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동아리 (8)
‘으음?’
낯선 음성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태주의 눈앞엔 던전 실습을 함께 수강하고 있는 S급 법사 공슬아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2주에 걸친 수업 내내 별다른 접점이 없던 터라 인사를 건네는 태주의 눈빛에선 의아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안녕.”
자신은 궁수도 아닐뿐더러 먹고 살기 바쁜 마당에 잘나가는 신입생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다며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던 슬아지만, 수업이 거듭될수록 태주에 대한 호기심에 시선을 빼앗기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매사에 시큰둥한, 더구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선후배 관계가 썩 매끄럽지 못한 슬아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는 건 극히 드문 광경이었지만.
“피크닉에 들어온 거 축하해. 뭐, 워낙 당연한 결과라 별로 긴장하진 않았겠지만.”
“아닙니다.”
“아니긴. 첫 번째 레이드부터 공동 1등을 차지했는데.”
슬아가 민주엽이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운도 따랐지만, 무엇보다 선배님들께서 까마득한 후배가 기죽지 않게 후한 점수를 주셔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적대 관계 혹은 경쟁 구도에 있는 박성규와 장세종, 그리고 민주엽을 대할 때와는 달리 이렇다 할 유감이 없는 슬아와의 대화엔 겸손한 태도로 임하는 태주였다.
“글쎄. 취업을 앞둔 4학년들이 과연 너그러운 마음으로만 점수를 줬을까?”
평가 현장에 있었던 슬아는 태주가 받은 25개의 흰색 별이 단순한 격려의 의미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실력으로 따낸 결과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선배 앞이라고 괜히 겸손 떨 거 없어. 때론 지나친 겸손이 더 교만해 보이는 법이니까. 막말로 100퍼센트의 실력을 발휘했던 것도 아니잖아.”
슬아는 주엽과의 진검승부를 앞둔 태주가 모의 던전에서까지 전력을 다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넌 그때 누구한테 흰색 별을 줬어?”
슬아의 입에서 잠시 잊고 있던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다.
“흰색 별이요? 그냥 받을 만한 사람에게 줬습니다.”
본인에게 흰색 별을 준 태주가 자기 추천 사실을 숨긴 채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받을 만한 사람 누구?”
“첫 번째 레이드의 키 플레이어요.”
슬아의 집요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태주는 흰색 별의 정의를 인용하며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끝까지 비밀로 하겠다는 거야?”
“제가 꼭 진실을 말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와아, 역시 평범한 후배님은 아니네. 확실히 민주엽과 붙여 볼 만해.”
태주의 한결같은 단호함에 더 이상의 추궁을 포기한 슬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게임의 규칙을 떠나서 너무 빡빡한 거 아니야? 그것도 흰색 별을 준 사람한테?”
“……?!”
슬아의 깜짝 고백에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투표의 결과를 비밀에 부친 이상 누구든 거짓을 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언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태주의 입장에선 오히려 경계심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날 떠보는 건가?’
물론 심리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태주의 치밀한 대처와 달리 슬아가 태주에게 흰색 별을 준 건 팩트였지만.
“어? 그래도 못 믿는 얼굴이네? 뭐, 좋아. 아직 서로를 신뢰할 만큼의 시간은 없었으니까.”
태주의 의심 어린 눈빛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슬아가 쿨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혹시 검은색 별을 준 네 명의 정체는 알아냈어?”
태주와의 마음을 여는 데 실패한 슬아가 이번엔 좀 더 자극적인 주제로 대화의 집중력을 높였다.
“아니요. 오히려 예상보다 적게 나와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는 예민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태주가 덤덤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긴, 박성규랑 장세종이 포함된 건 확실한데,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심증만 있고, 다른 한 명은 아예 심증조차 없어서.”
미간에 힘을 준 채 용의자를 좁혀보던 슬아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증이 가는 사람이 있다고요?”
“왜. 이제야 좀 신경이 쓰여? 뭐, 내 짐작이 생각보다 놀랍지 않을 수도 있지만.”
태주의 질문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슬아가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죠?”
“왜냐고? 그야 너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인물이니까.”
슬아의 시선이 또 한 번 주엽에게로 향했다.
“설마 이번에도 부정하진 않겠지?”
정황상 합리적인 추측이긴 했지만, 태주가 그랬듯 자신의 선택을 순순히 공개할 주엽은 아니었기 때문에 의심을 한다 한들 의미 없는 눈치 싸움으로 끝날 공산이 컸다.
바로 그때.
“오늘따라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야?”
슬아의 시선을 느낀 주엽이 어느새 다가와 슬쩍 대화에 합류했다.
“네가 태주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순진한 후배들이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잖아 이 욕심쟁이야.”
“뭐?”
주엽의 뼈 있는 농담에 주위를 돌아본 슬아가 황급히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는 2, 3학년 후배들의 어색한 연기를 목격했다.
“아,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서혜린이 얘 팬이래.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슬아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주엽이 태주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혜린과의 비교에 발끈한 슬아가 정색을 하며 받아쳤다.
“괜히 이상형 같은 거 물어보지 말라고. 이상형에 널 끼워 맞추지도 말고.”
“아아, 네가 말한 조기 졸업이 대학이 아니라 인생이었구나? 그치?”
파지직!
