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청출어람 (2)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어?’
방에서 현관 앞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태주가 문 너머에서 발산되는 심상치 않은 마력을 감지했다.
‘우리 집을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대부분의 지인이 각성자였지만, 따로 초대를 하거나 주소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누구지?’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했던 태주가 한쪽 눈을 외시경에 갖다 댔다.
‘으음?’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30대 중반의 남성이 태주의 시야에 들어왔지만, 아쉽게도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바로 그때.
[“신태주 씨?”]
의문의 남성이 갑자기 태주의 이름을 불렀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상태라 상대방 역시 태주의 마력을 감지한 것이었다.
“네. 누구시죠?”
[“오승훈 대표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오 대표님이? 그럼 설마.’
순간, 이번 주 안에 꼭 활대를 찾아 집으로 보내주겠다던 오 대표의 약속이 떠올랐다.
“잠시만요.”
삐리리!
신분 확인을 마친 태주가 도어 록을 푼 뒤 활짝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승훈 대표님의 수행 비서로 있는 문기윤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상사를 대하듯 정중히 고개를 숙인 문 비서가 자신의 소속을 정식으로 밝혔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덩달아 고개를 숙인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비서의 곁에 세워진 기다란 박스로 옮겨졌다.
“휴일에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도 대표님의 호출을 갑자기 받은 터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못 드린 것도 서프라이즈를 좋아하시는 대표님의 아이디어였고요.”
모시는 분의 결례를 감싸는 대다수의 비서들과 달리 문 비서는 무례한 방문에 대한 책임을 오 대표에게 떠넘겼다.
“네? 서프라이즈요? 제가 집을 비웠으면 어쩌려고…….”
오 대표의 대책 없는 심부름에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랬다면 제가 따로 전화를 드렸을 겁니다. 서프라이즈도 중요하지만, 제 휴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까요.”
“네? 아, 네. 뭐, 그렇긴 하죠. 워라벨.”
필요 이상으로 솔직한 문 비서의 대답에 또 한 번 웃음이 새어 나온 태주였다.
“하지만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이미 태주 씨의 마력이 느껴져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뭐야, 내가 방에 있을 때부터 눈치챘다고?’
현관 앞으로 이동한 시점에 알아차린 것이라 여기고 있던 태주가 문 비서의 예민한 감지 능력에 예사 인물이 아님을 확신했다.
‘하긴, 명색이 오 대표님의 수행 비서인데, 아무나 뽑진 않으셨겠지.’
겉으로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박스 안에서 발산되는 마력은 이미 문 비서의 마력에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잠시 들어가서 얘길 나눠도 될까요?”
퀵서비스처럼 물건만 전해주고 가리란 예상과 달리 옆에 세워둔 박스를 번쩍 들어 안은 문 비서가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아,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채 서 있던 태주가 황급히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인사만큼은 누구보다 정중한 문 비서가 본의 아니게 태주의 집을 방문한 첫 번째 외부인이 되었다.
삐리리!
‘캐릭터 하난 확실하네.’
문을 닫은 태주가 문 비서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디다 놓을까요?”
거실로 들어선 문 비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냥 바닥에 두시면 됩니다.”
“네. 그럼.”
태주의 허락을 받은 문 비서가 바닥에 눕힌 기다란 박스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타닥! 투두둑!
도구를 쓸 법도 했지만, 문 비서는 오로지 힘으로 요령 없이 박스를 뜯어냈다.
‘어? 저게 바로 그…….’
성의 없는 박스 포장을 걷어내자 메탈 소재로 된 세련된 보관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접 열어보시겠습니까? 참고로 비번은 8282입니다.”
다소 거친 느낌의 언박싱을 마친 문 비서가 보관함을 꺼내 태주의 발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퉁!
물론 활대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탓에 바닥이 울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아, 8282. 왠지 빨리 열어봐야 될 거 같네요.”
한쪽 무릎을 꿇은 태주가 네 자리의 숫자를 정렬한 뒤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딸깍!
‘와아. 뿔로 만들었다고 해서 투박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
메탈 케이스를 열자 활시위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던 활대의 강인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자태가 태주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종도 교수님께서 주신 활하고는 차원이 다른데?’
고뇌하는 하급 정령의 활 역시 장비 덕후로 알려진 이 교수의 화려한 컬렉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레이드 보우였지만, 제아무리 고급에서 희귀 등급으로 강화되었다 한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미지의 존재로부터 창조된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넘어설 순 없는 법이었다.
“오승훈 대표님께서 보내신 썬더 드래곤의 뿔로 만든 전격의 활, 아니, 활대입니다. 전설 등급이 책정된 아주 특별한 아티팩트죠.”
태주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읽어낸 문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활대의 정보를 설명했다.
“네. 그래 보이네요.”
활대를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꺼내든 태주가 굽혔던 무릎을 펴며 천천히 일어섰다.
바로 그때.
“네. 대표님. 지금 막 전해드렸습니다.”
태주가 활대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심부름을 마친 문 비서는 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저, 태주 씨. 여기 좀 봐주세요.”
