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동아리 (7)
“……?!”
성빈이 입을 열 때마다 놀라는 아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옆 사람을 돌아봤다.
물론 불이 꺼진 탓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을 순 없었지만.
“다른 멤버를 원하면 그대로 의자에 앉고, 아니면, 민대엽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두면 돼. 어때. 간단하지? 아, 참고로 선택은 동시에 이루어질 거야. 물론 의견을 교환하는 건 금지고.”
가디언 하우스의 불을 끈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대화를 제외한 모든 의사소통 수단을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신입생 개개인의 선택에 타인의 의견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동점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니까 한 표라도 더 얻은 쪽의 뜻을 따라 재심사 여부를 결정할 거야.”
“…….”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한 아이들은 이번 제안 역시 동기애를 검증하기 위한 테스트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 셋까지 세고 난 다음 동시에 움직이는 거야. 자, 하나, 둘, 셋, 출발.”
“…….”
성빈의 카운트다운에 움찔거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당탕탕!
앞이 보이지 않아 출입문까지의 거리감도 없었고, 그로 인해 의자를 넘어뜨리거나 옆 사람과 부딪히기도 했지만, 한마음이 된 아이들의 발걸음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턱!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더듬거리며 나아가던 아이들의 손이 벽에 닿았다.
“……?!”
서로에게 어깨를 밀착한 채 출입문을 찾던 아이들의 손이 결국 허리 높이에 있던 손잡이 위로 앞다투어 포개졌다.
덜컥!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계방향으로 손목을 돌리자 굳게 닫혀 있던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열렸다.’
문을 활짝 밀어내자 마당에 켜진 가로등 불빛에 아이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오, 역시.”
빛에 적응하느라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뜬 건우가 비어 있는 의자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희들의 뜻이야?”
성빈이 출입문 앞에 모인 후배들의 단합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끈끈한 동기애를 느낀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신태주.”
“네.”
“이번에도 역시 쪽지에 적힌 문구 때문이야?”
“네. 하지만 쪽지가 없어도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겁니다.”
“왜지?”
“그 의혹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크닉의 선발 과정에 대한 신뢰를 드러냄과 동시에 대엽의 잘못을 감싸는 태주의 현명한 대답에 성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만장일치의 결과가 나왔으니까 재심사는 없었던 거로 할게. 다들 자리로 돌아와서 앉아.”
“네.”
면접 내내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 그럼 이제 내려가 볼까?”
“……?!”
성빈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아이들이 두 눈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계단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텅!
근석이 대엽을 위해 열어둔 출입문을 닫자 내부엔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바로 그때.
덜컹! 위이잉!
“어?!”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바닥이 꺼지는 것을 느낀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변화에 섣부른 예측을 포기했다.
위이잉! 쿵!
수직으로 천천히 하강하던 바닥이 약 15초 후, 단단한 곳에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멈춰 섰다.
‘뭐지?’
태주가 사방에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마력을 감지했다.
물론 다른 공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여전히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오자마자 불을 꺼서 의아했었지?”
“……?!”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던 아이들이 성빈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인생은 종종 터널에 비유되곤 해. 그곳은 길고 어두우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지.”
청각에만 집중하다 보니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했던 성빈의 딱딱했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것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건우.”
“네?!”
잠시 방심하고 있던 건우가 성빈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혹시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네. 예전에 선수 시절에 대진 운이 나쁘거나 경기 중 치명적인 실수를 했을 때 딱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성빈의 물음에 기억을 되짚어보던 건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대진 운과 실수 모두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흘러간 것이란 공통점이 있지.”
성빈이 건우의 경험담에 공감하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인생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해도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고, 키 없는 배처럼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지.”
“네. 그래서 요즘엔 계획을 세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 거 괜히 달성에 대한 부담감만 생기는 것 같아서요.”
고압적이지 않은 대화의 양상에 살짝 긴장의 끈을 놓은 건우가 물어본 적 없는 개인적인 다짐까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그래. 가끔은 그런 마음가짐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수 있지. 물론 그러한 인생관의 밑바탕엔 모든 일을 내 힘으로만 해결해야 한다는 외로운 전제가 깔려 있겠지만.”
“……?!”
건우가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성빈의 예리한 분석에 흠칫 놀랐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어. 특히 수백 대 일의 확률을 뚫고 각성자로 선택받은 이상 더더욱 그렇고.”
레이드의 기초 시간에도 체험했듯 헌터는 늘 몬스터와 빌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길드를 형성하고, 믿을 만한 동료들을 모아 상호 협력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피크닉도 사실 그러한 이유에서 탄생한 거야. 다른 모임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구성원 개개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클래스별 최고의 실력자라는 거?”
피크닉만의 강점을 소개하는 성빈의 목소리에선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물론 너희들도 이젠 피크닉의 일원으로서 그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게 될 거야.”
‘됐다.’
합격을 암시하는 성빈의 발언에 안도한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조용히 기쁨을 표현하던 바로 그때.
“선배들은 너희들이 터널 안을 헤매지 않게 어둠 속에서도 늘 지켜보고 있을 거고. 바로 지금처럼.”
