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공성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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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의 예상대로 몬스터에 대한 거부감이 원정대의 결속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심정인지 잘 압니다.”
태주가 형식적인 환영조차 없는 인간계 동료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설득을 시작했다.
“심지어 이들과 함께 나타난 저 역시 인간으로 위장한 몬스터는 아닐까 의심을 하고 계시겠죠.”
“……?!”
태주의 추측에 뜨끔했던 피렐레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 저를 뭐라고 여기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를 비테론으로 모이게 만든 건 벨지오스의 처단이라는 수단의 동일성이지 동족간의 유대감은 아니니까요.”
인간과 몬스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태주가 외적인 조건이 아닌 공통의 관심사를 강조하며 경계심의 허들을 낮추려 했다.
“친구의 복수를 원하는 법사 보르가넨 씨, 비테론 교회의 원수를 갚으려는 피렐레 사제님과 성기사 게르딘 씨, 그리고 비테론 가문의 보물을 노리는 암살자 테테와 죽은 형제들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전사 티마란까지.”
태주가 조원 개개인의 합류 목적을 밝히며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궁극적인 목표에 귀 기울일 여유도,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던 건 오직 벨지오스의 단죄를 통해서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티마란의 등장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려던 동료들이 태주의 이성적인 접근에 하나둘 몬스터의 합류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불신하고, 미워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딱 벨지오스를 잡을 때까지만, 그래서 더는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질 때까지만 서로를 이용해주셨으면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또 나 자신을 위해.”
태주는 전체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거나 힘을 모아 달라 간청하지 않았다.
오직 나.
자칫 이기적인 발상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때론 동료들을 이용해 자신의 실익을 챙기라는 솔직한 조언이 헌신에 대한 부담을 갖는 것보다 더 확실한 동기 부여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 하긴, 보물만 얻을 수 있다면야 누구의 힘을 빌리든 상관없지.”
개인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테테가 팀플레이에선 보기 드문 이례적인 제안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나도 일시적인 연합 정도는 찬성이네. 보아하니 도움이 되면 됐지 민폐를 끼칠 만한 외모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하수인들의 공격성을 몸소 체험한 바 있는 보르가넨이 게르딘과 함께 탱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티마란의 든든한 체격을 실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어어, 성직자로서 타인을 위해 희생을 하진 못할망정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신태주 형제님의 말씀대로 지금은 비테론 교회의 원수를 갚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개인적인 선입견을 떠나 비테론 교회에 피해를 입힌 주체가 오크는 아니었기 때문에 앞선 두 사람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피렐레였다.
“하아. 이거 어쩔 수 없게 됐군.”
암살자에 이은 오크의 등장에 머리가 지끈거린 게르딘이지만, 주교가 걸어준 목걸이와 태주로부터 전해 받은 성검을 내려다보며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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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팀워크 지수의 회복은 곧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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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번 공성전의 핵심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채의 지리에 정통한 두 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고요.”
태주가 비테론 출신인 보르가넨과 피렐레에게 첫 번째 임무를 부여했다.
“보르가넨 씨, 성채의 내부로 통하는 문은 총 몇 개죠?”
“성문은 총 일곱 개네. 다만 정문을 제외하곤 다들 고만고만한 크기지.”
비테론에서의 거주 경험이 가장 풍부한 보르가넨이 태주의 기대에 부응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정문을 제외한 여섯 곳 중 벨지오스가 있을 법한 장소와 최단 경로로 연결될 수 있는 문은 어디입니까?”
“아무래도 성주의 알현실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성채의 중심으로부터 10시 방향으로 치우친 비테론 성의 위치상 북서쪽 문을 통해 진입하는 것이 가장 빠를 걸세.”
비테론 성채의 구조를 떠올려보던 보르가넨이 또 한 번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아아, 북서쪽 문이요.”
보르가넨의 제보에 한 가지 루트를 확보한 태주가 목적지로 향하기 전 다른 대안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테테.”
“왜.”
“혹시 은신을 한 상태로 성벽을 넘어가서 경비병들을 제거한 다음에 성문을 열 수 있겠어?”
태주가 비테론 성채의 높은 성벽과 굳게 닫힌 성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저 정도 높이의 성벽은 나도 무리야.”
테테가 직업적 특성을 고려한 태주의 물음에 난색을 표했다.
“그럼 혹시 교회나 성으로 이어진 땅굴 같은 건 없습니까? 애초에 성벽을 넘을 수 없다면, 밑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발상을 전환한 태주가 이번엔 비테론 출신인 피렐레와 보르가넨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그런 게 있었다면, 주교님께서 돌아가지 않으셨을 겁니다.”
