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협상 테이블 (3)
“일단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렇게 의미 있는 자리에 함께해 줘서 고맙네.”
감사의 인사로 논의의 시작을 알린 송기철 협회장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참석자 개개인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지난 모임 때 나온 이례적인 건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자리네.”
협회장이 1학년인 태주의 인턴십 참여를 최초로 제안한 이동규 대표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네. 제 입방정에 일이 좀 커졌네요.”
협회장과 눈이 마주친 아레나의 이동규 대표가 자신이 발단이란 사실을 인정하며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 참가 의뢰를 받은 태주가 흔쾌히 응해주긴 했지만, 새로운 시도엔 언제나 논란이 따르듯 이번 인턴십 역시 조율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네.”
인턴십 프로그램의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보다 특혜에 대한 반발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협회장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고작 5주짜리 인턴십이라 해도 요즘 같은 레드오션 시기엔 형평성 문제가 화두이긴 하지.”
협회장의 왼편에 앉아 있던 최지문 총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형평성 논란도 잠재울 겸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인턴십을 따로 여는 건 어떨까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자신의 아들인 세준에게도 특혜에 가까운 인턴십의 기회를 주고 싶었던 풍림의 임경수 대표가 협회장의 문제 제기를 듣는 순간 참여 대상자의 확대를 건의했다.
“전 반대입니다.”
신화 길드의 단성혁 대표가 임 대표의 제안에 대한 협회장의 의견을 채 듣기도 전에 반대의 의사를 표명했다.
“인턴십의 목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기본기를 갖춘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로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실전 훈련의 일환입니다. 다시 말해, 1, 2학년처럼 이제 막 각성자로서의 걸음마를 뗀 녀석들이 기웃거릴 만큼 가벼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눈치 빠른 단 대표가 마치 임 대표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처럼 인턴십의 시행 목적을 언급하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
이번엔 태동의 오승훈 대표가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며 단 대표의 반박에 동조했다.
“솔직히 기본도 안 된 녀석들을 데려다 구색 맞추기용으로 참여시키는 건 단 대표님의 말씀대로 인턴십 본연의 취지에 어긋나는 대안 아니겠습니까?
서로 머리를 맞대기 위해 모인 자리였지만, 최대한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 피차 얼굴을 붉힐 각오쯤은 하고 온 수장들이었다.
“더구나 형평성을 위해 선례를 남기는 순간, 매 학기 1, 2학년들을 대상으로 한 인턴십도 병행해야 될 텐데,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의 진행에 동원되는 인력과 소요되는 비용도 지금보다 갑절로 늘어갈 거고, 이는 곧 길드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될 겁니다.”
“으음.”
쉼 없이 이어진 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한 협회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
“나도 한마디 해도 되겠나?”
첫 번째 안건에 대한 협회장의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깜짝 손님으로 등장한 최 총장이 발언권을 청하며 입을 열었다.
“어휴, 그럼요. 당연히 하셔야죠.”
최 총장과 마주 보고 있던 SP의 박윤기 대표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허허, 고맙네.”
허락을 구한다는 핑계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발언 기회를 독차지한 최 총장이 인자한 웃음을 띠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알다시피 난 이 모임의 일원이 아니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도 다 총장의 자격으로 재학생인 태주 군의 인턴십 참여를 학교 차원에서 허락하기 위함이지.”
헌터학과의 10대 스펙에 인턴십이 포함되다 보니 길드와의 교육적인 협력 관계가 자연히 구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난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태주 군, 단 한 사람을 위해 여기까지 발걸음 했네. 형평성? 중요하지. 특혜 논란? 피할 수 없을 걸세.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애초에 논의의 시발점이 태주 군이고, 태주 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흥미로운 논의인데 말이야.”
한국대 헌터학과의 위상을 위해 태주에게만 화제성이 집중되길 바라는 최 총장이 단 대표와 오 대표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따라서 난 관례에서 벗어난 인턴십의 대상을 1, 2학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이네.”
“…….”
찰나였지만, 최 총장의 반대 의견을 들은 임경수 대표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다행히 나만 참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네.’
겉으로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업적을 올해 안에 달성할 경우, 다시 말해, 개정판에 추가될 만한 목표를 입학 첫해에 달성할 경우 한중연 학과장이 보유한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 중 하나를 획득할 수 있는 태주 역시 세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의 분위기로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만약 1, 2학년들에게까지 범위가 확대될 경우 신입생인 태주의 인턴십 참여가 독보적인 행보로 인정되지 않아 학과장이 제시한 조건의 충족
여부를 추가로 따져 봐야 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번 회의의 의장을 맡은 협회장과 당사자인 태주 군을 제외한 6명의 의결권자 중 벌써 3명이나 반대표를 던졌으니 남은 아레나와 SP의 의견에 따라 동률인지 아닌지가 결정되겠군.”
