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협상 테이블 (2)
“뭐야, 둘이 같이 왔어요?”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온 태동 길드의 오승훈 대표가 일찌감치 와 있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저세상 패션이네.’
오늘도 어김없이 난해한 스타일링으로 멋을 낸 오 대표가 도발 스킬보다 강력한 어그로로 태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법사로서의 커리어나 실력적인 측면에선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오다가 로비에서 만났어.”
피크닉의 1년 선배인 이동규가 직속 후배인 오 대표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설마 미리 와서 포섭해 둔 건 아니죠?”
태주의 뒤를 스쳐간 오 대표가 이 대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왜. 태동은 싫다고 할까 봐 불안해?”
“어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우리 후배님한테 보인 정성이 얼만데. 그렇지?”
매달 100만 원씩을 입금하고 있는 오 대표가 태주를 보며 물었다.
“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치껏 고마움을 표하긴 했지만, 사실 5대 길드 중 가장 적은 액수의 용돈을 보내는 곳이 태동이었다.
“자식, 생색은…….”
오 대표보다 정확히 두 배의 액수를 보내고 있는 이 대표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네? 자식이요? 아니,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지금 반말을 한 겁니까? 그것도 까마득한 후배가 보는 앞에서?”
태주를 힐끗 쳐다본 오 대표가 격의 없는 말투를 지적하며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했다.
‘이동규 대표님이 한국대 헌터학과 4기고, 오승훈 대표님이 5기니까 함께한 세월만 해도 20년이 훌쩍 넘네.’
태주가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프로필을 바탕으로 두 거물의 친분을 가늠해 보았다.
“으음. 오케이.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모임이 이루어지는 동안만이라도 후배에게 말을 높이기로 한 이 대표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우리 둘이 삼강 하베스트에서 만났어요. 뭐, 정확히 말하면, 내가 만나고 싶어서 찾아간 거지만.”
오 대표의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을 아는 이 대표가 시간도 때울 겸 태주와의 접점을 강조하며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물론 태동의 오 대표가 삼강의 하 대표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아슬아슬한 맛이 있었지만.
“네? 누구요?”
반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표정이 안 좋아진 오 대표가 두 귀를 의심하며 따지듯이 되물었다.
“태주 씨가 하 대표님 아들이랑 동기인 거 몰랐어요? 28기. 게다가 하 대표님 아들이 태주 씨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본사로 초대한 거예요. 따로 보답하려고.”
초대의 이유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활시위를 준비한 것까진 따로 듣지 못한 이 대표였다.
“진짜야?”
심기가 불편해진 오 대표가 당사자인 태주에게 직접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네.”
“참 나.”
헛웃음을 터트린 오 대표가 태주가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하 대표가 비각성자인 건 알지?”
나이로는 하도철 대표가 훨씬 위였지만, 사이가 틀어진 시점부턴 존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네.”
비각성자에 대한 편견이 묻어나는 질문의 뉘앙스에 재룡과 하 대표를 분노케 한 각성자의 오만함이 느껴졌다.
“그 양반은 우리랑 달라. 뼛속까지 자본가 마인드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의리보단 눈앞의 이윤이 우선이지.”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양된 오 대표가 격하게 손사래를 치며 언성을 높였다.
“개인적으로 무슨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하 대표의 사연부터 듣고 온 태주가 크로스 체크를 위해 오 대표의 입장을 물었다.
“있지. 안 좋은 기억. 근데 그 사건을 계기로 내 편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게 됐으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라고도 볼 수 있지.”
“네? 그 사건이요?”
하나의 활을 동맹의 의미로 나누어 가질 만큼 끈끈했던 두 사람의 신뢰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궁금했던 태주가 균열의 계기에 대해 조금 더 파고들었다.
“뭐, 그런 게 있어.”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을 일은 아니라고 여긴 오 대표가 결정적인 순간에 입을 닫았다.
톡톡!
“저기요. 오 대표님.”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 대표가 검지로 테이블 위를 두어 번 두드렸다.
“네. 말씀하시죠.”
“거 자꾸 태주 씨한테 말을 놓으시는데, 오 대표님 말씀대로 이런 공적인 자리에선 서로 존중하는 게 기본 아닙니까?”
오 대표의 말본새를 꼬투리 잡은 이 대표가 직속 선배인 자신에게 했던 요구 사항을 그대로 인용하며 태주를 대하는 태도를 지적했다.
“네?”
갑작스러운 지적에 당황한 오 대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 귀를 들이밀었다.
“후배한테 함부로 반말하지 마시라고요. 원래 공과 사 구분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아, 나 진짜, 이 선배 뒤끝 있네.”
자승자박.
자신이 내뱉은 말에 구속된 오 대표가 맞은편에 앉은 이 대표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미안해요 태주 씨. 아무리 구면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마지못해 말을 높인 오 대표가 이 대표를 힐끗거리며 태주에게 사과했다.
바로 그때.
드르륵!
태주를 만나러 온 세 번째 손님은 SP 길드의 수장이자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전사인 박윤기 대표였다.
“…….”
VIP실의 문을 연 박 대표가 미리 도착한 이들을 말없이 둘러봤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박 대표와 눈이 마주친 오 대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오 대표의 뒤를 이어 이 대표가 박 대표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아직 깜짝 손님은 아니네.’
문 쪽을 돌아본 태주가 매달 가장 많은 용돈을, 무려 300만 원이란 액수를 다달이 입금할 정도로 성격이 화통한 박 대표의 고마운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나저나 피크닉 출신 3명이 다 모였네.’
