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시험 범위 (1)
민정이 어쌔신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던 태주가 때아닌 은신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따로 기척을 차단하진 않았지만, 사방에 놓인 컨테이너에서 발산되는 크고 작은 마력이 민정의 동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쓰윽.
태주의 코앞에 나타난 민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맡길 게 없어도 좋으니까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인생 선배로서 기꺼이 들어줄 테니까.”
“네? 아, 네.”
얼떨결에 대답을 한 태주가 민정에게 받은 명함을 예의상 들여다보았다.
“어? 근데 그림이 좀 다르네요?”
플레잉 카드의 클로버 퀸을 모티브로 한 민정의 명함엔 특이하게도 퀸의 입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 그거요. 보관자의 비밀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에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제가 원래 입이 무겁거든요.”
민정이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월세가 밀리기 전까지만 무거운 건 아니고?”
“아아, 이 아저씨 오늘 컨셉 확실하네. 진짜 센스 없게…….”
민정이 염 기사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시비 걸 거면, 그냥 키 내놔.”
“에이, 그냥 웃자고 한 소리야. 화 풀어.”
염 기사가 자신의 턱 밑까지 들어온 민정의 손바닥을 슬그머니 끌어내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태주 씨, 얼른 가시죠. 이러다 계단으로 가겠습니다.”
열쇠를 꽉 움켜쥔 염 기사가 민정을 힐끗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번째 작별 인사를 나눈 태주가 염 기사를 쫓으려던 바로 그때.
“찾고 싶은 사람이나 뒷조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
나지막이 들려오는 민정의 예사롭지 않은 제안이 태주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뭐,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바람도 쐬러 나가고 그러거든요.”
도난 물품에 대한 100%의 회수율을 달성하기 위해선, 더구나 해외로 도망간 녀석들까지 잡아들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보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네. 부탁드릴 게 있으면,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주가 회귀자이긴 했지만, 기존의 지식이나 검색 정도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은밀한 정보에 대해선 도움을 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래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네. 그럼.”
삼강 하베스트의 하도철 대표와 전 아레나 길드 소속의 헌터 정진천, 거기에 클로버 컨테이너의 유민정 대표까지.
오늘만 해도 총 세 장의 명함을 받은 태주가 두 명의 우군과 하나의 수수께끼를 얻은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다음 날.
“태주야, 안녕.”
먼저 도착해 있던 재룡이 레이드의 기초 수업을 듣기 위해 트레이닝 돔 지하로 내려온 태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어, 덕분에.”
“아 참, 그리고 기사님한테 다 들었어.”
재룡이 태주의 발을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얘기는 잘 끝났나 보네.’
이제 남은 것은 태주의 침묵.
물론 진실을 알고서도 피크닉을 탈퇴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태주의 입장에서도 재룡의 납치를 사주했던 이가 피크닉의 일원이란 사실을 함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근데 그건 인벤토리 안에 있어? 정확히 어떻게 생겼어? 신었을 때 많이 아파?”
재앙 등급의 실체가 궁금했던 재룡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서운하지 않았어?”
물론 태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염 기사의 보고를 받은 재룡의 솔직한 심정에 대해 반문했지만.
“그런 귀한 아티팩트를 초면인 나한테 선물한 게?”
“글쎄. 서운하다고 하면, 쪼잔한 거 같고, 아니라고 하면, 또 쿨한 척 가식을 떠는 거 같고……. 으음. 잘 모르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네가 그 아티팩트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거? 솔직히 다른 사람이 받았으면 100% 서운했을 것 같거든.”
다행히 보고를 가장한 염 기사의 지혜로운 설득으로 인해 배신감을 느끼거나 질투심을 품진 않았지만, 그러한 해명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선물의 대상이 태주였기 때문이다.
“왜 난 아닌데?”
재룡의 솔직한 심정을 알게 된 태주가 선택적 질투의 이유를 물었다.
“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설마 이번에도 마음의 빚 때문이야?”
“아니. 원래 수준 차이가 심하면 질투심도 안 생기거든.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 그리고 네가 아니면 또 누가 그걸 감당하겠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주와의 객관적인 격차와 원초적인 탐욕마저 잠재우는 재앙 등급의 무시무시한 저주가 재룡으로 하여금 미련 없는 단념을 가능케 했다.
“고마워. 너그럽게 이해해 줘서.”
“고맙긴.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내가 더 고맙지. 막말로 두 사람만 쉬쉬하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진실을 모르는 재룡에겐 아티팩트가 곧 비밀이었지만, 진짜 비밀은 아티팩트를 주고받은 사실 자체가 아닌 아티팩트를 주고받게 된 이유였다.
“뭐, 그렇긴 하지.”
재룡이 특유의 순박한 웃음에서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태주가 양심에 반하는 동조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그때.
“뭐야, 또 둘이 있는 거야? 설마 내 욕을 하면서 가까워진 건 아니겠지?”
어느새 끼어든 세준이 태주와 재룡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욕이라니. 그냥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있었어.”
“어제 있었던 일? 둘이 어제 뭐 했는데?”
재룡의 대답에 소외감을 느낀 세준이 태주의 베프 겸 오른팔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심에 불타며 물었다.
“그냥 공대원으로 뽑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작은 선물 하나를 했어.”
