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시험 범위 (2)
[28기 신태주 학우님께선 학과 사무실에 보관 중인 족보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메시지의 용건은 새터 당시 최고의 신입생으로 뽑힌 대가로 확보한 족보의 수령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중간고사 기간이구나.’
족보엔 1학년 때 배우는 모든 전공과목의 기출문제가 담겨 있었는데, 이번 중간고사에선 직업 탐구1과 레이드의 기초1, 그리고 헌터의 역사와 관련된 출제 유형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따 끝나고 들러야겠다.’
물론 족보의 유무와 관계없이 에이 플러스를 자신할 만큼 시험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리마인드 되어 있었지만.
“그럼 너도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비워 놔. 못 올 것 같으면, 미리미리 얘기하고.”
세준이 재룡에게도 약속 시간을 공유했지만, 태주를 설득했을 때와는 달리 참석을 강요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바로 그때.
철컹!
엘리베이터의 요란한 도착 소리와 함께 함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어?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오셨지?”
- “그러게. 일찍 왔다 일찍 가시려고 그러나?”
- “근데 저번 수업 시간은 아주 꽉꽉 채우고 가셨잖아.”
- “그러니까 한 번쯤 쉬어 가시겠지. 특히 함 교수님이라면.”
시계를 확인한 학생들이 제시간에 나타난 함 교수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온갖 추측들을 쏟아냈다.
“정렬.”
학생들을 향해 느긋한 발걸음을 옮기던 함 교수가 형식적인 인사말을 생략한 채 의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정렬.”
함 교수의 지시를 복명복창한 학생들이 종종걸음으로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비했다.
“곧 있으면 중간고사지?”
발소리가 그친 것을 확인한 함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네.”
“거기 너.”
함 교수가 앞줄에 있던 A급 법사 류정웅을 턱 끝으로 지목했다.
“네.”
“중간고사가 중요할까 기말고사가 중요할까?”
“둘 다 중요합니다.”
“맞아. 하지만 난 기말에 가중치를 둬. 그래야 중간고사를 개판 쳐도 만회할 길이 있으니까. 어때.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 “네.”
학점 산출을 위한 시험 성적의 반영 비율을 설명하던 함 교수의 가벼운 농담에 아이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자면, 중간이 30%, 기말이 50%, 그리고 나머지 20%는 출결, 과제, 태도 등의 명목으로 재량껏 채울 거야. 물론 아님 말고 식의 이의 제기는 절대 안 받을 거고.”
경험상 자신의 성적에 납득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아는 함 교수가 시험을 보기도 전에 미리 정정 가능성의 희박함을 인지시켜 주었다.
“그 옆에 너.”
이번엔 류정웅과 나란히 서 있던 A급 무투가 김진현이 함 교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네, 교수님.”
“이번 1학기 중간고사의 시험 범위가 어떻게 되지?”
“네? 어어, 그건 저도 잘…….”
정웅보다 더 난감한 질문을 받은 진현이 어색한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몰라. 당연히 배운 데부터 배운 데까지지.”
“아아, 네…….”
함 교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는 진현의 표정에선 여전히 당혹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뒤에.”
이번엔 새로운 응답자로 임세준이 낙점됐다.
“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세준이 함 교수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뭘 배웠지?”
“아, 지금까지요. 어어, 그러니까 으음. 아, 죽음에 대한 간접 체험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네.”
의미 없는 추임새로 생각할 시간을 벌던 세준이 함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랬지. 물론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한 건 아니었지만.”
순간, 함 교수의 시선이 무리 중에 섞여 있던 태주에게로 옮겨졌다.
“참고로 이번 중간고사의 문제는 너희들이 직접 고를 거야.”
- “……?!”
생각지도 못한 함 교수의 테스트 방식에 학생들이 술렁였다.
물론 이번이 두 번째 응시인 태주는 함 교수가 제시할 선택지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3종류, 난이도도 3단계, 그리고 점수의 상한선과 하한선도 각각 3개씩이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조건들을 나열하던 함 교수의 고개가 대기실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문제 유형]
[1. 가형: 최대 A+, 최저 F]
[2. 나형: 최대 A-, 최저 D]
[3. 다형: 최대 B, 최저 C-]
통제실에 있는 프로그래머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리진 않았지만, 미리 약속된 신호인 양 함 교수의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세 가지 문제 유형이 화면상에 표시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이것이 바로 이번 중간고사의 테마이자 인생의 진리야.”
함 교수의 비유대로 최저 점수가 F에 가까울수록 최고 점수가 높고, 최고 점수와 최저 점수의 격차가 작을수록 점수의 상한선이 낮았다.
- “어? 그럼 저 중에서 아무거나 고를 수 있는 건가?”
- “최대만 놓고 보면 가형이 끌리긴 하는데, 최저에 바닥이 없어서.”
- “그러게. 가형은 진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네. 왠지 당첨금은 큰데 내가 될 확률은 없는 느낌?”
- “확실히 A+인 이유가 있겠지. 생존 미션 때처럼 들어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고.”
- “그래도 태주는 가형으로 가겠지?”
- “그렇지 않을까? 어차피 상대평가라 태주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으면 A+가 나올 거 아니야.”
- “으음. 듣고 보니 그러네.”
가형의 최대 점수가 매력적이긴 했지만, 옆으로 조금만 시선을 옮겨도 마주하게 되는 아찔한 최저 점수가 학생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 “야, 재수강이 C+부터였나?”
