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37화 (137/242)

137. 공성전 (7)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피렐레와 거치는 모든 것을 쪼개버릴 기세로 날아오는 육중한 도끼.

“크흑!”

실드 마법을 시전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찰나의 순간, 질끈 눈을 감아버린 피렐레의 머리 위로 또 다른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나타났다.

챙!

“헉?!”

소리에 놀라 번쩍 눈을 뜬 피렐레가 목격한 건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티마란과 그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도끼였다.

“티, 티마란 씨.”

도끼를 튕겨낸 티마란을 흡사 구원을 얻은 눈빛으로 올려다본 피렐레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변동되었습니다. (80 → 95)

조별 과제에서 나온 첫 번째 협동 플레이.

당사자인 피렐레는 물론 오크가 인간을 구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한 동료들 역시 신성한 충격과 여운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안정』에서 『최상』 단계로 상승하였습니다.

결국 서브 과제2인 의견 조율이 주어진 이후 처음으로 팀워크 지수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 신뢰도와 사기를 바탕으로 한 『팀워크 지수』가 『최상』 단계로 올라가 일정 시간 지속될 경우 조원들의 모든 능력치가 100% 향상됩니다.

‘최상 단계의 효과가 이거였구나.’

분열 단계인 팀워크 지수를 최상 단계로 한 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강제 각성 버프인 마지막 불꽃의 효과가 궁금했던 태주가 동료들의 팀워크 덕분에 의문을 해결하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티마란의 합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피렐레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중히 머리를 조아렸다.

“…….”

하지만 티마란은 피렐레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시선을 빼앗긴 것은 오직 자신이 쳐낸 도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 익숙한 형태의 도끼는 끝끝내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의 것이 분명했다.

“티마란 씨! 저, 저기!”

사제의 지팡이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난 피렐레가 도끼가 날아든 방향을 검지로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도끼의 주인.

“뭐야, 저쪽도 오크잖아? 어이, 피렐레, 여기 인간들만 살던 거 아니었어? 좀 전에 눈알이 날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뭔가 내가 들었던 거랑 완전 딴판인데?”

테테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게요. 이럴 리가 없는데…….”

물론 비테론 출신인 피렐레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달 동안 잠잠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다른 꿍꿍이가 있었군.”

다른 성채를 침략하지 않고 있는 벨지오스의 의도가 궁금했던 보르가넨이 연이은 몬스터들의 등장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티마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왔다는 티마란의 말을 의심 없이 믿고 있던 태주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해명을 요구했다.

“…….”

잠시 생각에 잠긴 티마란이 성문처럼 굳게 닫혀 있던 입을 힘겹게 열었다.

“얼마 전, 벨지오스의 하수인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제안?”

벨지오스와 오크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자신과 힘을 합쳐 인간들을 몰아내자더군.”

“……?!”

티마란이 밝힌 뜻밖의 고백에 원정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벨지오스는 연합의 대가로 막대한 땅을 약속했고, 성채를 빼앗는 과정에서 포획한 인간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설득했지.”

“이런 쓰레기 같은…….”

쿵!

벨지오스가 제안한 내용을 듣고 있던 보르가넨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분개했다.

“오크에게 접근한 걸 보면, 다른 몬스터들의 포섭도 시도했을 게 뻔해. 이거 생각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되겠군.”

벨지오스의 출정이 늦어진 까닭을 명확히 알게 된 보르가넨이 더욱 강력해졌을 군사력에 우려를 표했다.

“피렐레 사제님, 보셨습니까? 제가 이래서 신앙을 중시했던 겁니다.”

한동안 잠잠했던 게르딘마저 신을 섬기지 않는 이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전 그냥 주교님의 뜻이라…….”

티마란에게 마음의 빚을 진 피렐레가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난처한 얼굴로 주교의 핑계를 대며 말끝을 흐렸다.

“그럼 저기 있는 너의 형제가 연합의 결과물인 거야?”

반면, 다른 조원들과 달리 냉정함을 잃지 않은 태주는 조장으로서의 중립성을 잃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 애초에 연합이란 건 없었다. 어리석게도 우린 벨지오스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1차로 합류한 형제들은 저기 보이는 대로 껍데기만 남은 하수인이 돼 버렸지.”

“근데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나한텐 분명 비테론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아니. 그건 사실이다. 다만 형제들과의 연락이 끊기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녀석들까지 돌아오지 못하자 내가 직접 나서게 된 것뿐이지.”

“그럼 형제들의 상태가 저렇다는 건 너도 처음 알았다는 거야?”

“믿기 어렵겠지만, 그렇다.”

“근데 왜 너만 온 거지? 다른 오크들과 같이 왔으면 더 쉽게 벨지오스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확신을 갖기 전에 대군을 움직이는 것도 경솔하지만, 오크의 부대가 비테론 성채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벨지오스의 악행을 떠나 잠재적 위협을 느낀 인간들끼리 힘을 합쳐 역공을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것뿐이다.”

