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초대 (4)
“누군데요?”
“아레나 길드의 이동규 대표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미리 안내를 지시받은 터라 재룡의 물음에 즉각적인 대답이 나왔다.
‘이동규 대표가?’
예정에 없던 초대 손님의 등장에 자신을 회장실로 부른 하 대표의 의도가 궁금해진 태주였다.
“네? 아레나요?”
재룡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으며 태주를 돌아봤다.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분명 조금 전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이 대표의 방문에 의아한 건 재룡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야 돼요?”
약속 시간을 재확인한 재룡이 비서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냥 도착하는 대로 들여보내라 하셨습니다.”
비서가 회장실 문을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순간, 주인공이 바뀐 느낌을 받은 태주가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불쾌함을 억눌렀다.
“태주야, 미안. 나도 이런 불편한 자리인 줄 몰랐어.”
난감한 표정의 재룡이 태주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난 괜찮으니까 앞장서.”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만남의 의도성을 떠나 이 대표와의 합석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어? 어, 그래.”
태주의 이해심에 한숨을 돌린 재룡이 회장실 문으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똑똑.
“어. 들어와.”
노크 소리가 전해지기 무섭게 문 너머로 하도철 대표의 괄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남자다운 풍채의 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꼴찌로 입학해서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하하. 이렇게 훌륭한 친구도 사귀고. 네가 나보다 낫구나.”
“말했잖아요. 내가 다가간 게 아니라 태주가 손을 내민 거라고. 솔직히 태주가 아니었으면, 아버지 말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재룡이 태주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알다마다. 못난 아들을 구제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태주의 등장에 화색이 돈 도철이 두툼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태주라고 합니다.”
도철이 내민 손을 가볍게 맞잡은 태주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때.
“사석에서 보니 더 반갑네요.”
태주와 하 대표의 첫 만남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 대표가 소파의 상석에 앉아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리 배치가 참 묘하네.’
회장실의 주인은 하 대표였지만, 던전 채굴 회사의 자본력이 막강하다 한들 사업적 공생 관계의 특성상 S급 게이트의 낙찰 가능성이 높은 5대 길드의 수장 앞에선 을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파의 상석은 이동규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대각선에 위치한 긴 소파를 택한 하도철이었다.
‘하긴 갑을 관계는 상대적이니까.’
하 대표와의 악수를 거둔 태주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이 대표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그동안 잘 있었죠? 안 그래도 좋은 소식이 아주 많이 들리던데.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에서도 이미 눈도장을 찍은 거 같고.”
헌터협회에서의 등급 측정 이후 한동안 마주칠 일이 없던 사이지만, 이 대표의 표정과 말투에선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관심은 감사하지만, 아직은 배우는 단계라 크게 개의치는 않고 있습니다.”
남다른 행보에 대한 이 대표의 칭찬에 들뜬 기색 하나 없이 겸손하게 대답하는 태주였다.
“그래요. 해주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오늘은 내가 이 모임의 불청객이니 다음번에 따로 아레나에서 만났으면 해요.”
“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주가 다음을 기약하는 이 대표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아이고, 불청객은요. 이 대표님은 언제나 저희 삼강의 VIP입니다. VIP. 하하하하.”
이 대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하 대표가 아부성 멘트를 넉살 좋게 던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겸허한 대답과 달리 한껏 소파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있는 이 대표였다.
“그럼 얼굴도 봤으니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 벌써 가시게요? 이왕 오신 거 다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어찌나 인사치레가 몸에 뱄는지 이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쉬운 티를 팍팍 내며 합석까지 권하는 하 대표였다.
“아니요. 원래 레이드 전엔 공복을 유지하는 편이거든요.”
업무상의 이유를 내세운 이 대표가 탄탄한 복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오랜만이야. 인사가 늦었지?”
헤어짐을 앞둔 이 대표가 드디어 재룡에게 눈길을 주었다.
물론 만남의 중요도가 다르다 보니 재룡에 대한 첫인사는 본의 아니게 작별 인사의 의미마저 내포하게 되었지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한 재룡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을 떠나 비각성자인 아버지가 을의 입장에서 굽실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둘 다 내 후배가 됐네? 늦었지만, 재룡이 너도 합격 축하해. 풍림의 임 대표 아들도 그렇지만, 웬만큼 기본기가 탄탄하지 않고선 B급 각성으로 붙기 어려웠을 텐데.”
축하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미묘한 어감이었다.
“네. 운 좋게 문을 닫고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꼴등으로 졸업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재룡이가 점점 듬직해지고 있어 대견하시겠습니다.”
