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70화 (170/242)

170. 협상 테이블 (5)

“그건 그렇고, 한 주씩 돌아가면서 할 거면, 순서도 정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태주와의 일주일을 확보하게 된 풍림의 임경수 대표가 협회장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임 대표의 의견에 수긍한 협회장이 곧장 세 번째 안건을 부의했다.

“자, 여기 혹시 순서에 관심 없는 길드가 있나?”

“…….”

협회장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한 수장들이 첫 번째 인턴십을 차지하기 위한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쉽게 식상함을 느끼는 대중과 언론의 특성상 후순위로 갈수록 손해라는 생각에 선점 의지를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양보할 수 없는 분위기 또한 선택권자의 지위를 십분 활용하려는 태주의 계산 안에 들어 있었지만.

“이거 뭐, 술자리에서 눈치 게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다들 쿨하게 인정하시죠. 이왕이면 1번을 하고 싶다고.”

밥상머리에서의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한 태동의 오승훈 대표가 제일 먼저 속마음을 드러내며 솔직해질 것을 청했다.

“네. 1번 좋죠. 인턴십이 됐든 뭐가 됐든 첫 번째 경험은 늘 오래 기억되는 법이니까요. 근데.”

조금 전의 상심을 털어낸 아레나의 이 대표가 맞은편에 앉은 오 대표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1번을 받을 자신은 있으세요?”

표현은 달라졌지만, 질문의 밑바탕엔 여전히 오 대표에 대한 우월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네?”

순간, 김칫국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대표의 무례한 발언에 오 대표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 그냥 1번을 선호하시는 거 같아서 드린 말씀인데…….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오 대표의 표정 변화를 읽은 이 대표가 이내 왼쪽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당사자를 떠나 제삼자가 보기에도 진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직속 후배로서 20년 넘게 당하는 역할인 오 대표에게 있어 이 대표의 아슬아슬한 도발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 기분 나쁘라고 한 얘기 아니었어요? 여기 계신 분들도 다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미안한 기색 하나 없는 이 대표의 거짓 해명에 황당한 웃음을 보인 오 대표가 두 팔을 벌린 채 비꼬듯이 받아쳤다.

“네. 이번 건 이 대표의 의도가 불순한 것 같군요.”

피크닉 후배들의 불필요한 신경전을 보다 못한 SP의 박윤기 대표가 정중한 언어로 상황을 정리한 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누구 하나 양보할 마음이 지금으로선 사다리를 타든 제비를 뽑든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니 차라리 인턴십 기간의 균등 분배를 제안한 태주가 직접 순서까지 정해주는 편이 더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대표나 최 총장과 달리 자신에게 유리한 대안을 계산적으로 제시한 건 아니었지만.

“하기야, 다섯 곳 모두를 지원할 생각이었던 사람이 순서를 빼먹었을 리 없지.”

태주에게 제법이라 했던 신화의 단성혁 대표가 사전에 정해 놓은 차례가 있을 것이라 추측하며 박 대표의 의견에 동의했다.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 괜히 아니라고 했다가 나중에 순서만 꼬이지 말고.”

왼편에 앉은 태주에게 눈길을 보내던 단 대표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넸다.

“그래. 단 대표의 말대로 생각해 둔 순서가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보게.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의 의견도 태주 군의 의지보다 우선할 순 없으니 말이야.”

모종의 협력 관계로 엮인 최 총장이 인턴십의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을 태주에게 쥐여 주기 위해 입맛에 맞는 의견이 나올 때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물론 원하는 순서가 아니라고 해서 실력 발휘를 못할 태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눈치 빠른 단 대표의 예상대로 미리 순번을 정해 온 태주가 협회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안 될 게 뭐 있겠나.”

박 대표가 제시했던 대안을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길드에게 일임하는 것보단 잡음이 적을 것이라 여긴 협회장이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 자리에서 꼭 확정된 순서를 정해야 하는 겁니까?”

1순위에 올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길드 마스터들과 딜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태주가 협회장에게 데드라인을 물었다.

“아니.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설령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해도 잠정적인 순서 정도는 들어보고 싶구나.”

태주에게 촉박한 기준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목적이 있게 모인 만큼 인턴십의 대략적인 진행 흐름까진 정하고 가려는 눈치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잠정적이든 확정적이든 길드의 배정 순서엔 어떠한 우열 관계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아무리 선택권자라 해도 길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줄 세우기였기 때문에 잠정적인 순서 발표에 앞서 선정 기준에 대한 양해부터 구하는 태주였다.

“허허, 이 자리에 그 정도로 언짢아할 소인배는 없으니 너무 조심스러워할 거 없네.”

이번에도 역시 태주의 지원군으로 나선 최 총장이 미리 눈치를 주듯 질투심 많은 오 대표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차례대로 발표하는 건 재미없으니까 1번과 5번은 빼고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아레나의 이동규 대표가 발표의 긴장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아니, 왜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고 그러세요. 당사자가 직접 순위가 아니라 순서라고 밝혔는데.”

