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청출어람 (1)
“……퍼스트 에이드였습니다.”
쉼표를 찍듯 짧은 침묵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태주가 뜻밖의 주제를 꺼내 들었다.
“뭐? 퍼스트 에이드?”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흠칫한 오 대표가 태주를 힐끗 쳐다보며 되물었다.
“네. 아무리 생각해도 도움을 받는 경우보다 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아서요.”
28기인 태주의 위로는 수많은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고, 동기는 5명, 거기에 매년 6명의 후배들이 추가된다고 봤을 때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퍼스트 에이드의 가성비가 썩 좋다고 볼 순 없었다.
물론 위기에 봉착한 자신을 모두가 외면해도 피크닉만큼은 절대 모른 척하지 않는다는 퍼스트 에이드의 기본 방침만큼은 그 어떠한 보험보다 든든하게 다가왔지만.
“아, 그거.”
질문을 들은 오 대표가 태주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네가 지금 몇 기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오 대표가 아들뻘이라 할 수 있는 태주에게 피크닉의 기수를 물었다.
“28기입니다.”
“28기? 와아, 벌써 그렇게 됐나?”
태주의 대답에 유수와 같은 세월을 실감한 오 대표가 자신의 신입생 시절을 회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몇 기인지는 알아?”
한국대 헌터학과 1기가 만든 동아리가 피크닉이라, 다시 말해, 입학 기수가 곧 피크닉의 기수가 되는 형태라 무슨 기수를 묻는 건지 따로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이 있었다.
“5기 아니십니까?”
최소한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온 태주가 온라인상에 공개된 오 대표의 입학 기수를 토대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 5기. 너랑은 무려 23기 차이지.”
“진짜 까마득하네요.”
굳이 따져본 적은 없었지만, 막상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입학을 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나니, 조금 전 있었던 식사 자리의 멤버 구성이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까마득하지. 물론 실력은 그 정도 차이가 아니지만.”
태주와의 기수 차이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대선배인 오 대표의 입에선 까마득한 후배에 대한 쉽지 않은 인정이 이어졌다.
“과찬이십니다.”
물론 자신의 잠재력을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주의 입장에선 오 대표의 리스펙트가 어느 정도의 고민 끝에 나온 결단인지 선뜻 가늠할 수 없었지만.
“겸손할 거 없어. 어차피 빈말이었으면, 오늘처럼 모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오 대표의 말대로 객관적인 검증 없이 개인적인 친분이나 단순한 호의 따위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아무튼, 네 위로 있는 27기수의 선배들. 그 선배들이 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퍼스트 에이드를 쓴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부담이 된다는 건 인정해. 너한테 선배들이 많은 것처럼 나한테도 그만큼의 후배들이 생긴 거니까. 근데.”
태주의 현실적인 우려를 부정하지 않은 오 대표가 문제를 대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퍼스트 에이드의 운용 방식이 바뀌지 않는 나름의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챙길 사람이 많다는 건, 손을 내밀 사람 또한 많다는 뜻이 아닐까? 십시일반, n분의 1. 쉽게 말해, 100명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99명과 힘을 합쳐서 1명만 도우면 된다는 마인드로 접근해 봐. 그럼 심적인 부담감도 줄어들고, 후배들이 늘어나는 것도 짐스럽지 않을 테니까.”
힘을 합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를 들진 않았지만, 태주는 이미 염 기사로부터 회원 개인이 아닌 다수의 피크닉 중진들이 삼강의 하 대표를 찾아와 백승걸의 뒷수습을 논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 물론 정신 승리를 하자는 건 아니야. 애초에 개인이 아닌 조직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구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특정 회원에게만 전적으로 해결을 위임하는 경우는 절대 없거든.”
발상의 전환에 그치는 접근법이 아님을 짚고 넘어간 오 대표가 부연 설명 말미에 오른쪽 검지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자, 어떻게. 질문에 대한 답이 좀 됐나?”
자신의 오랜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여긴 오 대표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말씀해 주신 대로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원하는 답변을 들은 오 대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이고, 몇 마디 안 한 거 같은데 벌써 집까지 다 왔네?”
초행길인 탓에 한 번씩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던 오 대표가 차창 밖으로 펼쳐진 낯선 야경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 참, 그리고 활대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한번 뒤져봐야 되니까 늦어도 이번 주 안엔 꼭 찾아서 집으로 보내줄게.”
활을 쓸 일이 없는 법사 클래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하 대표와의 사이가 틀어졌던 게 활대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 대표로부터 확답을 얻은 태주가 활시위와의 재결합을 통한 버프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활대의 소유권 이전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는 무슨. 인턴십 순서도 그렇고, 하 대표님과의 화해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내가 더 고맙……, 어? 잠깐. 근데 너 설마 활대만 딱 받고 순서를 바꾸려는 건 아니지?”