성빈이 불을 끈 채 면접을 진행했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밝히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던 수십 개의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팟! 팟! 팟! 팟!
“크윽.”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사방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불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
그리고 드러난 비밀 공간의 실체.
작다고 느껴졌던 가디언 하우스의 밑엔 피크닉의 전 회원을 동시에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넓은 공간이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물론 인테리어보다 더 놀라운 건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선배들의 틈에 민대엽이 끼어 있다는 것이었지만.
“야, 너.”
자신들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인 선배들을 정신없이 돌아보던 건우가 민대엽을 알아보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안.”
건우와 눈이 마주친 대엽이 형식적인 인사를 생략한 채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뜸 사과부터 건넸다.
“뭐야, 그럼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늦을 것 같다는 말도 다 거짓이었고?”
특혜 의혹을 제기했던 서윤이 면접관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대엽을 향해 따지듯이 물었다.
대엽의 지각이 테스트를 위한 설정일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보다 먼저, 그것도 아무런 검증 없이 비밀의 공간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왠지 모를 배신감에 불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자, 자, 다들 진정하고, 대엽이도 그만 동기들 옆에 가서 앉아.”
“네.”
성빈의 지시를 받은 대엽이 서윤의 싸늘한 시선을 외면한 채 태주의 옆자리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참고로 쪽지가 묶인 화살을 쏜 건 근석이었고, 문자는 우리가 불러준 대로 찍어서 보낸 거야. 물론 대엽이가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불쾌함을 느낀 사람도 있겠지만, 너희들이 부정 선발의 의혹을 받고 있는 대엽이를 기다리지 않았거나, 출입문을 열어두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탈락 결정을 내렸을 거야. 실제로 대엽이를 대체할 후보들도 이미 두 명이나 추려놓은 상태였고.”
지각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된 아이들이 오른쪽 끝자리에 앉아 있던 민대엽을 동시에 돌아봤다.
물론 서윤의 반응과 달리 민대엽이 회귀 전에도 피크닉의 멤버였다는 건 당시에도 동일한 선택이 있었다는 걸 의미했지만.
“다들 고마워. 진심으로.”
동기들의 시선을 느낀 대엽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은 2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마디로 재학생 선배들만 모였지만, 앞으론 학교 안팎에서 졸업한 선배들과의 크고 작은 모임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거야. 물론 참석 자체를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고.”
아버지뻘이 된 선배들과도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안면을 트고 대화를 섞어보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4학년 공슬아처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민대엽처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소극적일 경우 상대적으로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기 어려웠지만.
“자, 그럼 본격적인 축하에 앞서 새로운 멤버가 된 기념으로 피크닉만의 징표를 줄게. 2학년, 위치로.”
“네.”
성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면접에 참여했던 S급 무투가 배현우와 A급 궁수 류근석을 포함한 2학년 멤버 여섯 명이 자신과 클래스가 같은, 다시 말해, 도제식 트레이닝의 제자가 될 직속 후배의 앞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물, 증정.”
성빈의 신호에 맞춰 선배들이 세 가지 색상의 끈으로 엮인 가죽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피크닉만의 징표라는 말에 내심 아티팩트급 선물을 기대했던 아이들이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팔찌를 받아들었다.
“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피크닉의 1대 선배님들께서 동아리 개설 기념으로 직접 디자인하신 작품이니까 외적인 모습보단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역사적인 배경에 집중해줬으면 해.”
물론 자신 또한 그러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성빈은 후배들의 반응에 대한 서운함 없이 그대로 설명을 이어갔지만.
“팔찌를 구성하고 있는 검은색, 흰색, 그리고 빨간색 가죽끈은 각각 어둠과 빛, 그리고 희생을 상징해. 다른 의미에선 선배와 동기, 그리고 후배를 상징하기도 하고. 참고로 그 팔찌를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생길 때가 많으니까 웬만하면 외출할 때도 꼭 착용하고 다녀.”
팔찌에 대해 소개하던 성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주는 명함은 너희들이 살면서 딱 한 번,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치트키야.”
팔찌를 건넸던 2학년 선배들이 이번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바로 퍼스트 에이드?’
검은색 명함의 앞면엔 ㅍㅋㄴ이라는 초성이 빨간색으로 찍혀 있었고, 뒷면엔 고객센터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구성의 전화번호가 하얀색으로 찍혀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중을 위해서 진짜 신중하게 사용해야 돼. 물론 어쭙잖은 요청이면, 그쪽이 알아서 커트하겠지만.”
‘무조건적인 승인은 아니었구나.’
도움의 범위에 대해선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피크닉의 운영 시스템이 생각보다 체계적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으음. 그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하고, 지금부턴 선배님들이 주신 최고급 샴페인을 즐기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도록 할게. 다들 이의 없지?”
- “넵.”
- “와아, 매년 하는 거지만, 숨죽인 채 있는 것도 은근 곤욕이네.”
- “야, 난 비염인데 훌쩍거리면 들킬까 봐 휴지로 틀어막고 있었잖아.”
면접의 종료를 알리는 성빈의 마무리 멘트에 선배들이 입을 열던 바로 그때.
“여기서 또 보네?”
혼란한 틈을 타 다가온 한 선배가 태주의 등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