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사설 금고 (4)
잠시 후.
407호를 나선 염 기사가 계단을 지나쳤다.
“어? 지하로 내려가야 되는 거 아닌가요?”
뒤따라가던 태주가 멀어지는 계단과 염 기사의 뒤통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태주의 물음에 답은 했지만, 뒤를 돌아보거나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나?’
일반적인 구조의 아파트는 아니었기에 어딜 가든 초행길인 태주의 입장에선 염 기사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선물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뭐, 가벼운 비밀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거저 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모름지기 사람만 임자가 있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복면의 입장에서도 아마 톨게이트만 들락거리는 저보다 태주 씨와 함께 게이트를 누비고 싶을 겁니다.”
태주의 말대로 쉽게 내어줄 물건은 아니었지만, 재룡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고용된 이후 10년 넘게 현역에서 물러났던 터라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라 한들 과거를 추억하는 용도로만 활용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알면 재룡이가 서운해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도련님께선 트라우마 때문에 안 됩니다.”
“네? 트라우마요?”
“네. 납치 당시에 녀석들이 자루를 뒤집어씌웠거든요. 그래서 그때의 충격으로 지금까지 얼굴 전체를 뒤덮는 건 꺼려 하고 계십니다. 아, 심지어 잘 때도 목 위로는 이불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셨고요.”
“아, 네.”
마냥 다행으로 여길 순 없는 재룡의 안타까운 사연에 절로 숙연해진 태주였다.
“게다가 도련님께선 결국 회사를 물려받으셔야 되기 때문에 드려 봤자 또 진열장 신세를 면치 못할 겁니다. 그건 복면의 입장을 떠나 원소유자인 저 역시 원치 않는 그림이고요.”
“네. 그럼 편안한 마음으로 잘 쓰겠습니다.”
염 기사의 깊은 뜻을 알게 된 태주가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네. 꼭 닳고 닳을 때까지 써주십쇼.”
여전히 뒤통수만 보이고 있는 염 기사였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
앞서가던 염 기사가 갑자기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고장 난 게 아니었습니까?”
덩달아 발걸음을 멈춘 태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겉보기엔 이래도 속은 멀쩡합니다.”
염 기사가 다이어리 속에 있던 열쇠를 꺼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럼 좀 전엔 왜 걸어 올라온 거죠?”
1층에서 이미 한차례 엘리베이터를 지나쳤던 터라 당연히 운행이 중단된 것으로 여기고 있던 태주였다.
“아깐 이게 없었거든요.”
열쇠를 반대로 잡은 염 기사가 클로버 모양의 머리를 엘리베이터 버튼 밑 열쇠 구멍에 밀어 넣은 뒤 반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비밀 금고의 고객에게만 허락된 작은 특권입니다.”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킨 염 기사가 열쇠를 빼낸 뒤 내려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럼 지하는 엘리베이터로만 내려갈 수 있습니까?”
“물론 계단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어차피 1층에 설치된 셔터를 열려면 이 열쇠가 필요합니다.”
아직 쓰임이 남은 열쇠는 여전히 염 기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띵!
곧이어 경쾌한 도착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타시죠.”
자동차와 집에 이어 엘리베이터의 문까지 손수 열어준 염 기사가 내려가기 버튼을 누른 채 옆으로 비켜섰다.
“네. 그럼.”
“오래된 아파트라 그런지 엘리베이터가 좀 좁습니다.”
태주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염 기사가 B1 버튼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러게요. 큰 물건은 계단으로 옮겨야겠네요.”
염 기사의 말에 대꾸한 태주가 문 위에 표시된 층수의 변화를 응시하던 바로 그때.
띵!
지하로 내려가야 정상인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2층에서 멈춰 섰다.
“어? 다른 손님이 있었나?”
태주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염 기사가 예상치 못한 합승에 한 발짝 물러섰다.
[문이 열립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벌어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의 틈.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클로버 컨테이너의 오너, 유민정이었다.
“어?”
민정의 깜짝 등장에 염 기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 금고엔 갑자기 왜?”
탁! 탁! 탁!
엘리베이터 안으로 불쑥 들어온 민정이 미리 타고 있던 두 사람을 등지며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갑자기? 갑자기는 유 대표가 나타난 게 갑자기지.”
“왜. 이분한테 아티팩트 자랑이라도 하려고?”
“유 대표 성격에 청소하러 내려가는 건 아닐 테고. 뭐야, 설마 우릴 미행하고 있던 거야?”
“어? 설마 쓰지도 못할 물건을 비싼 값에 팔려는 건 아니겠지?”
대화는 오가고 있었지만, 서로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방해할 거면, 1층에서 내려. 난 태주 씨랑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에이.”
유 대표가 1층 버튼을 누르기 위해 검지를 뻗은 염 기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이렇게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내가 안내해야지. 안 그래요 태주 씨?”
옆으로 고개를 돌린 민정이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태주를 바라보며 상냥하게 물었다.
“근데 태주 씨는 뭐, 보관하고 싶은 물건 없어요? 태주 씨처럼 광고 효과가 있는 고객이면, 내가 딱 반값에 해줄 수도 있는데.”
“반값? 나는? 아아, 신규 고객만 고객이고, 나 같은 장기 고객은 뭐, 잡은 물고기라 이거야?”
민정의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염 기사가 서운한 투로 물었다.