“작은 선물 뭐?”
선물의 정체가 궁금했던 세준이 추궁하듯이 물었다.
“활줄.”
“활줄? 활시위로 쓰이는 스트링 그거?”
재룡의 대답을 들은 세준이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그게 다야?”
“어.”
“난 또 뭐 대단한 거라도 준 줄 알았네.”
활줄의 등급과 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모르는 세준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아니, 이왕 줄 거면 완성품을 줘야지 무슨 활줄만 줘. 전사한테 칼자루만 선물하는 것도 아니고. 이래서 궁수의 마음은 궁수만 안다니까.”
선물의 수준에 안도한 세준이 태주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동질감을 강조했다.
“설마 딱 그 정도만 고마웠던 건 아니지?”
“야, 무슨 취조해?”
재룡의 선의가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태주가 세준의 견제를 제지하며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공대원 모임으로 회식까지 했는데, 무슨 클래스로 선을 그어. 서로 민망하게.”
“아니, 뭐, 난 그냥 장난으로…….”
태주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세준이 어깨동무를 했던 팔을 슬그머니 거두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쏘리. 사실 나도 태주한테 줄 게 있어서 왔거든.”
재룡에게 마지못해 사과한 세준이 과잠의 왼쪽 팔뚝을 태주에게 돌려 보이며 말했다.
“짠! 궁수 모임 와펜 나왔어. 참고로 너한테 제일 먼저 주는 거야. 내 건 그냥 위치도 확인할 겸 견본용으로 붙여본 거고.”
과잠의 안주머니에서 와펜 뭉치를 꺼낸 세준이 그중 한 장을 태주에게 건넸다.
“오오, 예쁘게 잘 나왔네. 크기도 적당하고.”
자신의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반영된 디자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태주가 완성된 와펜을 왼쪽 팔뚝에 대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작하느라 수고했어. 이건 다음 직업 탐구 시간 때까지 꼭 붙여 놓을게.”
“그래. 다른 애들한테도 다 붙이고 오라고 얘기할게.”
태주의 칭찬에 수고로움마저 잊은 세준이 보람찬 얼굴로 말했다.
“아, 맞다. 너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돼?”
남은 와펜을 챙기던 세준이 태주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번 주 토요일? 왜. 또 회식하게?”
“회식? 으음. 뭐, 비슷한 거야. 어차피 술 마시러 가는 건 똑같으니까.”
세준이 갸웃거렸던 고개를 이내 끄덕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과팅이 하나 들어왔는데, 인원은 5대5고, 상대는 우리 학교 미대 조소과야. 당연히 그쪽이 여자고.”
“뭐? 과팅?”
회귀 전, 학과 내에서도 섞이지 못했던 태주가 동기들과 함께 과팅을 나갔을 리 만무했다.
“글쎄. 그날은 선약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은데.”
여름 인턴십 논의를 위한 길드 마스터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던 태주가 세준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물론 두 만남 모두 상대가 다섯이란 점에선 나름의 공통점이 있었지만.
“선약? 몇 시에 만나는데?”
“저녁 7시.”
협회장으로부터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전달받은 태주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세준에게 전했다.
“아아, 우리도 7시에 보기로 했는데.”
점심 약속이길 기대했던 세준이 태주의 대답에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중요한 약속이야? 사실 걔네들이 네 얘기를 많이 했거든. 네가 안 나가면 아예 파투 날 수도 있어.”
손으로 입을 가린 세준이 태주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으음. 과팅보다는 확실히 중요한 약속이지. 심지어 너희 아버지도 오시니까.”
“뭐? 우리 아빠가?”
생각지도 못한 멤버 구성에 화들짝 놀란 세준이 턱을 당기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너 설마 인턴십 때문에 만나는 거야?”
이전에도 한 번 물어봤듯 세준은 이미 아버지인 임 대표를 통해 태주의 인턴십 논의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
물론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듣게 된 재룡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었지만.
“뭐야, 인턴은 3학년 때부터 가능한 거 아니었어?”
과팅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재룡이 세준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알잖아. 태주 혼자 4학년 수업까지 듣는 거. 아마 인턴십만 이른 게 아닐걸?”
세준의 말대로 태주의 비교 대상은 이미 동기들이 아니었다.
“그럼 과팅을 다음 날로 미룰까? 너만 괜찮다면 다 오케이 할 거 같은데.”
“그냥 나 빼고 하면 안 돼?”
“말했잖아. 어차피 우리 넷은 다 들러리라고.”
“나머지 셋은 누군데?”
“아직 안 정했어. 어차피 네가 없으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래? 그럼 딱 일주일만 미루고, 재룡이도 껴줘. 나머지 두 명은 네가 알아서 채우고.”
“뭐? 하재룡을?”
과팅의 주선자인 세준이 태주가 내건 참가 조건에 두 귀를 의심했다.
“태주야, 나는 괜찮…….”
“같이 가자. 이것도 다 추억이고 경험인데.”
재룡의 말을 끊은 태주가 공대원을 선발하듯 과팅 멤버로의 합류를 권하던 바로 그때.
지이잉!
때아닌 진동에 흠칫한 태주가 얼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학과 사무실]
“으음?”
단체 문자에 익숙한 발신자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아이들의 휴대폰은 태주의 것과 달리 잠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