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협상 테이블 (7)
할 말이 없을 때뿐만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을 때도 말문이 막히는 법이었다.
“…….”
물론 오 대표의 침묵으로 인한 정적은 그 두 경우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 여러모로.”
첫 대면이라 할 수 있는 협회에서의 등급 측정 당시에도 그랬지만, 태주는 늘 오 대표의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질투의 대상이자 성장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자극제였다.
“삼강에 갔었다더니 그때 받은 거야? 하 대표의 아들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식사 자리에 도착한 직후, 이 대표로부터 태주가 하 대표의 아들과 동기이며, 본사로 초대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 있는 오 대표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물론 소식의 최초 전달자인 이 대표마저 보답의 실체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했던 터라 오 대표가 느끼는 급작스러움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이었지만.
“네.”
“으음.”
태주의 짧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대답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오 대표였다.
적의 적은 친구요, 적의 친구는 적이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태주는 자신에게 있어 적이 아닌, 친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 대표가 그래? 활대는 나한테 있다고?”
“네. 오래전, 동맹의 의미로 나누어 가진 것이라 들었습니다.”
“동맹……. 틀린 말은 아니야. 오래가지 못한 게 문제였지.”
동맹이란 단어를 잠시 곱씹어 보던 오 대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 대표와의 과거를 인정했다.
“하 대표가 다른 얘기는 안 해?”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닌 만큼 태주가 알고 있는 선까지만 이야기를 풀어낼 요량이었던 오 대표가 떠보듯이 물었다.
“했습니다.”
“했어? 뭐라고 했는데?”
“오해라고 하셨습니다.”
“뭐? 오해?”
전방을 주시하던 오 대표가 조수석에 앉은 태주를 홱 하니 돌아보며 기가 찬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아니요. 그런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승훈 대표님께 불화의 책임이 있다고 하신 적도 없고요.”
제삼자인 태주가 하 대표의 입장을 대변하고, 두 사람의 화해를 유도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완성된 활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뭐가 오해라는 건데?”
“하도철 대표님 역시 오승훈 대표님처럼 말을 아끼시긴 했지만, 제가 느낀 그대로를 말씀드리자면, 그저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해가 부족했다고?”
“네. 두 분의 직함은 대표로 동일하지만, 헌터와 사업가의 비즈니스 방식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정확히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협력 관계에 놓인 길드와 던전 채굴 회사가 같은 업계에 있다고 여기는 오 대표가 두 사람의 영역을 재조명하는 태주의 새로운 접근법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다른 길드를 대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오 대표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진 것을 느낀 태주가 오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첫 번째 단추를 끼웠다.
“다른 길드를 대하는 방식?”
“네. 조금 전, 인턴십의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지만, 길드와 길드는 기본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설령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그 밑바탕엔 다른 길드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경쟁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죠. 실제로 길드의 주수입원인 레이드의 경우만 봐도 입찰 경쟁에서 승리해야 던전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구조고요.”
오 대표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길드의 관점부터 전략적으로 소개한 태주가 길드의 존속 방식을 경쟁과 연관 지어 피력했다.
“반면, 던전 채굴 회사의 경우, 특히, 삼강 하베스트처럼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메이저 채굴 회사의 경우 한 곳이 아닌, 수십, 수백 곳의 길드와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동시에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시 말해, 각각의 길드가 경쟁의 대상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대상이 되는 셈이죠.”
삼강의 하 대표로부터 질투심 많은 오 대표가 어떠한 포인트에서 서운함을 느꼈는지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태주가 오해의 계기가 된 던전 채굴 회사의 거래처 관리 방식을 언급하며 화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뭐야, 그럼 아티팩트를 나눠 가질 만큼 각별한 동맹 관계였던 나를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녀석들과 똑같이 대하는 게 당연하다는 거야?”
순간, 차분해지는가 싶었던 오 대표의 언성이 다시금 높아졌다.
“아니요. 당연한 건 없습니다. 원래 대부분의 오해는 그 당연하다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니까요.”
“……?!”
오 대표의 선택과 하 대표에 대한 비난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당연함.
재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대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하 대표가 삼강을 불시에 방문한 이 대표에게 상석까지 내어주며 굽실거렸던 이유가 당연함에 있다고 판단한 태주가 동맹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각성자와 비각성자, 그리고 길드와 던전 채굴 회사 사이의 고질적인 갑을 관계를 꼬집으며 오 대표를 당황케 했다.
“태동이 5대 길드로 발돋움하기 전, 그러니까 오승훈 대표님께서 막 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활을 나눠 가지셨다 들었습니다. 활의 원소유자는 당연히 보스를 잡은 오승훈 대표님의 것이었고요.”
“그래.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태주에게 예민하게 굴 이유는 없었지만,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해 외면했던 진실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인 말투가 나온 오 대표였다.
