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협상 테이블 (4)
“인턴십은 어떻게 진행하는 것이 좋겠나?”
역할상 중립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은 협회장이 참석자들의 의견부터 물었다.
“어차피 3, 4학년이랑 같이 진행해야 되니까 그냥 별도의 프로그램 없이 예정된 일정을 따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첫 번째 의견을 제시한 건 SP 길드의 박윤기 대표였다.
“이번엔 저도 박 대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조금 전까지 대립각을 세웠던 신화 길드의 단성혁 대표가 박 대표를 쳐다보며 동조했다.
“그래야 다른 지원자들과의 비교도 한결 수월할 것 같고요.”
인턴십의 모집인원은 길드의 규모와 방침에 따라 제각각이었지만, 소위 5대 길드라 불리는 메이저 길드의 경우 적게는 30명에서부터 많게는 50명 이상까지 선발하곤 했다.
“그럼 평소에 하던 대로 1주 차 땐 멘토 배정해서 기본 교육, 2주 차 땐 레이드 준비 과정 보조, 3주 차 땐 현장 실습, 4주 차 땐 실전 평가, 그리고 마지막 5주 차 땐 개별적인 피드백과 수료식을 진행하면 되겠네요.”
풍림의 임경수 대표가 인턴십 프로그램의 대략적인 스케줄을 막힘없이 나열했다.
길드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달랐지만, 매년 두 차례씩 반복되는 정기적인 이벤트인 만큼 큰 틀에 있어선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근데 협회장님.”
임 대표의 부연 설명을 듣고 있던 태동의 오승훈 대표가 갑자기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며 협회장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도 명색이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인데, 최소한 본인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 테스트 하나쯤은 추가시켜야 되지 않을까요?”
오 대표가 제대로 된 실력 검증을 위한,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화된 독립적인 평가 기회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실전이라고 해 봤자 고작 E급 게이트만 들락거릴 텐데, 솔직히 저런 인재를 데려다 평범하게 굴리는, 아니, 트레이닝시키는 건 말 그대로 재능 낭비죠. 길드의 입장에서도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고요. 아마 여기 모인 5대 길드를 제외한, 다시 말해, 인턴십의 제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수많은 국내외 길드의 조롱
섞인 지적이 이어질 겁니다.”
진우의 병실에서 들은 협회장의 짐작대로 최소 3년 이상의 장기 투자를 결정한 길드의 입장에선 트레이닝 돔 안에서의 실력보다 실전에서의 검증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네 말이 맞네. 태주 군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들이 원하는 건 두세 살 차이 나는 학생들과의 공정한 경쟁 따위가 아니니까.”
인턴십의 예외적인 지원 범위를 태주 한 명만으로 제한시킨 최 총장이 이번엔 오 대표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며 특별 테스트의 추가를 유도했다.
태주를 향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과 국내외 업계의 폭발적인 관심.
한국대 헌터학과의 순위를 세계 30위권 안으로 올리는 것이 목표인 최 총장의 입장에선 태주의 특별함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 화제성을 높여야 태주가 속한 한국대 헌터학과의 인지도와 위상도 덩달아 상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으음. 그 또한 고려해 볼 필요성이 있어 보이는군.”
오 대표와 최 총장의 이견을 접한 협회장이 고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부분은 살짝 김칫국이 될 수 있겠네요.”
아레나의 이 대표가 특별 테스트를 제안한 오 대표를 응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 김칫국이요?”
이 대표와 눈이 마주친 오 대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특별 테스트를 할지 말지는 태주 씨의 선택을 받은 뒤에나 고민하라는 겁니까?”
오 대표나 태동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진 않았지만, 김칫국이라는 비유적인 단어 속엔 태주의 선택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발끈하세요. 어차피 저한테도 해당하는 얘기인데.”
태주와의 접점이 남다르다 여기고 있는 이 대표가 오 대표의 언짢은 반응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물론 이 대표의 착각과 달리 회귀 전 있었던 유리의 사고 소식만으로도 아레나를 거를 이유는 충분했지만.
“네. 제가 잠시 경쟁이란 걸 잊고 있었네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곤 있었지만, 억지웃음을 띤 오 대표의 말대로 태주의 인턴십을 진행할 수 있는 길드는 단 한 곳뿐이었다.
똑똑!
공교롭게도 VIP실의 열기를 환기시키듯 토론의 분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점원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 “실례하겠습니다.”
점원이 문을 열자 음식이 담긴 카트들이 VIP실 안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잠시 후.
“…….”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점원이 드나드는 동안엔 그 누구도 인턴십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드르륵!
서빙을 마친 점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일상적인 대화만을 나누던 참석자들이 슬슬 본론으로 돌아갔다.
“협회장님, 이왕이면, 길드까지 고르고 밥을 먹는 게 피차 속이 편하지 않을까요?”