- “어. 대신 재수강을 하면 최고 점수가 B+일걸?”
- “하아. 이걸 또 들어야 돼?”
- “전필이니까 F가 뜨면 어쩔 수 없이 들어야 되지 않을까?”
- “근데 왜 우리 수업엔 선배들이 없지?”
- “몰랐어? 1학년 전필은 수강 신청 때 분반되어 있었잖아. 신입생 코드, 재수강 대상자 코드 따로따로. 아마 형평성 때문에 그랬을걸? 아무래도 선배들이 끼면 A를 받기 힘드니까.”
- “와아, 그럼 신입생인데 4학년이랑 수업을 듣는 태주는 진짜 괴물 중의 괴물이네. 심지어 재수강자들도 아니라 S급도 있을 텐데.”
- “그러니까 피크닉인지 뭔지 하는 그 이너서클에도 뽑혔겠지. 아마 피크닉 애들은 다 가형을 고를걸?”
- “하긴, 어차피 상대평가면 우리 학교 기준으로 20%가 A고, 30%가 B인데, 응시자 100명 중 20명이 A- 이상이니까 이왕이면 가형으로 가는 게 A0 이상을 노릴 수 있어서 더 유리하겠네.”
일반적으로 4.5학점을 기준으로 평점을 책정하는 경우 4.3학점을 만점으로 하는 대학들과 달리 플러스와 제로만 있을 뿐, 마이너스의 구분까진 없었지만, 한국대의 경우 전국에서 모인 쟁쟁한 실력자들 간의, 다시 말해, 상향 평준화된 학생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4.5학점임에도 불구하고 마이너스가 추가된 좀 더 세분화된 평가 기준을 채택하고 있었다.
- “그럼 난 다형으로 가야겠네. B를 맞을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C-는 보장해 주니까 어찌 됐건 D나 F 같은 최악의 점수는 피할 수 있잖아.”
- “어? 나랑 생각이 똑같네? 나도 재수강만은 피하고 싶어서 다형을 고를 건데.”
- “야, C+부터 재수강이면, C-도 재수강 아니야?”
- “요건상으로는 그렇긴 한데, 일단 F가 뜨지 않는 이상 학점은 나오잖아. 한마디로 F가 나왔을 때만 강제지 나머지 C나 D학점은 다 선택적 재수강이라. 그래서 난 그냥 C-에 만족하려고.”
- “하긴, D나 F보단 C-가 낫지. 가뜩이나 점수도 짜게 주실 것 같은데, 내 실력에 C-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 “으음. 이거 이러다 다형에만 다 몰리겠는데?”
동기들과 열심히 의견을 주고받던 아이들 대부분이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자 점수의 하한선이 가장 높은 다형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뭐, 마음 같아선 눈이 썩을 것 같은 플레이를 하는 녀석들에게 다 F학점을 주고 싶지만, 그럼 그 처참한 실력을 한 학기 더 봐야 되니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학칙에서 정한 비율에 따라 점수를 보정할 거야. 물론 유형별 상한선과 하한선은 변하지 않겠지만.”
독설가에 참을성도 없고, 편애까지 심했지만, 중간, 기말과 같은 중요한 학사 일정에 있어선 나름 최소한의 정도를 지키는 함 교수였다.
“자, 여기까지 이해 안 된 사람 손.”
- “…….”
함 교수의 중간 점검에 대화를 멈춘 아이들이 자신은 이해했다는 듯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없어? 아쉽네. 있었으면 기초학습능력 부족을 이유로 태도 점수를 깎을 수 있었는데.”
함 교수의 재량이 반영될 나머지 20%의 점수에 대한 차등을 두고 싶었던 함 교수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나를 기준으로 12시는 가형, 3시는 나형, 그리고 다형은 9시 방향으로 10초 안에 모여. 시작.”
- “…….”
함 교수의 지시가 떨어지자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자신이 원하는 선택지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 “이야, 역시 피크닉 멤버들은 다 가형으로 갔네.”
- “나머지 애들도 거의 중상위권인데?”
함 교수의 정면엔 모두의 예상대로 입학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묘한 우월감을 느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 “근데 가형을 고르면 안 될 것 같은 애들도 몇몇 보이는데?”
- “그러게.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딱 봐도 들러리밖에 안 될 것 같은데.”
- “자신감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행을 바라는 거겠지. 그래 봤자 저 안에서 F를 면하긴 어렵겠지만.”
극히 일부였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가형을 택한 아이들은 무리의 뒤편에서 소심하게 소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아. 내가 분명 10초를 준 거 같은데.”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쉰 함 교수가 나형과 다형 중에서 갈등을 한 나머지 자신의 등 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한 결단력이 요구되는 가형의 경우 다른 문제 유형으로의 이동이 거의 없었지만, 그에 반해 나형과 다형은 약간의 모험과 안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로 하여금 선택 장애를 유발시키는 애매한 비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본인의 수준을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다형으로 가. 괜히 객기 부리다 최하점 뜨지 말고.”
- “네? 아, 네!”
마지막까지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이 함 교수의 조언에 다형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자,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들은 다 태도 점수 빵점이다.”
- “네.”
문제 선택을 모두 마친 아이들이 함 교수의 으름장에 한목소리로 대답하던 바로 그때.
“…….”
함 교수의 고개가 다시 한번 대형 스크린을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