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71화 (171/242)

171. 협상 테이블 (6)

“왜지? 왜 태동이 첫 번째 길드로 뽑힌 거지?”

뜻밖의 결과에 말문이 막힌 아레나의 이 대표 대신 이유를 물은 건 피크닉 후배들 간의 대결을 지켜보던 SP의 박윤기 대표였다.

“사실 어떤 길드가 됐든 첫 번째 순서로 뽑힐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발표 전에 미리 잠정적이든 확정적이든 길드의 배정 순서엔 어떠한 우열 관계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말씀드린 거고요.”

예상했던 반응을 맞이한 태주가 박 대표의 의아함을 차분한 목소리로 풀어주기 시작했다.

“참고로 선정 기준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은 없다는 전제하에 각기 다른 척도를 적용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결과물이 나왔고요.”

물론 활대를 얻기 위한 사심이 반영된 것이며, 첫 번째 길드를 제외하곤 순서가 뒤바뀌어도 무관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밝힐 순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알맹이가 없는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확답을 피하긴 했지만.

“한마디로 정확한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는 거네요?”

마지막 순번을 받게 된 아레나의 이 대표가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태주가 선정 기준을 둘러싼 이 대표의 추가 질문을 막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물론 태주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추궁이 불가능해진 것과는 별개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소인배로 비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사과를 받아줘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선택인데요 뭐.”

태주의 긍정적인 변심을 바라는 이 대표가 확정된 순서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강조했다.

“아니, 왜 꼭 본인이 뽑혀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 대표의 잘난 척이 내심 못마땅했던 태동의 오 대표가 간만에 느낀 통쾌함에 으스대며 오만함을 지적했다.

“태주 씨, 오늘 보니까 사람 참 괜찮네. 선입견도 없고.”

잇몸이 마르도록 미소가 그치지 않던 오 대표가 이번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태주를 칭찬했다.

‘일단 얘기는 꺼내볼 수 있겠네.’

자신을 대하는 오 대표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태주가 활대를 얻기 위한 순조로운 출발에 덩달아 미소 지었다.

물론 타고난 질투심에 의한 하도철 대표와의 급격한 관계 악화를 타산지석 삼아 경계를 늦추진 않았지만.

*

*

*

잠시 후.

“자, 그럼 이만 일어들 나세.”

식사를 마친 협회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석했던 수장들도 하나둘 사적인 대화를 마무리하며 나갈 채비를 했다.

“차 가지고 왔어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오 대표가 친밀함을 어필하듯 태주의 등에 손을 대며 물었다.

“아니요. 그냥 택시 타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대화를 원하는 쪽은 태주였지만, 고맙게도 동행을 제안한 쪽은 오 대표였다.

물론 경쟁 길드의 대표들이 인턴십 순서의 변경을 목적으로 태주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점을 하듯 호의를 베푼 것이란 느낌도 지울 순 없었지만.

“아, 감사합니다.”

태주가 오 대표의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상대방이 어떠한 의도로 접근했든 태주의 입장에선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딜을 할 수 있는 기회만 얻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감사는요. 제가 더 감사하죠.”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기를 살려준 태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오 대표가 이 대표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처음 식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 비해 몰라보게 표정이 밝아진 오 대표가 활기찬 목소리로 협회장을 비롯한 동석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그래. 다음 모임 때도 웃으면서 보세. 태주 너도 오늘 수고 많았다.”

오 대표의 인사를 받아준 협회장이 태주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닙니다. 매번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추천서에서부터 시작된 협회장의 특혜에 가까운 개입들.

인턴십의 최초 제안자는 이 대표였지만, 대화 중에 나온 단순한 건의 사항을 구체적인 논의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나 업계의 살아 있는 권력인 송기철 협회장의 추진력에 있었다.

“허허, 태주 군, 그럼 학교에서 보세.”

물론 협회장에 버금가는 입김을 지닌 최지문 총장의 숨은 조력도 무시할 순 없었지만.

“네, 총장님. 바쁘신 와중에도 함께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태주가 모임의 일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학사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기꺼이 발걸음 해준 최 총장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 자, 이러다 인사만 한나절 걸리겠네.”

협회장과 최 총장의 인사까진 허락했던 오 대표가 다른 수장들과의 불필요한 소통을 막기 위해 에스코트를 하듯 황급히 태주를 데리고 나갔다.

*

*

*

어느덧 저녁 9시가 다 된 시각.

‘뭐든 넘치네.’

호텔 입구에서 발레파킹을 맡긴 차량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멀리서 다가오는 람보르기니 한 대의 범상치 않은 외관에 오 대표의 것임을 직감했다.

‘저런 걸 공도에서 어떻게 끌고 다니지?’

독특한 패션 감각만큼이나 과감한 래핑.

얼룩말 무늬를 두른 슈퍼카의 등장에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 저기 오네.”

