며 말했다.
“그 선배가 내 도제식 트레이닝의 스승인데, 자기도 신입생 때 여기로 끌려와서 똑같이 당했다고 했었거든. 뭐,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었고.”
대물림되는 고통은 전통이 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선배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잘난 후배의 기를 꺾기 위한 수단으론 이만한 게 없다고 판단한 근석이었다.
‘똑같이 당했다라…….’
근석이 사용한 동사의 부정적인 어감을 통해 기선제압을 위한 혹독한 신고식이 예정되어 있음을 눈치챈 태주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그 말인즉슨, 최소 2년간 극복한 선배들이 없었다는 거네.’
스승보다 나은 제자가 될 것이라 했던 문 비서의 확신에 찬 예견.
청출어람의 운명을 얻게 된, 더구나 웨더 트레이닝 센터의 유경험자인 태주로선 근석이 마련한 유서 깊은 시련이 가소로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정 못 버티겠다 싶으면, CCTV 쪽으로 힘차게 손을 흔들어. 그럼 포기한다는 사인으로 알고 테스트를 종료할 테니까. 알았지?”
통제실로 가기 전,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 근석이 심심한 위로를 전하듯 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네.”
물론 누가 누구의 위로를 받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