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60화 (160/242)

160. 사설 금고 (5)

“역시 젊음이 좋네. 발걸음에 거침이 없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는 태주의 담대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정이 흥미로운 미소와 함께 나지막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젊어서 그런 게 아니라 태주 씨니까 가능한 거야.”

컨테이너 문을 열어둔 채 민정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염 기사가 잘못된 전제를 지적했다.

“거참, 혼잣말하는 것까지 꼭 참견해야겠어? 하여간 센스 없게…….”

염 기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친 민정이 곁눈질로 쏘아보며 말했다.

‘결계가 있어도 이 정도라니.’

바닥에 깔린 마나석들을 사뿐히 지르밟고 나아가던 태주가 다가갈수록 거세지는 재앙 등급의 마력에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저항 스킬이 저주를 상쇄시키는 거 아니야?’

재앙 등급 아티팩트엔 사용자를 파멸로 이끄는 저주가 걸려 있었다.

‘아님, 재앙이란 이름처럼 어둠의 힘이 작용할지도 모르니까 암흑 속성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복면이라도 써볼까?’

특히 35년, 아니, 회귀 전인 40년 동안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저주의 형태와 그에 따른 증상이 천차만별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저주의 해결책은커녕 정확한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지. 6차 각성자도 통제하지 못한 저주를 그렇게 쉽게 풀 수 있을 리 없지.’

차고 넘치는 실패의 표본들 속 전례 없는 요행을 기대하던 태주의 한쪽 발이 드디어 마법진의 외곽선을 넘었다.

투명한 벽을 생성해 외부의 접근을 막는 용도가 아닌 내부의 힘을 억제하는 봉인의 용도로 형성된 결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책에선 분명 용도대로 사용하거나 착용하지 않는 이상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그랬는데.’

살짝 허리를 굽힌 태주가 부츠를 집어 들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어?’

한 손으로 부츠를 집어 든 태주가 순간적으로 세 가지 놀라움을 느꼈다.

‘되게 가볍네?’

첫째, 화려한 금속 장식이 붙어 있는 가죽 부츠의 무게가 착용 전후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초경량이었다는 것.

‘근데 왜 이렇게 심란하지? 기껏해야 결계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둘째, 물리적인 무게와 달리, 부츠에 접촉하는 순간 느껴지는 원인 모를 위압감이 태주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는 것.

‘그나저나 빨리 신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동화 속 빨간 구두에 집착하게 된 소녀처럼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부츠를 신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

“생각보다 가볍죠?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빨리 발부터 집어넣고 싶고.”

부츠의 주인인 염 기사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미소와 함께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공유했다.

“네. 기사님도 그랬습니까?”

마법진에서 멀어질수록 강해지는 아티팩트의 마력을 참을성 있게 견뎌내던 태주가 컨테이너의 문을 나서며 되물었다.

“그랬죠. 그리고 누구나 그럴 겁니다. 물론 태주 씨가 비각성자였다면, 훨씬 더 괴로웠겠지만.”

그 어떤 둔감한 각성자도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마력이라 각성 여부에 따른, 그리고 각성 수준에 따른 인내심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설마 직접 신어 보려는 건 아니죠?”

민정이 태주의 얼굴과 부츠를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일단 주인의 허락부터 받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요.”

민정의 우려에 답한 태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염 기사를 향했다.

“허락이요? 하하. 허락할 마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모시고 오지도 않았겠죠.”

태주와 눈이 마주친 염 기사가 흔쾌히 착용을 허락했다.

“대신 발을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빼는 것도 용기라는 걸 꼭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츠에 도전해 본 적 있는, 정확히 말하면, 도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염 기사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많이 힘들었습니까?”

손에 든 부츠를 자신의 발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태주가 유경험자인 염 기사에게 자세한 조언을 구했다.

“제 경험을 빌려 한 가지 예언을 하자면, 처음엔 부츠에 걸린 저주가, 마지막엔 그걸 이겨내려는 오기가 태주 씨를 힘들게 할 겁니다.”

발을 빼는 것 또한 용기라고 했던 이유가 태주에게 있음을 암시한 염 기사가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경고하듯이 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재앙 등급의 마력에 밀리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도전에 앞서, 모든 능력치를 증폭시켰다.

쓰윽.

신발을 벗은 태주가 부츠의 입구를 양옆으로 잡아 벌린 뒤 오른발을 집어넣었다.

‘아직까진 괜찮네.’

다음엔 왼발.

쓰윽.

발을 집어넣을 때마다 살짝 커 보였던 부츠의 사이즈가 태주의 발볼과 길이에 맞게 저절로 조절되었다.

툭!

‘……?!’

부츠의 밑바닥이 모두 땅에 닿는 순간, 저항과 폭주 스킬만으로는 역부족인 재앙 등급의 부작용이 태주의 육체와 정신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 나갔다.

‘뭐지? 이 기분 나쁜 무력감은.’

급격히 불규칙해진 호흡과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무거워진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지탱하곤 있었지만, 회귀 전, 아니, 각성 전으로 돌아간 듯한 신체적 쇠약함과 정신적 나약함이 잠시 잊고 있던 죽음의 공포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었다.

‘내가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네.’