자신의 차를 발견한 오 대표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괜히 탄다고 그랬나?’

물론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든 태주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타요.”

“네.”

황급히 조수석에 올라탄 태주가 얼룩말 무늬 못지않은 차량 내부의 화려한 튜닝 상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네.’

“이제 공적인 자리가 아니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운전대를 잡은 오 대표가 태주의 목적지를 내비게이션에 찍으며 물었다.

“네.”

“오케이. 그럼 출발할게.”

왕! 왕!

묵직한 진동과 함께 우렁찬 배기음을 뿜어낸 얼룩말이 호텔 앞 진입로를 미끄러지듯이 빠져나갔다.

“얼룩말을 탄 기분이 어때?”

대선배인 자신과 단둘이 있는 것을 어려워할 것이라 착각한 오 대표가 가벼운 농담으로 태주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지난주까지는 아나콘다였는데, 한 한 달 정도 타니까 식상한 거 같아서 활기찬 걸로 바꿨어.”

‘아나콘다가 식상해? 그것도 한 달 만에?’

대화의 기본은 경청과 공감이었지만, 오 대표의 취향에 대해선 경청만 하기로 마음먹은 태주였다.

“근데 평소에도 이렇게 직접 운전을 하세요?”

태주가 오늘 모임에 참석한 인원들 중 유일하게 기사를 대동하지 않은 오 대표에게 이유를 물었다.

“어. 내가 원래 드라이브를 좋아하거든. 술을 안 마시니까 딱히 운전대를 맡길 필요도 없고.”

‘아아, 그러고 보니 오 대표님만 술잔에 차를 채워서 건배했었네.’

식사 도중에 가진 협회장의 건배 제의를 떠올려보던 태주가 오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아까 주는 대로 잘 받아 마시던데? 무슨 물 마시는 줄 알았어.”

저항 스킬의 존재를 알 리 없는 오 대표가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연기했던 태주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 맞다. 너 술롱도르였지?”

물론 영입 1순위인 태주의 학교생활은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정기적인 보고를 받고 있었지만.

“네? 아, 네.”

“어? 뭐야, 대답 소리가 영 시원치 않은데? 왜. 내가 네 뒷조사를 한 거 같아서 그래?”

제 발이 저린 오 대표가 예민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사실, 관심 있는 유망주의 성장을 지켜보기 위한 정보원의 활용이 업계에 만연하다는 것쯤은 태주도 이미 알고 있었다.

“뭐,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했다는 식의 변명은 안 통하겠지만, 그래도 다들 선은 지키고 있으니까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아니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래? 그럼 뭐 다행이고……. 아 참, 그리고 앞으로 용돈은 200씩 입금될 거야.”

태주의 너그러운 태도에 한숨을 돌린 오 대표가 대뜸 지원금의 인상 계획을 전했다.

“네? 200씩이나요?”

5대 길드를 통틀어 가장 적은 액수인 100만 원을 보내고 있던 오 대표의 예상치 못한 결정에 태주가 두 귀를 의심했다.

‘1순위의 효과가 생각보다 쏠쏠한데?’

본격적인 딜에 앞서, 인턴십의 순서를 통해 오 대표의 마음부터 열고자 했던 태주의 의도가 제대로 적중했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거 같아서.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아니, 세계 최고의 유망주인데.”

아직 본론으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형식적인 안부 문자만 가끔씩 주고받던 관계에 파트너십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을 이룬 것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1순위로 뽑아주고.”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 오 대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동규 형, 아니, 이 대표님 표정 봤지? 이야, 그런 건 영상으로 따로 남겨 놨어야 되는데.”

탁!

핸들의 상단을 손바닥으로 내리친 오 대표가 순간적인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이 대표의 모습을 떠올리며 강한 아쉬움을 표했다.

“태주야, 뭐 필요한 거나 궁금한 거 없어? 있으면 내가 싹 다 들어줄게.”

기분파 기질이 있는 오 대표가 태주의 입 안에 담겨 있는 제안을 채 듣기도 전에 알아서 대화를 진전시켰다.

“정말입니까?”

“Of course. 뭐든지 말만 해.”

“그럼 필요한 것도 있고, 궁금한 것도 있는데, 둘 다 말씀드려도 됩니까?”

“둘 다? 그래. 뭔데 그래?”

적당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태주가 오 대표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대표님, 혹시 이게 뭔지 기억나십니까?”

“어? 뭐가?”

차선을 변경하기 위해 왼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던 오 대표가 태주의 질문에 시선을 옮기던 바로 그때.

“……?!”

태주의 오른손에 들린 채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활시위를 발견한 오 대표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네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한 오 대표가 태주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다행히 기억이 나셨나 보네요.”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오 대표의 반응이 달가운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활시위를 거뒀다.

“그럼 이제 필요한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아님, 궁금한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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