재룡의 비장한 각오에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 대표가 의례적인 칭찬으로 하 대표의 기를 한번 살려주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솔직히 아비가 바라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어 여간 기쁜 게 아닙니다. 하하하하.”
자부심이 느껴지는 도철의 호방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각성자 판정을 받은 날을 두 번째 생일로 지정했던 이유를 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좀.”
S급들 앞에서 B급인 자신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민망했던 재룡이 황급히 눈치를 줬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재룡의 불만에 웃음을 그친 하 대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던 이 대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아. 하 대표님, 아드님 앞에서 이러시면 재룡이가 절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 대표의 깍듯한 인사에 한숨을 내쉰 이 대표가 재룡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예?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이 대표의 지적에 얼른 허리를 편 하 대표가 곁에 있던 재룡의 등을 토닥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니요. 전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오해를 풀고 싶은 겁니다.”
“예? 오해요?”
이 대표의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하 대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하 대표님의 극진한 대접 때문인지 재룡이가 저를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직설적인 화법의 이 대표가 표정 관리에 실패한 재룡과 시선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 재룡이가요?!”
거래처와의 관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하 대표가 재룡의 태도에 대한 이 대표의 섭섭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이, 그럴 리가요. 재룡이가 대표님 같은 헌터가 되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데요. 그렇지?”
일단 부정부터 하고 본 하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룡의 해명을 강요했다.
“네. 아버지의 말이 맞습니다. 오해를 불러일으켜 죄송합니다.”
삼강에게 있어 이 대표가 어떠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재룡이 결국 순박한 웃음이라는 가면을 쓴 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 난 그저 너희 아버지와 내가 갑과 을이 아닌, 동등한 위치에 있는 비즈니스 파트너란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할 말도 다 하고, 거슬리는 부분도 바로바로 지적해 고치도록 했지만, 마지막엔 늘 권위 의식이 없는 척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이동규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아저씨는 그만 가볼 테니까 아버지랑 좋은 시간 보내.”
“네. 안녕히 가세요.”
“그래. 다음에 보자.”
툭!
스스로를 아저씨라 칭하며 친근감을 드러낸 이 대표가 재룡의 팔뚝을 가볍게 터치하며 보통내기가 아님을 증명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조만간 또 인사드리죠.”
“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마주 보고 있던 하 대표가 이 대표에게 길을 터주며 말했다.
바로 그때.
“팔찌가 예쁘네요.”
하 대표와 재룡의 사이를 지나가던 이 대표가 태주의 오른쪽 손목에 채워진 피크닉의 팔찌를 내려다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요. 여러모로.”
툭!
태주의 팔뚝을 터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아니, 의도적으로 드러낸 이 대표의 손목에도 동일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나저나 등급 측정 때보다 더 상장한 거 같은데요?”
태주가 발산하는 마력의 크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던 이 대표가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아니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사실 헌터에게 있어 한결같다는 말은 때에 따라 모욕적일 수도 있으니까요.”
실력과 성장의 정체를 경계하는 조언을 남긴 이 대표가 5차 각성자 다운 강력한 마력을 발산하며 유유히 회장실을 나섰다.
덜컥!
“자, 서 있느라 다리 아팠을 텐데 일단 좀 앉자꾸나.”
이 대표에게 잠시 내어주었던 상석을 되찾은 하 대표가 소파에 털썩 내려앉으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직은 직원들의 식사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재룡과 함께 긴 소파에 나란히 자리 잡은 태주였다.
“근데 이 대표님은 갑자기 왜 온 거예요? 아까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다른 손님이 있다고는 안 하셨잖아요.”
이 대표가 나가면서부터 입이 풀린 재룡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따지듯이 물었다.
“아침에 이 대표랑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태주가, 아, 편하게 태주라고 불러도 될까?”
“네. 저는 좋습니다.”
태주가 호칭에 대한 하 대표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하하. 사람이 아주 경우가 있구먼. 아무튼. 무슨 말끝에 아들 녀석이랑 태주가 온다고 했더니 대뜸 자기도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가야겠다면서 너희들한테는 비밀로 해달라는데, 내가 그걸 무슨 수로 막아. 가뜩이나 채굴권 갱신 시점이 코앞인데.”
재룡이 못지않게 길드 마스터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피곤했던 하 대표가 넋두리를 하듯 자초지종을 쏟아냈다.
‘재룡이 말처럼 대표 자리에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
하도철의 화려한 인맥과 수많은 길드와의 채굴권 계약이 거저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아 참, 그건 그렇고, 아까 너희들이 오기 전에 이 대표가 이걸 주더구나. 자신이 가고 나면, 태주 너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하면서 말이야.”
이 대표의 부탁이 떠오른 하 대표가 느닷없이 안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