순간, 팔짱을 푼 슬아의 오른손에 전격 마법의 시동을 알리는 강력한 스파크가 일었다.
“뭐야, 술잔도 채우기 전에 벌써 취한 거야?”
이에 질세라 단검을 꺼내든 주엽이 예리한 칼날로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또 시작이야? 신입생들 앞에서 쪽팔리게.”
샴페인 병을 들고 나타난 성빈이 주엽과 슬아의 사이로 끼어들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그림이니까 둘이 으르렁댄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 둘 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절대 선은 안 넘으니까.”
이러한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했던 성빈이 때아닌 충돌에 흠칫한 신입생들을 안심시키며 열심히 샴페인 병을 흔들어댔다.
“역시 인기가 많네.”
면접 내내 문지기 역할을 수행했던 A급 궁수 류근석이 슬아의 질문 공세를 피해 슬그머니 자리 옮긴 태주의 곁으로 다가와 새로운 대화 상대를 자처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건 어떤 기분이야?”
물론 근석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엔 태주를 향한 선망과 질투가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녹아들어 있었지만.
“글쎄요. 무슨 대답을 해도 재수 없을 것 같아서 좀 조심스럽네요.”
태주가 근석의 난처한 질문에 말을 아끼며 재치 있게 빠져나갔다.
“그러게. 애초에 질문의 선택이 잘못됐네. 어차피 대답을 들어봤자 공감도 못 했을 텐데…….”
자조 섞인 수긍으로 분위기를 묘하게 만든 근석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
“아 참, 아까 위에서 성빈 선배가 했던 말 기억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는 바람에 내 입지가 애매해졌다는 말.”
근석이 클래스가 같은 직속 선후배 간의 도제 시스템을 설명하던 성빈의 지적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기억납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은 어때?”
매년, 한 명 이상의 S급 신입생을 받다 보니 자신보다 높은 각성 등급을 지닌 후배를 맡게 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성빈과 근석이 우려하던 진짜 문제는 등급의 격차가 아닌 태주의 유일무이한 클래스 그 자체였다.
“너도 나한테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해? 내가 매직 아처가 아니라서?”
첫 질문부터 직설적이었던 근석이 태주의 의견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물론 가르치기 부담스러운 후배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직속 선배로서 피크닉의 전통인 도제 시스템에서 제외되는 것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매직 아처이기 이전에 궁수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당연히 배울 점이 있겠죠.”
배울 점이 있는지는 두고 봐야 했지만, 트레이닝의 유익함을 떠나 졸업하기 전까지 가장 오래 볼, 더구나 유사 클래스를 지닌 2학년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해 좋을 건 없었기 때문에 눈치껏 원하는 대답을 들려준 태주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태주의 의사를 재확인하는 근석의 화법에선 왠지 모를 소심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네. 선배님만 괜찮다면요.”
“그래. 그럼 나중에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선배들이 물어보면 지금처럼 얘기해. 알았지?”
면접을 보러 온 신입생만큼이나 경직되어 있던 근석의 입꼬리가 태주의 승낙에 조금은 유연해졌다.
“네. 꼭 그러겠습니다.”
뻥!
순간, 선의의 거짓말을 한 태주의 속마음을 대변하듯 성빈이 흔들어대던 샴페인의 코르크 마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타이밍 좋게 날아갔다.
“오오!”
회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성빈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샴페인을 대치 상태에 있던 주엽과 슬아에게 번갈아 발사했다.
“이런 미친. 야! 너 거기 딱 기다려.”
그러자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닌 슬아는 샴페인을 가지러 뛰어갔고.
“아라라랄.”
반격을 포기한 주엽은 입으로 들이치는 샴페인으로 가글을 하며 자신을 내려놓았다.
물론 최고급 샴페인이든 소주든 저항 스킬을 보유한 태주의 혀끝엔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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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새벽까지 이어진 거한 뒤풀이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니,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선배와 동기들이 가디언 하우스 밑에 위치한 비밀의 공간 곳곳에 민망한 몰골로 늘어져 있었다.
‘S급이고 뭐고 취하니까 다 똑같네.’
유일하게 멀쩡한 태주가 바닥에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고 주엽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지이잉!
‘아침부터 누구지?’
선배와 동기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매너 모드로 해두었던 태주의 휴대폰에 톡이 하나 도착했다.
[태주야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
발신자의 정체는 태주의 공대원이자 삼강 하베스트의 후계자인 하재룡이었다.
【수업? 오늘은 콘텐츠 제작의 이해 하나라 점심때 쯤 끝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재룡이 단톡방을 이용하지 않고 연락을 취했다는 건 개인적인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 그래? 그럼 오늘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 물론 선약이 있으면 어쩔 수 없고.]
【점심? 그래. 근데 뭐 먹을 건데? 학식? 배달? 아님 학교 앞?】
딱히 해장이 필요 없는 속이라 어떠한 메뉴를 골라도 크게 부대끼진 않았다.
[구내식당.]
【구내식당? 그럼 학식이나 교직원 식당?】
[아니. 우리 회사 구내식당. 원래 삼강이 밥이 잘 나오는 걸로 업계에서 좀 유명하거든.^^]
‘으음?!’
분주하게 움직이던 태주의 양쪽 엄지가 뜻밖의 초대에 그대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