그 누구도 다수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던 최 총장은 현재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며 회의의 의사 결정 방식을 투표 쪽으로 몰고 갔다.
“…….”
나란히 앉아 있던 아레나의 이 대표와 SP의 박 대표가 노련하게 선수를 친 최 총장의 투표 종용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바로 그때.
똑똑!
드르륵!
- “실례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연 담당 점원이 고조되던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환기시켰다.
- “식사,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예약자인 이 대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점원이 공손한 자세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 네. 그렇게 해주세요.”
최 총장의 질문 대신 점원의 질문부터 답한 이 대표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속 아레나 길드에 유리한 선택지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 “네. 그럼 예약하신 메뉴들로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문 사항을 재확인한 점원이 VIP실에서 나가자 다시 진지한 분위기가 엄습했다.
“저는 프로 세계를 좀 더 일찍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SP 길드의 박윤기 대표가 임경수 대표의 외로운 싸움에 처음으로 뜻을 모았다.
“물론 단성혁 대표님의 의견처럼 1, 2학년이 3, 4학년에 비해 기본기도 부족하고, 인턴십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더 많은 1, 2학년 때 본인의 부족함을 일찍 깨달을 수 있는, 그래서 성장을 위한 훈련에 더 정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기에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죄송하지만, 그건 박윤기 대표님처럼 성실하고 절제력 있는 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 아닐까요?”
박 대표에게 반박을 당한 단 대표가 곧바로 재반박을 했다.
“뭐,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 대다수의 학생들은 아마 5주간의 인턴십 기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또 그렇게 해서 변화될 아이면, 굳이 인턴십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요.”
“하지만 그건 인턴십의 성과를 오로지 학생 개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가정 아닙니까? 저 역시 죄송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길드의 무능함을 방증하는 것 같아서요.”
물론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의 박 대표도 좀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괜히 여기 앉았나?’
양옆에 앉은 두 사람의 첨예한 의견 대립에 덩달아 심란해진 태주였다.
“자, 자, 일단 진정들 하게.”
결국 중재에 나선 협회장이 단 대표와 박 대표를 향해 언성을 낮추라 손짓한 뒤, 마지막 남은 이동규 대표의 의견을 물었다.
“이 대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현재까지의 찬반 스코어는 2 대 3.
아직은 대상자 확대에 반대하는 의견이 근소한 차이로 앞섰지만, 이 대표의 선택에 따라 동점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모든 의견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맡게 된 이 대표가 원론적인 이야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 장단점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길드가 아닌 태주 씨 본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것에 능한 이 대표가 대다수의 형평성이 아닌 태주 단 한 사람의 이해득실로 찬반 결정의 기준을 바꿨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 관리의 밑바탕엔 단 한 곳에서만 진행되는 태주의 인턴십을 아레나에서 독점하려는 계산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태주 씨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자 확대의 장점과 단점. 일단 장점은 태주 씨의 실력을 돋보이게 해줄 비교 대상자가 늘어난다는 거지만, 그건 오히려 3, 4학년과 비교했을 때 더 유의미한 임팩트가 있을 것 같고. 단점은 이번 인턴십 프로그램에 이례적, 실험적, 그리고 파격적이란 수식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거죠.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어 모인 이유가 무색해질 만큼.”
“그럼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건가?”
웬만해선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는 최 총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편을 갈랐다.
“네. 물론 아레나 길드가 아닌 태주 씨의 관점에서는요.”
경쟁 길드와 달리 태주가 우선이라는 인상을 끝까지 어필한 이 대표가 길드 선택권을 가진 태주에게 아이 콘택트를 시도하며 말했다.
“허허, 다른 사람도 아닌 최초 제안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최종 찬반 스코어는 2 대 4.
인턴십 대상자의 범위를 둘러싼 논쟁에 쐐기를 박은 최 총장이 협회장을 보며 판정을 재촉했다.
“태주 너도 이 대표와 같은 생각이냐?”
첫 번째 안건에 대한 의견 수렴을 마친 협회장이 최종 결정만을 앞둔 상태에서 태주의 의사를 확인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의견이 채택돼도 상관없지만, 이미 충분한 토의를 거친 만큼 다수결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반대 의사를 품고 있던 태주가 이 대표 못지않게 속마음을 숨기며 대세에 따르는 액션을 취했다.
“으음. 그럼 인턴십의 지원 자격은 지금처럼 3학년 이상으로 유지하되 1학년인 태주만 특별히 참여하는 것으로 하겠네.”
“…….”
총장의 반대 선언으로 인해 갈린 희비가 참석자들의 표정에서 엇갈렸다.
“자, 그럼 참가자를 한정했으니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보세.”
이번 논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세부 계획 수립과 태주의 길드 선택만을 남겨둔 협회장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위엄 있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