“아시다시피, 던전에서 입수한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누군가와 나눈다는 건 일반적이지도 않고,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더더욱 아닙니다. 쉽게 말해, 오승훈 대표님께서 그러한 결정을 내리신 것 자체가 각성자로서의 권위 의식을 내려놓은 것이며, 두 분의 초기 동맹 관계를 대등하게 여기신 것이라 해석할 수 있죠.”
본디 갑을 관계로 시작된 동맹이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던 태주가 밀당을 하듯 오 대표를 추켜세우며 지적에 대한 반발심을 낮추려 했다.
“하아.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순진했던 시절이지.”
차창을 반쯤 내린 오 대표가 서늘한 밤공기를 맞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때의 마음으로 돌이킬 순 있습니다.”
찰나였지만, 오 대표가 회상에 잠긴 것만으로도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였다.
“쳇! 나더러 지금 하 대표랑 화해하라는 거야? 내가 왜?”
태주의 차분한 설득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자존심상 까마득한 후배 앞에서 자신의 옹졸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오 대표가 느끼고 있을 민망함이 두 사람의 관계 회복에 새로운 걸림돌이 될 것이란 걸 이미 예견하고 있던 태주로선 그리 당혹스러운 반응도 아니었지만.
“그야 당연히 배신이 아닌 오해였으니까요.”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 위한 마지막 단추.
중재를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태주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지난날의 책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 하나를 제공했다.
“…….”
그리고 이어진 오 대표의 기약 없는 침묵.
‘일단 고민을 하면 성공이다.’
인턴십의 순서 발표를 앞둔 태주가 그랬듯 결정권자의 침묵은 늘 긴장감을 유발하기 마련이었지만, 이번 상황은 오히려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오 대표가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만 보니 필요한 것과 궁금한 것 중 필요한 것에 해당하는 녀석이 활대인 거 같은데, 설마 하 대표와의 화해 없이는 활대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러는 거야? 인턴십의 순서를 1번으로 해준 것도 다 그 때문이고?”
태주가 자신과 하 대표의 관계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와 태동을 첫 번째 길드로 선정한 이유가 모두 활대에 있다고 여긴 오 대표가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지루한 정적을 깼다.
“그럼 내가 활대를 줄 테니까 하 대표와의 화해 제안은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어때? 어차피 잠정적인 결정이니 인턴십의 순서도 아레나랑 바꾸고 말이야.”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오 대표의 반문이 고민의 바통을 태주에게로 넘겼다.
‘나처럼 역제안을 하네?’
물론 활대에 눈이 먼 나머지, 제안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한 오 대표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 입장을 번복할 만큼 근시안적인 태주가 아니었지만.
“네. 어차피 전 제삼자라 오승훈 대표님의 말씀대로 활대만 받아도 손해 볼 건 없습니다. 다만.”
오 대표의 역제안을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넘긴 태주가 고민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하도철 대표님께선 오해가 있었던 당시에도 여전히 태동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두 분의 화해를 바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하도철 대표님의 진심 어린 고백을 오승훈 대표님께 전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이 대표의 특기인 실리적인 의도를 숨긴 채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화법을 모방한 태주가 하 대표의 실제 발언을 인용하며, 오 대표의 마음을 공략했다.
“더구나 잠정적이긴 해도 협회장님과 총장님까지 모신 중요한 자리에서 고작 사심을 채우기 위해 대표님들을 기만한 사실도 결코 없습니다.”
“진짜야?”
태주의 확신에 찬 해명을 들은 오 대표가 긴가민가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확인이 필요하시면, 지금이라도 전화해 볼까요?”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던 태주가 하 대표에게 직접 받은 명함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나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지.”
태주의 당당한 태도에 의심을 거둔 오 대표가 하 대표의 명함을 오른손으로 슬며시 밀어내며 전방을 주시했다.
“대신. 내가 따로 하 대표님한테 연락하기 전까진 먼저 얘기하지 마. 네가 중간에서 어떻게 힘을 썼는지는 내가 알아서 잘 설명할 테니까.”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오 대표가 태주에게 일종의 엠바고를 요청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더 놀라운 것은 사이가 틀어진 시점부터 존대를 하고 있지 않던 오 대표가 하 대표의 직함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지만.
‘됐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이미지 관리에 성공함과 동시에 활대까지 확보하게 된 태주가 하 대표의 명함을 거둔 뒤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참,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나한테 묻고 싶은 내용은 뭐야?”
필요한 것과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떠올린 오 대표가 태주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하 대표님과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가 궁금해?”
“아니요.”
“아니야? 그럼 하 대표님과 화해를 할 건지 말 건지가 궁금했던 거야?”
“아니요.”
“그것도 아니라고? 그럼 나한테 뭐가 궁금한 건데?”
“제가 궁금한 건…….”
오 대표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마주한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