“글쎄. 성주의 도주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나 같은 사람이 알게끔 하진 않았겠지.”
물론 태주의 바람과 달리 두 사람의 답변 모두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순 없었지만.
“꼬꼬로. 일곱 개의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성채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존재하는지 한번 탐색해 봐.”
“꼬꼬로.”
길 찾기 능력을 패시브 스킬로 지닌 꼬꼬로가 태주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의 시간.
“꼬꼬로…….”
경로를 탐색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던 꼬꼬로가 태주를 힘겹게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그럼 일단 북서쪽 문으로 이동하시죠.”
마땅한 차선책을 발견하지 못한 태주가 보르가넨이 일러준 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근데 문을 열 대책은 있는 거야?”
안에서 열지 않는 이상 공성추 등을 이용해 성문을 부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테테가 비테론 원정대의 리더인 태주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대책이랄 게 뭐 있어. 그냥 부숴버리면 되지.”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티마란이 테테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정면 돌파를 주장했다.
“우리가 왔다는 걸 여기저기 알리고 싶어서 그래?”
태주가 티마란의 의욕적인 주먹을 끌어내리며 한심하게 쳐다봤다.
“공성전은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낼 거야. 벨지오스가 하수인들을 불러들일 틈도 없이 아주 은밀하고 신속하게.”
해가 지기 전에 과제를 마무리 짓고 싶었던 태주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
*
*
잠시 후.
북서쪽 문이 보이는 숲속으로 자리를 옮긴 태주와 조원들이 적의 동태를 살피며 잠입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후우. 일반적인 병사들이 아니라 그런지 다행히 경계를 서고 있는 인원은 없네요.”
감시병 하나 없는 썰렁한 망루와 성벽로를 매의 눈으로 둘러보던 피렐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경계 따윈 필요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거나 다른 것으로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반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태주는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자, 그럼 저부터 들어가겠습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없는 점멸을 연속으로 사용, 성문 앞까지 단숨에 이동한 태주가 문턱을 넘기 전, 혹시 모를 마력의 존재부터 빠르게 느껴 보았다.
‘없다.’
성문 너머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 태주가 동료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며 다가오라 손짓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성채 안으로 무혈입성한 태주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거대한 빗장을 푸는 즉시 활을 꺼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끼이익!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채로 어찌나 오래 닫혀 있었는지 숲속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온 동료들이 문을 여는 순간, 경첩에서 시작된 요란한 소음이 비테론의 정적을 깨며 눈치 없이 울려 퍼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무도 못 들었겠죠?”
피렐레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삭이듯이 물었다.
“상대가 들었든 못 들었든 지금부턴 속도전이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세요. 보르가넨 씨, 성주의 알현실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 주세요. 꼬꼬로, 너도 옆에서 지름길로만 갈 수 있게 보조를 맞춰줘.”
“알았네.”
“꼬꼬로.”
조원들의 멘탈을 다잡은 태주가 믿음직한 길잡이들의 안내에 따라 비테론 성으로 향하던 바로 그때.
‘……?!’
불길한 시선을 느낀 태주가 모퉁이에 숨은 채 3분의 1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축구공만 한 눈알을 발견했다.
‘설마.’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본능적으로 화살의 종류를 교체한 태주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자리를 피하려는 눈알 몬스터의 흰자위를 재빨리 조준했다.
쉬이익!
몬스터의 형체는 이미 활시위를 놓는 순간 태주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조준된 목표물을 끝까지 따라가 명중시키는 체이싱 애로우의 특성상 표적의 고정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푹!
입이 없는 탓에 괴성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화살이 관통하는 소리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인가?!”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알 리 없는 보르가넨이 때아닌 선제공격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벨지오스에게 들킨 것 같습니다.”
눈알 몬스터의 정체가 감시병이었을 것이라 추측한 태주가 멀리 보이는 비테론 성을 올려다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 [알림] 팀워크 지수가 변동되었습니다. (85 → 80)
하수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보르가넨이 그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의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 [알림] 팀워크 지수가 『양호』에서 『안정』 단계로 하락하였습니다.
“아니요. 이왕 들킨 거 알아도 막을 수 없다는 걸 보여줘야죠.”
보르가넨의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움켜쥔 태주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용기를 불어넣었다.
바로 그때.
“어?!”
보르가넨의 상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던 피렐레가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드는 거대한 도끼에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붕! 붕! 붕! 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