상태 이상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마쳤다 자신했던 태주였지만, 그러한 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재앙 등급의 저주는 단순히 대미지에 대한 방어적 개념만으론 설명할 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여차하면 부츠를 벗길 작정이었던 염 기사가 포커페이스에 능한 태주마저 숨길 수 없는 안색의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네. 아직은.”

입으론 괜찮다고 했지만, 사방에서 팔다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결국 힘든 운동을 마친 사람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무릎에 손을 얹은 태주였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한 태주가 잠깐의 휴식을 마치기 무섭게 굽었던 허리와 다리를 꼿꼿하게 폈다.

“더 이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태주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던 염 기사가 도전을 중단시키기 위해 황급히 다가갔다.

“아니요.”

태주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염 기사를 향해 활짝 편 손바닥을 뻗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느껴 보고 싶습니다.”

예언의 적중.

본인은 이미 망각하고 있었지만, 염 기사의 말대로 아티팩트의 저주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마음 한구석의 오기가 태주의 도전을 자력으로 멈출 수 없는 단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 그래도…….”

“기다리라잖아.”

척!

어느새 다가온 민정이 염 기사의 한쪽 어깨를 덥석 움켜쥐며 말했다.

“그리고 젊어서 그런 게 아니라 태주 씨니까 가능한 거라며. 그럼 당연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버티지 않겠어? 명색이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인데?”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든 민정이 염 기사의 말을 인용하며 성급한 개입을 막았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아저씨랑 나랑 달라붙어서 한쪽씩 벗겨내면 되잖아. 안 그래?”

“하아. 태주 씨의 승부욕에 불이 붙으면 안 되는데…….”

당사자의 의지와 민정의 만류에 마음을 바꾼 염 기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근데 왜 시스템이 잠잠하지?’

착용과 동시에 장비의 스펙을 확인할 수 있는 태주의 입장에선 메시지 창의 침묵마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벗어야 되나?’

소득 없는 신경전에 지쳐가고 있던 태주가 한쪽 발을 빼내려던 바로 그때.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

- 등급: 재앙

그토록 기다리던 부츠의 정보가 태주의 시야를 가렸다.

‘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한 태주가 다시 한번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뭐야, 전장의 피를 탐식하는 포식자의 흡혈 장화? 재앙 등급이라 그런지 이름 한번 거창하네.’

태주가 방어구의 일종인 부츠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공격적인 명칭을 의아한 눈으로 읽어 나갔다.

- ???: ???

- ???: ???

- ???

- ???

- ???

‘근데 왜 세부 스펙이 안 뜨지?’

이름과 등급까진 공개됐지만, 다른 장비들을 처음 착용했을 때와는 달리 아티팩트에 부착된 버프나 기타 옵션들이 전부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재앙의 찬가》

‘이건 또 뭐지?’

《전장의 웅덩이를 가득 채운 약자들의 피. 그곳에 얼굴을 담가 사리사욕을 채운 난 피식자들의 비명을 나침반 삼아 검붉은 발자취를 남긴다네. 난 가장 낮고 더러운 곳과 맞닿은 포식자의 하수인.》

난데없이 등장한 작자 미상의 단문.

‘흡혈 장화의 시점에서 의인화를 한 건가?’

흐트러진 자세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태주가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로 가득 찬 의문의 메시지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바로 그때.

《사역 요건》

‘……?!’

곧이어 나타난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재앙 등급의 비밀을 밝힐 기회가 왔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태주였다.

‘부츠를 신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라는 건가?’

재앙 등급의 아티팩트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 자격.

태주는 각각의 아티팩트가 고유의 사역 요건을 가지고 있고, 그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아티팩트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보았다.

《장화의 갈증을 멈추시오.》

물론 저주가 서린 물건에게 친절한 설명을 바라는 것도 욕심 아닌 욕심이었지만.

‘뭐야, 이게 다야?’

간결하다 못해 감질나는 불친절한 사역 요건에 두 눈을 의심한 태주가 잠시 염 기사를 쳐다봤다.

‘근데 이것도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재앙의 찬가나 사역 요건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태주가 부츠의 저주를 경험한 바 있는 염 기사에게 이상 현상의 존재 여부를 우회적으로 물었다.

“기사님은 이걸 몇 분이나 버텼습니까?”

“저요? 으음. 따로 세어 볼 정신은 없었지만, 당시엔 저도 한창이었을 때라 딱 지금의 태주 씨 정도만 버텼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하루 종일 뻗어 있을 만큼 오기의 대가는 처참했지만.”

태주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염 기사가 오래전의 기억을 어렴풋이 더듬어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괴로움만 반복됐습니까? 아무런 변화 없이?”

태주와 같은 시간을 버텼다면 분명 저주에서 비롯된 경험도 일치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아, 혹시 그만두고 싶으신 거면 저희가…….”

“아니요. 아직 견딜 만합니다.”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임을 확인한 태주가 도전을 이어가던 바로 그때.

▶ 해당 사역 요건을 대외 활동 목록에 추가하시겠습니까? (Y/N)

‘뭐? 대외 활동?’

부츠에 얽힌 정보들을 제한적으로 보여주던 시스템이 태주에게 생소한 질문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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