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사설 금고 (3)
‘협회장님께서 어쩐 일이시지?’
발신자를 확인한 태주가 의아한 얼굴로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잠깐 통화 좀 할 수 있겠나?]
‘통화? 잠깐. 설마 또 진우가 장난치는 건 아니겠지?’
얼마 전, 태주는 휴대폰이 고장 난 진우가 할아버지인 송기철 협회장의 번호로 보낸 입원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다.
【네. 통화 가능합니다. 제가 연락드릴까요?】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진우에게 속는 한이 있어도 전화를 거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한 선택이었지만.
지이잉! 지이잉!
태주가 답장을 보내기 무섭게 협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급한 일이신가?’
중요한 통화일수록 듣는 귀가 신경 쓰였지만, 일을 마친 염 기사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어두는 편이 문을 닫아두는 것보다 오히려 보안에 유리할 것 같았다.
“여보세요?”
[“나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협회장이었다.
“네, 협회장님.”
[“집인가?”]
“아니요. 잠깐 약속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약속. 그래. 나도 그 약속 때문에 전화했네.”]
“약속이요?”
[“진우의 병문안을 왔던 날, 기억하나?”]
“네.”
[“그럼 내가 했던 얘기도 기억하겠군.”]
“네. 조만간 여름 인턴십에 대한 논의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모임 땐 함께 가자고도 하셨고요.”
통화의 목적을 알아챈 태주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허허, 그럼 인턴십의 목적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겠군.”]
“네. 제 실력을 검증해 보기 위한 하나의 시험대 역할을 할 것이라 들었습니다.”
밥값에 대한 증명.
물론 태주에게 지급할 용돈의 총액이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고, 태주의 무한한 잠재력과 압도적인 성장 가능성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5대 길드의 대표들과 나아가 모임에 초대되진 못했지만, 태주의 영입 경쟁에 뛰어든 기업과 길드의 대표들 모두 투자자의 관점에서 태주의 실전 능력을, 특히 트레이닝 돔이 아닌, 실제 던전 안에서의 플레이를 검증해 보고 싶어 했다.
[“그래. 시험을 당하는 입장에선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기회이자 위기지.”]
협회장의 말대로 이번 인턴십은 태주의 평가에 대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태주가 기대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경우 기존에 연을 맺은 길드들의 지원 수준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물론 최 총장의 바람대로 더 많은 국내외 길드들의 러브콜이 줄을 잇겠지만, 반대로 무난한 레이드에 그칠 경우 투자자들이 가졌던 기대감과 환상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턴십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때보다 한층 더 성장한 태주가 던전 실습과 마찬가지로 안전상의 이유로 인해 대부분의 교육이 E급 게이트에서 이루어지는 인턴십에서 실수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중요한 선약이 없다면, 이번 주 토요일쯤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다.”]
“이번 주 토요일이요?”
[“왜.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인턴십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요.”
인턴십의 일정이 방학과 겹친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중간고사도 치르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길드 마스터들과의 대면 약속은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하나?”]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저 개인적인 느낌만 전하려 했던 태주가 협회장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귀를 기울였다.
[“좀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레나의 이동규 대표였는데, 삼강에서 너를 만났다면서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토요일을 넘기지 말자더구나.”]
‘이번에도 이 대표가?’
이른 만남의 배후 역시 여름 인턴십의 최초 제안자인 이 대표였다.
“네. 그럼 그날은 시간을 비워두겠습니다.”
어떠한 대화가 오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령 일반적이지 않은 제안이 온다 해도 피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 그럼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남기도록 하마.”]
“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협회장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태주가 휴대폰을 귀에서 떼던 바로 그때.
안방과 동떨어진 곳에 있던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결 여유로워진 미소를 갖게 된 염 기사가 손에 묻은 물기를 바닥에 털어내며 태주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안 그래도 안방으로 모시려고 그랬는데, 어떻게 알아서 둘러보고 계셨네요.”
“아니요. 통화를 좀 하느라 아직 제대로 보진 못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바쁘시니까 제가 필요한 것만 딱딱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 한편에 놓인 어른 키만 한 장식장으로 다가간 염 기사 유리문을 열며 태주를 불렀다.
“가까이에서 보시겠습니까?”
“네.”
5단으로 이루어진 진열장엔 생각보다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어 어떤 것이 염 기사의 애장품인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겁니다.”
눈높이에 위치한 선반으로 손을 뻗은 염 기사가 집어 든 건 놀랍게도 아티팩트가 아닌 낡은 다이어리였다.
“……?!”
뜻밖의 애장품을 마주한 태주의 시선이 다이어리에서 염 기사의 얼굴로 빠르게 옮겨졌다.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 실망하셨습니까?”
태주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염 기사가 다이어리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니요.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건 오늘만 해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해서요.”
클로버 컨테이너의 허술한 외관과 유민정 대표의 가냘픈 첫인상을 떠올린 태주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방심과 현혹은 늘 선입견에서 나오는 법이죠.”
태주의 대답을 들은 염 기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어리를 건넸다.
“열어 봐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네. 그럼.”
주인의 허락을 얻은 태주가 염 기사의 손때가 묻은 다이어리의 겉면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어?”
다이어리 속지의 가운데가 네모나게 파여 있는 것을 발견한 태주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염 기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게 뭡니까?”