“대신 아저씨한텐 월세를 안 올렸잖아. 이번 생은 그걸로 만족해.”
민정이 염 기사의 손목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근데 이걸 어쩌나. 태주 씨는 어차피 여기에 올 이유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태주 씨, 설마 다른 곳이랑 이미 계약했어요?”
거울로만 눈을 마주치던 민정이 뒤로 홱 하니 돌아서며 물었다.
“아니, 난 사설 금고가 아니라 인벤토리 능력을 얘기하는 거야.”
오해의 발단인 염 기사가 민정의 제안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신 설명했다.
“인벤토리? 궁수가 그런 것도 돼요?”
“일반적인 궁수가 아니라 매직 아처잖아.”
“근데 왜 자꾸 아저씨가 대답을 해. 난 이분한테 물어본 건데.”
“괜히 옆에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야. 초면인데 다짜고짜 영업부터 하고 말이야.”
“글쎄. 태주 씨 입장에선 과연 내가 귀찮을까 아님, 여기까지 끌고 온 아저씨가 더 귀찮을까?”
“뭐야?”
두 사람이 태주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사이, 느긋하게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띵!
[문이 열립니다.]
“먼저 내리시죠.”
의전이 몸에 밴 염 기사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길을 터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순간 느껴지는 지하 주차장 특유의 음산함과 눅눅한 한기.
아파트의 면적만큼이나 넓은 지하 주차장 곳곳엔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색색의 저장고들이 주차 공간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다 비밀 금고?’
누구의 소유고, 어떠한 것들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방에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마력이 태주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진짜 재앙 등급이라도 숨겨둔 건가?’
각성자라고 해도 재앙 등급의 아티팩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희소성과 위험성을 떠나 협회로부터 소유권을 인정받은 최초 발견자 대부분이 사설 금고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모셔둔 아티팩트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염 기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태주를 자신의 컨테이너 쪽으로 안내했다.
“저 끝에 보이는 저 핑크색 컨테이너가 바로 제 비밀 금고입니다.”
“아아, 핑크색이요…….”
태주가 염 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러블리한 색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멀리 있어도 눈에 확 띄네요. 색상은 직접 고르신 건가요?”
“아니요. 주인이 마음대로 배정한 겁니다.”
염 기사가 뒤따라오던 민정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요. 마음대로 아니거든요? 나름대로 규칙이 있거든요?”
염 기사와 눈이 마주친 민정이 턱을 치켜든 채 빈정거리는 말투로 반박했다.
“아니라고? 그럼 뭔데?”
“하아. 그걸 이 타이밍에 얘기하면 재미없잖아. 하여간 센스 없게…….”
깊은 한숨을 내쉰 민정이 손발이 맞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을 아꼈다.
“뭐야, 설마 핑크색 컨테이너가 다 그거였어?”
물론 장기 고객조차 몰랐던 뜻밖의 사실에 놀란 염 기사는 민정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그래. 그거야. 그림의 떡.”
민정이 태주를 힐끗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그림의 떡? 진짜 재앙 등급이 든 컨테이너만 색상으로 구분한 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직후 다양한 색상의 컨테이너들을 지나쳤지만, 유독 핑크색 컨테이너의 숫자만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407호]
‘여기도 407호네.’
컨테이너의 문엔 염 기사의 집과 동일한 호수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자, 그럼 열겠습니다.”
컨테이너 앞으로 다가간 염 기사가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을 때와는 달리 제대로 잡은 열쇠를 육중한 크기의 자물쇠에 밀어 넣었다.
철컥!
“가장 애착이 가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애장품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바로 이놈입니다.”
잠금장치를 푼 염 기사가 태주의 질문을 떠올리며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바닥에 그려진 결계용 마법진과 그 주위에 쌓여 있는, 마법진의 힘을 지탱해 주는 용도로 놓인 수많은 마나석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마법진 위에 가지런히 놓인 부츠 한 켤레의 마력을 제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저지선이었다.
‘……재앙 등급?’
아티팩트의 존재감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컨테이너 안에 갇혀 있던 다량의 마력이 수문을 개방한 댐에서 방출되는 거센 물줄기처럼 태주를 향해 터져 나왔다.
‘……?!’
재앙 등급의 아티팩트가 내뿜는 강력한 마력이 태주의 뺨과 손등을 스치는 순간, 모르는 이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아찔한 소름이 몸 전체에 저절로 일었다.
‘전설 등급하곤 차원이 다르네.’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 느꼈던 희귀 등급과의 격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격차.
재앙과 전설 사이의 등급을 좀 더 세분화해도 될 것 같은 현격한 마력의 차이가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떻습니까? 재앙 등급을 마주한 소감이.”
노총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티팩트를 바라보는 염 기사의 눈빛에선 자식을 바라보는 흐뭇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역시 진주는 흙 속에 있었네요.”
태주가 음침하고 열악한 지하 주차장의 전경을 둘러보며 비유적인 감상을 전했다.
“네. 하지만 화려한 것일수록 가시가 있거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죠.”
염 기사가 재앙 등급이 지닌 저주를 암시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한번 만져 봐도 됩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경험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웬만해선 먼저 핸들을 꺾지 않는 성격이라.”
치킨 게임을 예시로 든 염 기사의 평가를 인용한 태주가 컨테이너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