5대 길드를 기준으로 100만 원이라는 가장 적은 용돈과 함께 특별히 좋은 인상을 남긴 적도 없는 태동의 오 대표가 이 대표의 제안에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아들인 세준과의 친분을 내세운 풍림의 임경수 대표와 5대 길드 중 가장 많은 용돈을 입금하고 있는 SP의 박윤기 대표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이 대표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에이,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십니까.”

풍림의 임 대표가 오 대표와 상반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눈치 없게 정색해서 죄송합니다. 근데 저도 태주 씨가 아들 친구였으면 재미있게 했을 겁니다.”

빈정거리는 말투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전한 오 대표가 임 대표가 보인 자신감의 원천을 콕 집어 언급하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기세 싸움을 벌였다.

“자, 자, 이러다 듣는 사람까지 체하겠네.”

어김없이 중재에 나선 협회장이 두 거물급 헌터의 원초적인 공방전을 제지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헤비한 중식 대신 일식으로 예약하는 건데.”

장소 섭외를 담당했던 아레나의 이 대표가 튀김옷을 두른 요리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며 협회장의 말에 맞장구쳤다.

“오 대표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거 없으니까 이 대표 말대로 재밌게 1번, 5번만 빼고 발표해도 돼.”

2년 선배인 자신에게 대들 수 없다는 것을 아는 SP의 박윤기 대표가 까마득한 후배인 태주의 방패막이를 자처하며 말했다.

“네.”

뒤탈이 없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확인한 태주가 간결한 대답과 함께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일단 두 번째 길드는…….”

“…….”

잠정적인 순서라는 걸 알면서도 태주가 입을 여는 순간 시상자의 발표를 기다리는 후보자들처럼 일순간 말이 없어진 수장들이었다.

“풍림입니다.”

“하하하하!”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이라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길드가 호명되기 무섭게 터져 나온 임 대표의 호탕한 웃음 속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아이고, 저도 모르게 좀 크게 웃었습니다. 하하.”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임 대표가 협회장과 최 총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야, 앞으론 학연, 지연, 혈연에 자녀의 학연까지 추가시켜야겠습니다.”

뒤끝 있는 성격의 오 대표가 끝난 줄 알았던 임 대표와의 작은 실랑이에 또다시 불을 지피려 했다.

“그러게요. 1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아주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하하하!”

물론 2순위에 안착한 임 대표가 부러움이 변질된 오 대표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순순히 응해 줄 리 없었지만.

“쳇! 세 번째 길드는 어디예요?”

왠지 모를 분함에 입꼬리가 내려간 오 대표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태주에게 물었다.

“세 번째 길드는 SP입니다.”

“우리?”

호명과 동시에 태주를 돌아본 박 대표가 젓가락 끝으로 자신의 명치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으음. 그래도 중간은 했네.”

용돈의 액수가 인턴십의 순서에 변수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박 대표의 혼잣말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럼 이제 1등이 아니면, 하위권 확정인가?”

여전히 순서가 아닌 순위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화의 단성혁 대표가 자신과 더불어 아직 태주의 선택을 받지 못한 아레나의 이 대표와 태동의 오 대표를 한 번씩 쳐다보며 말했다.

“4등은 누구야?”

남은 경쟁자들이 모두 피크닉 출신임을 파악한 단 대표가 기대감 없는 얼굴로 태주에게 물었다.

“네 번째 길드는 신화입니다.”

“뭐? 우리가 네 번째라고?”

자신이 5등이라 여기고 있던 단 대표가 예상치 못한 선택에 흠칫하며 되물었다.

“이거 의외인데? 사람 다시 봤어.”

피크닉에 대한 소속감이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단 대표가 흡족한 미소를 보내며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을 반성했다.

“뭐, 이젠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서운한 사람이 생기겠지만.”

자존심의 문제로 번진 불쾌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단 대표가 오른편에 앉은 오 대표를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딱 두 자리만 남았는데, 어서 발표하시죠.”

똑같이 1위 후보인 동시에 꼴찌 후보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행을 재촉하는 이 대표의 표정에서만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네. 제가 생각한 첫 번째 길드는…….”

이제 호명되지 않은 길드는 자동적으로 마지막 순번에 배정되는 상황이었다.

“…….”

다시금 고요해진 참석자들.

어느덧 재미는 사라지고 자존심만 남은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온기를 잃어가는 음식과 달리, 길드의 순서가 하나씩 공개될 때마다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아레나겠지 뭐.”

논의의 흐름상 선배인 이 대표에게 이길 가망성이 없다고 판단한 오 대표가 체념을 하듯 중얼거리던 바로 그때.

“태동입니다.”

“……?!”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는 태주의 이례적인 선택에 참석자들은 물론 호명을 받은 오 대표마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회귀 후 지금껏 내려진 태주의 수많은 선택들 중 이유 없이 이루어진 건 단 한 차례도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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