다이어리 속 인위적으로 만든 빈 공간엔 머리가 클로버 모양인 열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건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클로버 컨테이너의 비밀 금고 열쇠입니다.”
“네? 비밀 금고요?”
집 안에 있는 물건이 전부라 여기고 있던 태주가 뜻밖의 사실에 흠칫 놀랐다.
‘이거 혼자 왔으면, 모르고 넘어갔겠는데?’
애초에 아티팩트 위주로 살펴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신중한 태주라 할지라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다이어리까지 눈여겨봤을 확률은 희박했다.
“네. 지하 주차장 자리에 있는데,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염 기사가 다이어리 속에 든 열쇠를 끄집어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 가겠습니다.”
염 기사의 제안을 수락한 태주가 안방을 나서려던 바로 그때.
“저, 잠시만.”
“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 빈손으로 내려가시면 안 되죠.”
태주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염 기사가 갑자기 맞은편 진열장으로 다가가 유리문을 열었다.
“어디 보자. 뭐가 좋으려나……. 아, 이게 좋겠다.”
선반에 놓인 소장품들을 만지작거리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염 기사가 짧은 탄성과 함께 복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한번 써보시겠습니까? 아, 물론 헤어스타일이 망가지는 게 싫으시면, 집에 가서 써보셔도 됩니다.”
염 기사가 내민 복면은 조별 과제 당시 테테가 쓰고 있던 것처럼 눈 주위만 최소한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아니요. 지금 써보겠습니다.”
복면에서 발산되는 마력을 감지한 태주가 부드러운 촉감의 검은색 복면을 건네받았다.
‘복면은 또 처음이네.’
육안상으로는 물리적인 방어 능력이 없어 보였지만, 소유자가 직접 추천한 만큼 실망스럽지 않은 옵션들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키에 비해 워낙 얼굴이 작으셔서 착용감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아, 네.”
두 손으로 복면의 입구를 벌린 태주가 염 기사의 칭찬 속에서 천천히 머리를 집어넣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위장한 암살자의 복면]
- 등급: 전설
복면이 머리 전체를 가리는 순간, 태주의 시야에 장비의 스펙이 떠올랐다.
‘뭐? 전설?’
고급에서 희귀 등급 사이를 예상했던 태주가 생각지도 못한 아티팩트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전설 등급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보관한다고?’
개인의 성향 차이일 수도 있었지만, 아티팩트의 보관 방식이나 선물을 고르는 태도가 너무 캐주얼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기대감을 낮추고 있던 태주였다.
- 민첩성: 200% 증가
‘민첩성의 증가율이 이 정도면, 치명타를 입을 확률이 급감하겠네.’
어쌔신들이 선호하는 장비의 특성답게 회피 확률을 높여주는 옵션이 제일 상단에 위치하여 있었다.
- 어그로 차단
‘……?!’
처음 보는 옵션의 등장에 두 눈이 번쩍 뜨인 태주가 복면의 스펙을 꼼꼼히 확인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양해를 구했다.
“화장실에 거울이 있나요?”
“아, 혹시 복면을 쓴 모습이 궁금해서 그러신 겁니까?”
“네. 잠깐 확인만 하고 오려고요.”
“으음. 그럼 전 그동안 뒷정리를 하고 있겠습니다. 불도 좀 끄고요.”
진열장의 문을 닫은 염 기사가 안방의 스위치를 누르며 빙그레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복면을 쓴 채로 안방을 나선 태주가 다시 눈앞에 뜬 스펙들을 차근차근 확인했다.
- 암흑 속성 공격 무력화
‘이름 때문에 그런가? 암흑 속성에 대해서만 옵션이 붙어있네.’
물론 모든 속성 공격과 상태 이상 공격의 대미지를 최소 51%에서 최대 100%까지 감소시켜주는 저항 스킬이 이미 존재했지만, 속성 공격이 강해질수록 대미지의 감소 비율은 51%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암흑 속성 공격이라면, 그 경중에 관계없이 100%의 방어력을 보장하는 무력화 옵션이 꼭 무용지물인 건 아니었다.
- 기척 차단 효과 발생
‘어? 이건.’
염 기사의 복면엔 근력이나 방어력 등 기본적인 능력치를 증폭시키는 흔한 버프들 대신 기존에 접할 수 없었던 특별한 옵션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은신 스킬이랑 조합하면 거의 공기처럼 스며들겠는데?’
마력의 발산은 물론 발소리나 숨소리까지 최소화시키는 기척 차단의 경우 어쌔신처럼 은밀한 접근을 지향하는 근거리 딜러들에게 특화된 옵션이긴 했지만, 만약 원거리 딜러인 태주가 투명화 스킬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기척까지 지울 경우 상대로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위협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이상하진 않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태주가 복면을 쓴 자신의 모습을 얼룩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어떻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크게 불편하진 않으시죠?”
어느새 정리를 마치고 나타난 염 기사가 화장실의 전등 스위치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네. 근데 지하엔 대체 뭐가 보관되어 있는 겁니까? 막말로 이런 귀중한 아티팩트도 진열장에 들어 있었는데.”
복면을 벗은 태주가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 지하요. 그냥 가보시면 압니다.”
염 기사가 태주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