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동아리 (3)
“퍼스트 에이드(first aid).”
“예? 퍼스트 에이드요? 그거 응급 처치라는 뜻 아닌가요?”
엄 교수의 대답을 들은 희범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대단한 메리트를 기대한 희범으로선 흥미가 반감되는 평범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퍼스트 에이드야 말로 다른 모임에선 찾아볼 수 없는 피크닉만의 독보적인 메리트지.”
반면, 퍼스트 에이드의 정체를 아는 엄 교수의 목소리엔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다른 겁니까?”
단순히 힐을 언급하는 건 아닐 것이라 여긴 희범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물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다는 면에선 크게 다르지 않지만, 피크닉에서 말하는 퍼스트 에이드는 생애 딱 한 번만 쓸 수 있다고 하더군.”
엄 교수가 오른쪽 검지를 꼿꼿이 세우며 비장하게 말했다.
“예? 일 인당 딱 한 번이요?”
동아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야박한 횟수에 희범이 헛웃음을 지었다.
“기회는 단 한 번이지만, 퍼스트 에이드를 발동하는 순간, 피크닉 출신의 선후배 전원이 개입, 인생 최대의 위기를 무조건 벗어나게 해주는 거지.”
희범의 시큰둥한 반응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엄 교수가 태도에 대한 별도의 지적 없이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 “우와, 대박. 업계 최고의 선후배들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무조건 벗어나게 해준대.”
- “완전 인생 치트키네.”
- “게임으로 치면, 남들보다 라이프가 하나 더 있는 셈이지.”
- “그럼 가뜩이나 실력도 출중한데 퍼스트 에이드처럼 믿는 구석까지 있으니까 같은 일을 해도 남들보다 과감하게 치고 나가겠네.”
희범과 달리 퍼스트 에이드의 의미를 알게 된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 “근데 본인들의 출발선 자체가 다르길 원하면, 차라리 실력보다 풍림 길드의 후계자인 임세준처럼 배경을 보고 뽑는 게 더 낫지 않나?”
- “그러게. 아예 모집 기준을 나눠서 일부는 실력으로, 일부는 배경으로 뽑으면,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원도 많아지고, 인맥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이득일 거 같은데.”
“사회적인 배경이야 본인들의 실력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각성 수준과 재능의 격차는 쉽게 좁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학생들의 아쉬운 목소리를 들은 엄 교수가 신입부원의 선발 기준에서 배경이 제외된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을 제시했다.
“뭐야, 그럼 난 어차피 가능성이 제로잖아.”
엄 교수의 대답을 들은 세준의 얼굴엔 실망감이 역력했다.
“근데 인생 최대의 위기이기만 하면, 도박 빚을 왕창 지거나 교도소에 갈 위기에 처해 있어도 무관한 겁니까?”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은 희범이 극단적인 예시를 들며 퍼스트 에이드의 발동 요건을 물었다.
“글쎄. 그런 세부적인 기준은 나중에 태주에게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할 듯싶구나.”
확답을 피한 엄 교수가 피크닉의 멤버가 될 태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동아리 면접일은 언제지?”
“오늘입니다. 저녁 7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크닉에 대한 대화 내내 가장 입이 무거웠던 태주가 엄 교수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면접 장소는 당연히 치유의 숲 안에 있는 가디언 하우스겠군.”
“네. 대신 바로 가는 건 아니고, 치유의 숲 입구에서 나머지 멤버들과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태주가 메시지에 적혀 있던 안내 사항을 떠올리며 말했다.
“누가 멤버인지는 모르고?”
“따로 전달을 받은 건 없습니다.”
멤버의 구성을 이미 알고 있는 태주가 모른 척 메시지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만 대답했다.
“으음. 그래도 4학년 수업을 듣고 있으니 면접관들과는 구면이겠군.”
엄 교수의 말대로 태주는 이미 민주엽과 공슬아 등 피크닉의 4학년 멤버들과 함께 던전 실습을 수강하고 있었다.
“물론 민주엽이 회장이라는 게 오히려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태주가 주엽과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는 엄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이런. 임세준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바람에 수업 시간을 10분이나 잡아먹었군.”
시계를 확인한 엄 교수가 세준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 죄, 죄송합니다.”
엄 교수의 눈빛에 주눅이 든 세준이 수업과 무관한 질문으로 흐름을 끊은 것에 대해 황급히 사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넌 오늘도 10000점 추가다.”
“예?!”
세준이 엄 교수의 농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 지금부터 원하는 발사대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실시.”
세준에게 변명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엄 교수가 단호한 목소리로 곧장 수업을 진행했다.
- “실시!”
“시, 실시.”
억울한 표정의 세준이 복명복창을 하며 뛰어가는 동기들의 뒤를 따라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캠퍼스 안에 조성된 여러 개의 인공 숲들 중 한 곳인 치유의 숲 입구 앞.
면접 시간은 오후 7시였지만, 신입부원으로 선정된 학생들끼리 만나 함께 이동하라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20분 먼저 입구에 도착한 태주였다.
‘어?’
태주가 입구 앞에 심겨진 커다란 나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유리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역시 유리가 1등이네.’