“한마디로 그 확신을 갖기 위해 보내진 마지막 정찰병이 티마란, 바로 너라는 거구나.”

“그래.”

“그럼 빨리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내가 가지고 돌아갈 것은 진실이 아닌 벨지오스의 머리다.”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해진 티마란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도끼를 꺼내며 말했다.

“꼴좋네.”

티마란의 합류에 얽힌 충격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한 테테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야, 테테.”

팀워크 지수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태주가 분열을 조장하지 못하도록 다그쳤지만, 비단 테테만이 느낀 배신감은 아니었기 때문에 티마란을 바라보는 조원들의 눈빛부터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과연 동족의 목을 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못 할 것 같은데 말이야.”

최소한의 신뢰마저 사라진 테테가 또 한 번 티마란을 자극했다.

“지금도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벨지오스 타령만 하고 있지 정작 눈앞에 있는 오크에 대해선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 없잖아.”

“그래서. 듣고 싶은 말이 뭐지?”

테테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히 거슬렸던 티마란이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저 오크의 목을 쳐. 그럼 배신자인지 아닌지 한 번 더 고민해볼 테니까.”

얼핏 듣기엔 동족상잔을 유도하는 잔인한 테스트 같았지만, 암살자로서 같은 인간의 목에 칼을 대며 살아온 테테에겐 피아식별을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변동되었습니다. (95 → 45)

티마란이 배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러한 낙인이 찍힌 것만으로도 팀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와해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에 제아무리 설득에 능한 태주라도 불신이 팽배한 분위기 속, 전례 없는 급락을 막을 순 없었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최상』에서 『적대』 단계로 하락하였습니다.

“티마란, 넌 그냥 다른 녀석들을 맡아. 네 형제, 아니, 형제였던 이들의 마지막은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까.”

팀워크가 바닥을 치기 전에 내분을 멈춰야 했던 태주가 도끼를 쥔 티마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네 말대로 저건 더 이상 내 형제가 아니다.”

태주에게 잡힌 손목을 스르륵 빼낸 티마란이 하수인으로 변한 오크 전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그때.

크아아아!

하수인으로 변한 오크가 오른손을 뻗으며 괴성을 지르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끼가 자석에 이끌리듯 녀석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붕! 붕! 붕! 붕!

“위험해!”

쉬이익!

도끼가 티마란의 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태주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가는 도끼를 향해 화살을 발사했다.

팅!

“……?!”

눈앞에 있는 대상에 집중한 나머지 뒤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인지하지 못한 티마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조심해. 아무래도 흑마법을 사용하는 거 같으니까.”

체이싱 애로우로 도끼를 튕겨낸 태주가 전사에게선 볼 수 없는 상대의 예사롭지 않은 능력에 당부의 말을 전했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티마란이 형제와도 같았던 옛 동료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붕!

도끼가 돌아오기 전까진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놓치지 않은 티마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댕강!

오크의 머리가 제자리를 벗어나자 그의 손을 향해 날아가던 도끼 역시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오, 제법인데?”

짝! 짝! 짝!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테가 얄미운 표정으로 천천히 박수를 쳤다.

물론 동족의 목을 벤 티마란의 귀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

동료의 머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티마란이 채 감기지 못한 오크의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마지막 애도를 표했다.

“시간이 더 필요해?”

타인의 공감이 때론 슬픔의 극복 시기를 늦춘다고 여긴 태주가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아니.”

자리에서 일어난 티마란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오크의 도끼를 챙기며 말했다.

“성주의 알현실까지 앞장서 주겠나? 지금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은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어? 어, 그래.”

티마란의 부탁에 흠칫 놀란 보르가넨이 꼬꼬로와 함께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

*

*

잠시 후.

비테론 성 안으로 들어선 태주와 조원들 모두 한 가지 수상한 점을 느꼈다.

“근데 왜 아무도 없지?”

아이러니하게도 하수인으로 변한 오크를 만난 이후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원정대의 앞길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이거 함정 아니야?”

테테가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의혹을 제기했다.

“설령 함정이라고 해도 성주의 알현실을 확인하기 전까진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렇다고 한 명만 올려 보내기엔 또 습격의 위험이 있고.”

보르가넨의 말대로 지금으로선 함께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바로 저기네!”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발견한 보르가넨이 그 끝에 있는 화려한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드디어…….”

순간, 문 너머에 있을 벨지오스의 모습을 떠올린 티마란이 양손에 든 도끼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자, 숨 고를 것 없이 바로 끝내시죠.”

목적지에 다다른 태주가 길잡이들을 뒤로한 채 선두로 나섰다.

쾅!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간 태주가 정면에 있는 성주의 의자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던 바로 그때.

“잠깐!”

뒤이어 달려온 보르가넨이 태주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