5대 길드의 마스터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치고 온 태주가 이 대표보다 1년 선배인 3기 출신 박 대표의 등장에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등급 측정 이후 오랜만이구나.”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듬직한 인상의 박윤기 대표가 출입문 가까이 앉아 있던 태주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역시 중압감이 남다르네.’
단순히 친밀감을 드러내기 위한 터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박 대표의 힘과 마력은 태주의 어깨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피크닉에 들어왔다고?”
손을 거둔 박 대표가 태주의 옆자리에 놓인 의자를 빼내며 물었다.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원형 테이블의 남쪽은 태주가, 동쪽은 오승훈이 그리고 서쪽과 남서쪽은 이동규와 박윤기가 각각 차지하게 된 것이다.
“네.”
태주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이미 아는지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만 피크닉의 회원이야. 한마디로 학연 그 이상의 공동체의식으로 뭉친 각별한 사이라는 뜻이지.”
“네. 저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업계의 평판으로만 따지면 박윤기 대표의 덕망이 이 대표와 오 대표를 회귀 전부터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 자주 보자꾸나.”
특히 말수가 적은 행동파에 클래스까지 전사라 대부분의 레이드를 선두에서 진두지휘했는데, 길드의 명성에 먹칠을 한 정진천을 쫓아낸 이 대표와 달리 사람을 잘 내치지 않아 다른 길드에 비해 소속된 헌터의 수가 많은 편이었다.
“아니, 선배님. 인사는 우리가 먼저 했는데, 왜 태주한테만 아는 척을 하세요. 인사한 사람 무안하게.”
질투심 많은 오 대표가 태주와 박 대표의 대화에 끼어들어 노골적인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하하. 20년 넘게 알고 지냈으면, 눈인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오 대표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아는 박 대표가 호탕하게 웃으며 태주부터 챙긴 이유를 밝혔다.
“아, 그래요? 그럼 이건 무슨 뜻인지 한번 맞춰보세요. …….”
남다른 패션 센스만큼이나 독특한 구석이 많은 오 대표가 박 대표를 말없이 쳐다보며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어때요. 20년 넘게 알고 지냈으니 눈빛만 봐도 당연히 아시겠죠?”
“그래. 눈으로 욕하고 있는 거 잘 알았으니까 넓은 아량으로 그만 좀 쳐다봐. 젓가락질도 하기 전에 체하겠다.”
후배의 트집을 웃음으로 넘긴 박 대표가 허공에 젓가락질을 해대며 약한 척 엄살을 부렸다.
드르륵!
“어? 뭐야, 이거. 피크닉끼리만 일찍 모이기로 한 겁니까?”
신화 길드의 수장이자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무투가인 단성혁 대표가 몸놀림만큼이나 빠른 눈치로 네 사람의 공통점을 파악했다.
“이거 한국대 안 나온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한국대, 인재대, 태성대.
소위 히트(HIT)라 불리는 세 곳의 명문대 헌터학과 중 단성혁 대표의 모교는 한국대보다 3년 늦게 헌터학과가 설치된 인재대였다.
“든든한 선배들이 있어서 좋겠다 너.”
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인 단 대표가 태주의 옆자리인 남동쪽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우리 학교 후배 중엔 매직 아처 하나 안 나오나? 어이, 이 대표, 설마 이 친구한테 신화는 거르라고 한 건 아니지?”
인재대 헌터학과의 1기 졸업생으로서 자부심이 남다른 단 대표였지만, 동갑내기인 이 대표에게만큼은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에이, 요즘 애들이 뭐 어른들 말을 듣나 어디. 무시나 안 하면 다행이지.”
두 사람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곤 있었지만, 단 대표가 등장하기 전까진 없던 묘한 긴장감이 VIP실 안의 공기를 급격하게 냉각시켰다.
‘둘 사이가 이렇게 냉랭한 건 처음 알았네.’
본의 아니게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낀 태주가 언론이나 검색을 통해선 알 수 없는 수장들 간의 예사롭지 않은 신경전에 마른침을 삼켰다.
드르륵!
“아이고, 안녕들 하셨습니까.”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다 보니 단 대표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준의 친부이자 5차 각성에 성공한 S급 궁수인 풍림의 임경수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요즘도 세준이랑 잘 지내고 있지?”
태주의 인사에 반색을 한 임 대표가 아들과의 친분을 강조하며 남다른 인연을 자랑했다.
“그나저나 네 옆자리는 벌써 만석이구나?”
박 대표와 단 대표를 번갈아 바라본 임 대표가 북서쪽에 위치한 이 대표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이제 두 분만 더 오시면 되나?”
자리에 앉은 임 대표가 빈자리의 개수를 확인한 뒤 시계를 들여다봤다.
바로 그때.
드르륵!
임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닫이문이 열리며 모임의 주최자인 협회장과 깜짝 손님인 총장이 VIP실 안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역시.’
예상을 적중시킨 태주가 협회장과 총장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5대 길드의 수장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니 다들 편히 앉게나.”
협회장이 태주의 맞은편이자 출입문으로부터 가장 먼 상석이라 할 수 있는 북쪽에 자리를 잡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허허, 이렇게 학교 밖에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군.”
이번엔 남은 한자리인 북동쪽을 차지한 최 총장이 태주를 보며 반가움을 표했다.
“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태주가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겸손한 시작과 달리 거물들의 일방적인 제안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당돌함 정도는 갖추고 온 태주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