귀에서 휴대폰을 뗀 문 비서가 영상 통화로 전환된 화면을 태주에게 들이밀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별다른 일정이 없는 관계로 지나치게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태주가 문 비서의 돌발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 벌써 꺼냈네?”]
활대를 든 태주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오 대표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때. 내 서프라이즈가. 오늘 보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문 비서의 지나친 솔직함으로 인해 놀라움이 반감되었음을 모르는 오 대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이렇게 빨리 보내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어. 아, 줄은 아직 안 걸었지?”]
“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활대를 왼손으로 옮긴 태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활시위를 오른손에 걸친 채 휴대폰 앞에 들어 보였다.
[“오오, 그럼 말 나온 김에 한번 연결해 봐. 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좀 궁금하니까.”]
“지금요?”
[“어. 그리고 하 대표님이랑 만날 때 보여 드리게 인증샷도 한 장만 찍어서 보내줘.”]
“네. 대신 지금은 모양새가 좀 그러니까 나중에 멀쩡한 차림으로 찍겠습니다.”
두 팔을 벌려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준 태주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그래. 어차피 당장 만나러 갈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이번 주 안으로만 찍어 보내.”]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럼 지금 바로 결합하겠습니다.”
오 대표와의 합의점을 찾은 태주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활시위를 걸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썬더 드래곤의 뿔로 만든 전격의 활]
- 등급: 전설
결합을 마친 태주가 노멀 애로우를 선택한 뒤 활시위를 당기자 페어링의 실패를 알리는 메시지가 아닌, 그토록 궁금했던 장비의 세부 스펙이 떠올랐다.
‘됐다.’
버프의 효과를 100% 활성화시키기 위한 조건을 마침내 충족시킨 태주가 설레는 마음으로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 근력 120% 증가
- 공격력 150% 증가
‘으음. 구성은 비슷한데 수치가 압도적이네.’
10%의 근력 증가와 40%의 공격력 증가 옵션이 붙어 있던 이 교수의 활과는 버프의 자릿수부터가 남달랐다.
- 치명타 확률 85% 증가
- 치명타 대미지 350% 증가
- 명중률 70% 증가
- 화살 속도 50% 증가
‘어? 뭐야, 치명타 대미지가 350퍼센트라고?!’
두 눈을 의심케 하는 치명타 대미지의 월등한 증가율에 다른 숫자들이 묻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치명타 확률에 명중률까지 이 정도면 거의 일발필중에 일발필살 수준인데?’
선택과 집중.
표면적인 옵션의 개수는 이 교수의 활보다 적었지만, 그러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확실한 테마를 가진 아티팩트였다.
‘그나저나 수업 중엔 계속 이 교수님의 활을 써야 되나?’
수치화된 파괴력이 머릿속에 그려지다 보니 활을 사용하기 전부터 과녁의 상태를 걱정하게 된 태주였다.
- 명중 시 20%의 확률로 전격 효과 발생- 전격 속성 공격 무력화
‘이름값은 마지막 옵션에서 하네.’
썬더 드래곤의 신체 일부를 재료로 한 아티팩트답게 라이트닝 마법을 기반으로 한 추가 대미지와 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직접 당겨 보니 어때? 확실히 느낌이 달라?”]
“네. 괜히 전설 등급이 아니네요. 디자인도 훌륭하고.”
활시위를 원위치 시켜 장전된 화살을 사라지게 한 태주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이네. 문 비서.”]
일종의 비대면 전달식을 마친 오 대표가 화면 뒤에 숨어 있던 문 비서를 불러냈다.
“네, 대표님.”
[“물건 전달하느라 수고했어.”]
“네.”
빈말 따윈 없는 문 비서의 입에선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휴일 수당도 수당이지만, 아무래도 내일은 오후에 출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해.”]
문 비서의 요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당당함도 아니었기 때문에 문 비서의 태도와 그러한 태도에 익숙해진 오 대표의 반응 모두 태주의 눈엔 신선할 따름이었다.
[“나올 때 뒷정리 잘하고.”]
물론 더 놀라운 것은 바닥을 따로 비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스의 상태가 엉망인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오 대표의 자연스러운 지시 사항이었지만.
“네. 알겠습니다.”
직설적인 성격만큼이나 대답도 시원시원한 문 비서가 화면의 방향을 다시 태주에게로 돌렸다.
[“그럼 태주 너도 쉬어. 아까 말한 인증샷 보내는 거 잊지 말고.”]
“네.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주의 인사를 끝으로 3분 남짓의 짧은 통화가 종료되었다.
“모쪼록 실례가 많았습니다.”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문 비서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이 가져온 박스의 잔해들을 손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두고 가시면 제가 치우겠습니다.”
“아니요. 여기까지가 제 업무입니다.”
활을 거둔 태주가 일손을 보태려 하자 하던 일을 멈춘 문 비서가 활짝 편 오른손을 뻗으며 태주의 접근을 막았다.
“네? 아,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건 오 대표님의 말을 잘 듣는 거야 아님 융통성이 없는 거야?’
태주가 문 비서의 단호한 거절에 황당해하던 바로 그때.
“사적인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박스를 힘으로 포개고 있던 문 비서가 갑자기 태주를 올려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