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사설 금고 (6)
‘시스템이 주는 일일 과제와는 별개의 미션이라는 건가?’
거부할 이유가 없는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Y로 옮겨졌다.
▶ 새로운 사역 요건이 대외 활동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 대외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치는 장학생 레벨에 반영됩니다.
‘진짜 취업 스펙을 관리하는 것처럼 대외 활동까지 인정해주네.’
【대외 활동 목록】
1.
[난이도 하]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의 사역 요건 충족하기 (더 보기▼)
▶ 대외 활동의 난이도에 따라 완료 보상의 규모가 달라집니다.
‘난이도가 하라……. 근데 더 보기는 뭐지?’
더 보기 항목을 응시하자 재앙의 찬가와 사역 요건 등 조금 전에 봤던 내용들이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웠는데 잘됐네. 굳이 부츠를 신어볼 필요도 없고.’
더 이상의 정보가 없음을 확인한 태주가 부츠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어? 이제 그만하시는 겁니까?”
태주의 오기와 승부욕을 걱정했던 염 기사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네. 더 이상의 도전은 무의미할 것 같아서요.”
재앙 등급을 접할 기회를 준 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밀을 공유할 필요성까진 없었기 때문에 소득 없는 객기였던 양 헛웃음으로 무마하는 태주였다.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진실을 알 리 없는 염 기사가 태주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몸은 좀 어때요? 아저씨나 나나 힐러가 아니라 딱히 도와줄 게 없네요. 아, 힘들면 바닥에라도 좀 앉아요.”
태주에게 남다른 기대를 걸었던 민정이 태주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곧 나아질 겁니다.”
짧은 탐색전을 마친 태주의 몸은 부츠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빠른 속도로 호전되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방에 포션 같은 거 없어?”
고생한 태주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민정이 염 기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물었다.
“포션? 글쎄. 올라가서 한번 찾아봐야겠는데? 태주 씨,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엘리베이터로 해서 금방 갔다 올게요.”
“아니요.”
염 기사에게 손을 뻗어 다가오지 못하게 했던 태주가 이번엔 같은 방식으로 멀어지지 못하게 막았다.
“포션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어서요.”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태주가 최고급 회복 포션인 파이안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우와.”
태주의 특별한 능력을 목격한 민정이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진짜 궁수가 인벤토리를 쓰네?”
“내가 그랬잖아. 여기 올 이유가 없는 분이라고.”
태주를 상대로 한 민정의 신규 고객 유치 노력이 허사라 했던 염 기사가 보란 듯이 끼어들며 말했다.
벌컥벌컥.
민정이 감탄하는 동안 신발을 갈아 신은 태주가 회복 포션을 단숨에 들이켠 뒤 고마움을 전했다.
“좋은 경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런 누추한 곳까지 흔쾌히 동행해 주셔서 제가 더 영광입니다.”
“뭐? 누추? 아저씨 지금 말 다 했어?”
염 기사의 말에 발끈 한 민정이 멱살을 잡는 시늉을 하며 바짝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이건 제자리에 갖다 놓겠습니다.”
내심 소유권의 양도를 기대하고 있던 태주가 욕심을 드러내지 않은 채 태연한 말투로 부츠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받아주시겠습니까?”
염 기사의 입에서 기다리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앞뒤를 잘라먹은 의아한 부탁이었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인 양 동작을 멈춘 채 의아한 눈으로 질문의 의도를 되물어 봤지만.
“그 부츠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뭐? 저걸 거저 준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당사자인 태주보다 제삼자인 민정이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저씨, 원래 이렇게 화끈한 사람이었어?”
재앙 등급의 가치와 희소성, 그리고 그에 따른 시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민정이 염 기사의 파격적인 씀씀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차피 난 저거 죽을 때까지 못 써. 물려줄 핏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가능성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겠어? 이런 비좁은 컨테이너 안에서 기약 없이 묵히기엔 아까운 녀석이기도 하고.”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던 염 기사가 엷은 미소를 머금은 후련한 얼굴로 결단의 이유를 밝혔다.
“그럼 컨테이너는? 앞으로 태주 씨가 쓰는 거야? 결계의 성능을 유지하려면 때마다 마나석도 교체해 줘야 되고, 컨테이너 대여료도 만만치 않을 텐데.”
입금자가 바뀔 수도 있다고 판단한 민정이 부츠를 든 태주를 슬쩍 쳐다본 뒤 염 기사에게 물었다.
“글쎄. 그냥 인벤토리에 보관하시면 되지 않을까?”
염 기사는 태주의 인벤토리 능력이 컨테이너 안에 잠들어 있던 귀한 부츠를 끄집어낼 유일한 해답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번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네. 그럼.”
염 기사의 제안을 받은 태주가 여느 때처럼 인벤토리를 열었다.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과연.’
부츠를 든 태주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Y라는 선택지를 바라봤다.
바로 그때.
【인벤토리】
526.
[재앙]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 (×1)
‘됐다.’
찰나의 우려와 달리 손에 들린 부츠가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보유 목록에 추가되었다.
“어? 된 거예요?”