차를 한 모금 든 태동의 오승훈 대표가 태주의 선택 시점을 앞당기자 건의했다.
“솔직히 뽑는 입장일 땐 몰랐는데, 막상 뽑히는 위치에 놓이니까 기분이 묘해서요.”
물론 경쟁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이 대표의 도발 이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태주와의 특별한 교류나 유대감이 없었다는 사실이 길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속단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저도 오 대표님과 같은 마음이긴 한데, 그래도 생각할 시간은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풍림의 임경수 대표가 회전 선반 위에 놓인 요리를 자신의 접시에 덜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기야, 내일모레가 방학도 아닌데 급할 것도 없죠.”
신화 길드의 단성혁 대표가 왼편에 앉은 태주를 힐끗 쳐다보며 공감을 표했다.
물론 태주의 신중한 결정을 배려하고자 하는 훈훈한 그림과 달리,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길드를 어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한 실리적인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그럼 오늘은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겁니까? 결정된 거 하나 없이?”
소문난 행동파이자 오늘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SP 길드의 박윤기 대표가 또다시 의견이 엇갈린 신화의 단 대표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결정된 게 왜 없습니까? 오자마자 지원자의 범위도 한정하고, 특별 테스트까지 추가했는데.”
입으로 가져가던 음식을 도로 접시 위에 내려놓은 단 대표가 박 대표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자, 자, 다들 예민해진 거 같은데,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세.”
어김없이 진화에 나선 협회장이 박 대표와 단 대표를 번갈아 바라보며 타이르듯 진정시켰다.
“그리고 태주야.”
“네.”
눈치껏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있던 태주가 중재를 마친 협회장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차분히 응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떠한 것들이 결정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입장인 협회장은 박 대표와 단 대표의 상반된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상황임을 들어 늦어도 자리를 파하기 전까진 태주의 대답을 이끌어 낼 요량이었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 헛걸음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여기 모인 선배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었으면 싶구나.”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협회장의 짐작대로 태주는 이미 특정 길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선택권을 쥔 입장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을 하고 온 상태였지만.
“다만.”
“……?!”
논의가 진행되는 내내 수동적으로만 참여하고 있던 태주의 적극적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래. 계속해 보게.”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알린 협회장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네. 다만. 특정 길드에서 5주를 보내는 것이 아닌, 다섯 곳의 길드에서 각각 한 주씩, 실전 평가 위주로 인턴십을 진행해 보고 싶습니다.”
“……?!”
태주의 당돌한 역제안을 들은 5인의 수장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완벽한 주객의 전도.
태주의 선택을 바라는 입장이긴 해도 지목을 받는 순간 실력을 검증하는 위치로 올라서는 길드의 포지션이 태주의 역제안으로 인해 오히려 길드마다 다른 인턴십 프로그램의 장단점을 평가받는 처지로 전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걸?’
그에 반해 태주는 자신의 역제안이 채택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최 총장이 동석하리란 사실까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슈를 원하는 최 총장의 성향상 태주가 주목받을 기회가 늘어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최종 선택에서 제외될 나머지 4명의 수장들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를 공평하게 얻는 격이라 반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 사람, 다른 길드와의 경쟁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착각하고 있는 이 대표의 반발만큼은 피할 수 없었지만.
“으음.”
답이 하나뿐인 오지선다형 문제라 여기고 있던 협회장이 여섯 번째 선택지를 고른 태주의 예상치 못한 역제안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허허, 그거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구먼.”
태주의 예상대로 최 총장은 증명의 기회를 늘린 태주의 파격적인 제안을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뭐,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본인의 의사가 정 그렇다면, 인턴십 기간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요?”
김칫국 발언이 내심 신경 쓰였던 태동의 오승훈 대표 또한 다른 길드의, 특히 아레나 길드의 독점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을 거부할 리 없었다.
“자,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에 능한 최 총장이 다시 한번 다수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역시나 아레나의 이동규 대표가 태주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협회장님, 아시다시피 인턴십을 한 곳에서 5주간 진행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더구나 앞으로 인턴십에 참여할 기회도 많은데, 왜 굳이 적응할 시간도 없는 촉박한 스케줄로 수박 겉핥기 식의 트레이닝을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요.”
다수결로 가면 불리하다는 계산을 내린 이 대표가 최종 결정권자인 협회장에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으음. 그럼 혹시 이 대표와 같은 의견인 사람 있나?”
“…….”
협회장이 테이블에 앉은 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찬반 의사를 확인했지만, 이 대표의 반박을 뒷받침해 줄 원군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없으면, 당사자의 제안대로 실전 평가 위주의 인턴십을 길드마다 한 주씩 진행하도록 하겠네.”
“후우.”
협회장이 다수의 손을 들어주자 여론 형성에 실패한 이 대표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법인데?”
태주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신화의 단성혁 대표가 회전 선반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물론 태주의 큰 그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