잠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불현듯 떠오른 오 대표가 농담을 가장해 태주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인턴십의 순서를 배정하거나 하 대표와의 화해를 종용한 것이 아님을 밝혔던 태주가 활대까지 확보한 시점에서 굳이 질투심이 강한 오 대표의 심기를 자극할 이유는 없었지만.
“하긴, 너처럼 신중한 애가 고작 활대 하나 얻자고 선배들을 농락할 리 없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태주의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되찾은 오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목적지 부근에 도착하여 경로 안내를 종료합니다.]
대화를 끝맺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내비게이션의 사무적인 음성.
“어찌 됐건, 오늘 대선배들 틈에서 아주 고생 많았어.”
공용 현관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운 오 대표가 태주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제가 더 영광이었습니다.”
마치 거래가 성사된 의미로 나누는 악수처럼 오 대표와 손을 맞잡은 태주의 얼굴에선 의례적인 표정 관리 이상의 화색이 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 그리고 이건 내가 기분이 좋아서 해주는 말인데.”
악수를 거둔 손으로 입을 가린 오 대표가 갑자기 태주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협회장님을 너무 믿지 마.”
“……?!”
안전벨트를 풀고 있던 태주가 모함이란 생각마저 드는 오 대표의 충격적인 경고에 두 귀를 의심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그도 그럴 것이 협회장의 도움으로 대입 추천서를 받은 것은 물론 인턴십의 참여까지 확정 짓게 된 태주의 입장에선 협회장에 대한 신뢰가 확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 네가 지금 협회장님을 뵌 지 얼마나 됐지?”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리 없는 오 대표가 의심으로 가득 찬 태주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 몇 달 안 됐습니다.”
원서를 쓰기 딱 일주일 전에 있었던 진우와의 기적적인 조우와 그것을 계기로 성사된 협회장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태주가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기간을 산정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 이유는 차차 시간이 알려줄 거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고.”
태주의 모호한 답변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내놓은 오 대표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궁금증을 더해갔다.
“그리고 너보다 협회장님을 더 오래 뵌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의심하지 말고 새겨들어.”
“네. 일단 명심하겠습니다.”
조언자의 체면을 고려해 적당히 수용하는 액션은 취했지만, 민감한 사안일수록 성급한 판단을 지양하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했다.
물론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오 대표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차에서 내린 이후에도 줄곧 태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
*
*
다음 날 오후.
지이잉!
늦잠과 함께 모처럼의 한가로운 휴일을 즐기고 있던 태주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27기 류근석 선배님]
‘으음? 이 선배가 어쩐 일이지?’
피크닉의 면접 뒤풀이 당시 연락처만 주고받았던 터라 사적으로 연락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일 시간표 빡세?]
‘뭐야, 갑자기 이걸 왜 물어보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태주가 텍스트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늦지 않게 답장을 보냈다.
【내일은 직업 탐구1 하나라 그나마 널널합니다.】
[직업 탐구1이면 엄승준 교수님 수업?]
같은 궁수 계열에 직속 선배이다 보니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다는 장점과 함부로 속일 수 없다는 단점이 공존했다.
【네.】
[ㅋㅋㅋ 요즘도 수업 시간마다 득근하고 있어? 거기 완전 무투가 복수 전공 코스잖아. ㅋㅋㅋ 내가 작년에 수강할 때만 해도 활이랑 덤벨을 거의 6:4 비율로 들었었는데.]
【네. 올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근석의 분위기가 그리 심각하진 않다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잡담이 길어지기 전에 먼저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근데 내일 동아리에서 무슨 중요한 행사라도 있습니까?】
[아니. 행사까진 아니고, 그냥 너랑 가볍게 밥이나 한 끼 하려고.]
【어? 그럼 혹시 다른 선배님들도 오십니까?】
[아니. 우리 둘만 볼 건데? 왜? 부담스러워?]
【아니요. 그냥 여쭤본 겁니다.】
불과 하루 전, 대한민국 최고의 거물급 헌터들과 한 상에 둘러앉았던 태주가 고작 1년 차이인, 심지어 자신보다 각성 등급도 낮은 선배와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러울 리 없었다.
[그래? 그럼 수업 끝나는 대로 연락해. 난 트레이닝 돔에서 훈련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네? 훈련 준비요?】
선후배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태주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다 얘기하면 재미없으니까 자세한 건 내일 만나서 알려줄게. 그럼 수고.]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트레이닝 돔에서 둘이 뭐 하자는 거지?’
근석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태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 그때.
딩동!
‘으음?’
입이 아닌 엄지로 대화를 하느라 잠잠했던 집 안에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