결계 없인 보관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민정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반면, 인벤토리의 성능 자체에 대해선 의심한 적 없는 염 기사는 혹시 모를 거부 반응을 염려하며 태주의 안색을 살폈다.
“네. 보시다시피.”
시스템의 경고 메시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태주가 두 팔을 벌리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후유. 역시 임자는 따로 있었네요.”
그제야 한숨을 돌린 염 기사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근데 저도 뭔가 보답을 해야 되지 않을까요? 가만히 있기엔 너무 엄청난 선물이라.”
“아니요. 물질적인 대가를 원했다면, 애초에 보여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태주의 양심적인 반응에 염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정 부담스러우시면, 나중에, 그러니까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그 부츠를 신고 나타나 편안하게 한번 웃어주시면 됩니다.”
“네. 꼭 그러겠습니다.”
현재로선 불가능한 바람이었지만, 태주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염 기사의 우스갯소리 속 막연한 기대감에 진심으로 답하는 태주였다.
“아저씨, 나는? 나는 뭐 없어?”
염 기사의 통 큰 선물에 놀란 민정이 찔러보는 심정으로 물었다.
“너? 너는 대신 월세를 받았잖아. 이번 생은 그걸로 만족해.”
파격적인 할인 제안을 받았던 태주와 비교 아닌 비교를 당했던 염 기사가 민정에게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대갚음해 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우와, 이 아저씨 뒤끝 장난 아니네.”
“원래 나이 들수록 서운한 게 많아지는 법이야. 유 대표도 슬슬 공감할 나이대 아니야? 같이 늙어가는 처지.”
“뭐? 같이 늙어가는 처지? 와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아니, 8살 차이를 또래 취급하는 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야?”
“어이, 유 대표,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어차피 태주 씨 눈엔 다 아저씨고 아줌마인데.”
“뭐? 아줌마? 저기요. 염경섭 씨, 저 아직 미혼이거든요?”
“아아, 그러세요? 근데 그렇게 따지면 저도 미혼이에요.”
콩고물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가벼운 농담이 논쟁으로 번지던 바로 그때.
지이잉! 지이잉!
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공처럼 타이밍 좋게 울린 진동 소리에 말싸움을 그친 두 사람이었다.
“어? 도련님이시네?”
휴대폰을 꺼내든 염 기사가 발신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태주를 쳐다봤다.
“그럼 차에서 부탁드린 내용만 빼고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간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염 기사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에 앞서 태주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 그러시죠.”
어차피 해명이 필요한 쪽은 염 기사였기 때문에 태주의 입장에서도 아티팩트의 출처를 밝히고 떳떳하게 사용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네, 도련님, 말씀하십시오.”
태주의 의사를 확인한 염 기사가 여러 번의 울림 끝에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기사님, 태주는 잘 들어갔어요?”]
“아니요. 지금 저랑 같이 계십니다.”
[“어? 아직도요? 딱히 차가 막힐 시간은 아닌 거 같은데.”]
“도로 위가 아니라 기사가 되기 전부터 이용하던 사설 금고에 왔습니다. 도련님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안 쓰는 물건 몇 개를 드리려고요.”
[“오오, 역시 절 생각해 주시는 건 기사님밖에 없네요.”]
“아닙니다. 경호가 필요 없게 된 이후에도 이렇게 회사에 남게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에이, 무슨 그런 소릴. 그럼 태주도 옆에 있어요?”]
“네. 잠시 바꿔드릴까요?”
[“아니요. 그냥 잘 들어갔나 궁금해서 해본 거예요. 둘만 가는 게 어색하진 않았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 그러셨군요. 안 그래도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니 댁에 모셔다드리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자세한 얘기는 좀 이따 도착 보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룡과의 통화를 짧게 마무리 지은 염 기사가 컨테이너의 열쇠를 민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엘리베이터는 못 쓰겠네.”
“왜. 아쉬워?”
“아니. 홀가분해. 생돈 나가는 기분도 안 들고.”
“설마 위에 있는 짐들도 다 뺄 거야?”
“407호? 아니. 그거라도 있어야 놀러 올 명분이 있지.”
“참 나, 누가 보면 되게 친한 줄 알겠네.”
“그럼 또 놀러 올게. 태주 씨, 가시죠.”
지하 주차장에서의 볼일을 마친 염 기사가 계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바로 그때.
“어이, 아저씨.”
“왜?”
“이거.”
민정이 자신을 돌아보는 염 기사에게 클로버 열쇠를 던졌다.
“어? 이걸 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열쇠를 허공에서 낚아챈 염 기사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돈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엘리베이터는 써. 나중에 무릎 아프다고 찡찡대지 말고.”
“그래. 아주 고오오맙다. 태주 씨, 이쪽으로 오시죠.”
민정의 배려에 헛웃음을 지은 염 기사가 열쇠를 들어 보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근데 넌 안 올라가?”
“난 정리할 게 좀 있어서.”
민정이 턱 끝으로 컨테이너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안녕히 계세요.”
태주가 염 기사를 따라 작별 인사를 건네던 바로 그때.
“저기, 태주 씨, 잠깐만.”
태주를 불러 세운 민정이 두 사람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