나름 부지런을 떨어본 태주지만, 바른 생활의 표본인 유리는 그보다 10분이나 앞서 도착한 상태였다.
“뭐해.”
“어? 일찍 왔네?”
태주의 인기척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가 태주를 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건 내가 해야 될 소리 아니야? 딱 봐도 30분은 일찍 온 거 같은데.”
태주가 유리와 단둘이 대화를 해본 건 회귀 전후를 통틀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냥 시간이 너무 안 가서 미리 와 있었어.”
‘여전하네.’
누구에게나 한결 같았던 유리의 차별 없는 미소를 마주한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근데 넌 왜 일찍 왔어?”
“그냥. 여기가 제일 조용할 것 같아서.”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쉰 태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제대로 왔네. 사실 네가 오기 전까진 한 사람도 안 지나갔거든.”
유독 외진 곳에 위치한 터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접근성이 좋은 다른 숲을 이용하곤 했다.
물론 그러한 점이 가디언 하우스를 치유의 숲 속에 지은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그나저나 쪼그리고 앉아서 뭐 하고 있었어?”
유리가 앉아 있던 나무 밑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거. 다친 사슴벌레가 있어서 고쳐주고 있었어.”
유리가 바구니처럼 오므린 두 손을 태주에게 내밀며 말했다.
“안 징그러워?”
애완용으로도 인기가 많은 곤충이었지만, 벌레 자체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 태주였다.
“전혀.”
유리가 태주와는 상반된 표정으로 해맑게 대답했다.
“힐러가 천직이네. 아픈 곤충까지 고쳐주고”
자신에게까지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를 또 한 번 실감하게 된 태주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싸우다가 다친 것 같아서 더 마음에 걸렸어. 꼭 우리를 보는 것 같아서.”
유리가 힐을 마친 사슴벌레를 나무의 표면에 조심스럽게 붙여주며 말했다.
“후회돼?”
헌터의 운명을 다친 사슴벌레에 비유한 유리의 말을 예사롭지 않게 들은 태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이 길을 택한 게?”
유리가 갑자기 엄숙해진 분위기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
“아니. 아직은 설레. 이루고 싶은 것도 많고.”
평소엔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힐러가 되는 것이 목표일만큼 성장에 대한 의지가 뚜렷한 아이였다.
물론 태주의 회귀 전, 그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고작 24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조금 이른 질문이긴 하지만, 혹시 생각해둔 길드가 있어?”
유리가 내심 걱정됐던 태주가 회귀 전의 선택을 염두에 둔 질문을 건넸다.
“어. 있어.”
“비밀이야?”
“비밀은 아닌데, 괜히 설레발처럼 보일까 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아레나. 아레나에 가고 싶어.”
본의 아니게 태주의 말을 끊은 유리가 들뜬 목소리로 고백했다.
“……?!”
아레나라는 이름이 유리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한 태주였다.
‘왜 꼭 아레나지?’
아레나가 유리를 4학년 때 스카우트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유리가 신입생 때부터 아레나 길드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아, 미안. 내가 말을 끊었지?”
태주를 당황하게 만든 건 유리가 아레나를 지망한다는 것이었지만, 태주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유리는 말을 끊은 것에 대해서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아니야. 괜찮아. 근데 아레나에 가고 싶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역사가 반복될까 불안했던 태주가 감정을 숨긴 채 덤덤하게 물었다.
“편의상 5대 길드로 묶긴 하지만, 솔직히 아레나가 최고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태주가 마지못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대표님이 피크닉 출신이시래. 피크닉의 전설적인 어쌔신.”
아레나와 이동규 대표에 대해 설명하는 유리의 표정에선 존경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태주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레나의 이동규와 태동 길드의 5차 각성 법사 오승훈, 그리고 SP 길드의 5차 각성 전사인 박윤기는, 다시 말해, 5대 길드의 수장 중 무려 3명은 피크닉 출신의 선배들이었다.
“대표님께서 쓰신 책을 우연히 읽어 봤거든. 특히 S급 던전에 대한 일화가 있었는데, 거기서 작은 로망 같은 게 생겼어.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에서 최고의 헌터들과 함께 최악의 던전을 누비는 최고의 레이드를.”
살짝 목소리가 격양된 유리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두렵지 않아? S급 던전이면 목숨을 잃을 확률도 가장 높은데.”
유리의 위험한 로망을 알게 된 태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그땐 대표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을까?”
자신의 앞날을 모르는 유리가 해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대표님…….”
말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을뿐더러 아레나와의 가계약까진 아직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유리의 선택을 존중하는 척 하기로 마음먹은 태주였다.
“뭐, 같은 길드가 되면, 네가 지켜줄 수도 있고.”
“……?!”
여전히 어색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태주가 친밀감이 느껴지는 유리의 가벼운 농담에 흠칫 놀랐다.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넌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처럼 세계적인 길드에서 활약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태주가 당황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유리가 얼마 전에 있었던 러브콜을 떠올리며 진로를 추천하던 바로 그때.
쉬이익! 딱!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 한 발이 사슴벌레를 놓아줬던 나무에 단단히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