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공성전 (4)
“그럼 비테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태주가 마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어…….”
무언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듯 입술만 달싹이던 마부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네. 알고 있습니다.”
머뭇거림의 이유를 눈치챈 태주가 상대방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온화한 미소를 보내며 마부를 안심시켰다.
“늑대 인간이 출몰하는 지름길로 가는 게 걱정되는 거죠?”
“예? 아, 예…….”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마부가 겸연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솔직히 저도 저지만, 이놈이 워낙 겁쟁이라 늑대 인간이 나타나면 어디로 튈지 몰라서…….”
마부가 앞으로 불어닥칠 위협을 모른 채 풀만 뜯고 있는 말의 태평한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 전에 있었던 모든 상황을 본의 아니게 지켜봤던 터라 태주의 비범함에 대해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다 보니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크게 와닿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옆에 타고 가도 돼요?”
“예? 마차에 안 타시고요?”
마부가 불편함을 자처하는 태주의 이례적인 요청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흙먼지도 날리고, 자리도 불편할 텐데요. 이 녀석이 실례하는 것도 코앞에서 봐야 하고.”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마차 안에만 있다 보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창문이 있다 해도 밀폐된 공간에선 경계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야 확보의 측면에서도 마부의 옆자리를 택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예. 뭐,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의자 정중앙에 앉아 있던 마부가 왼쪽으로 엉덩이를 붙이며 자리를 양보했다.
*
*
*
잠시 후.
스산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불길한 적막감이 마부의 눈동자를 분주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걱정되세요?”
보다 못한 태주가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부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아니요. 뭐, 그냥……. 이랴!”
불안한 시선 처리를 들킨 마부가 머쓱한 표정으로 애먼 고삐만 내리쳤다.
“근데 먼저 출발했다는 동료분은 아직 안 보이네요?”
위험 지대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마부가 선발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네. 근데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모라 그렇게 열심히 안 찾아보셔도 돼요.”
“아, 그래요?”
선발대의 피부가 초록색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마부가 태주의 힌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때.
아우우우우!
어디서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늑대 인간의 울음소리가 예고도 없이 울려 퍼졌다.
“히익!”
소스라치게 놀란 마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심지어 고삐를 내리치지 않았음에도 말발굽의 박자가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 태주의 귓가에 전해졌다.
마부의 우려대로 늑대 인간이 나타나는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했던 겁쟁이 말이 포식자가 보내는 죽음의 전조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물론 마부와 말 모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진정한 포식자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저씨.”
태주가 말만큼이나 동요하고 있는 마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말이 흥분한다고 해서 아저씨까지 흥분하면 안 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예? 아, 예.”
고개를 끄덕인 마부가 행여나 놓칠까 자신의 손목에 고삐를 한 바퀴씩 휘감았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딱 두 번만 놀라시면 됩니다.”
마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태주가 갑자기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
말릴 틈도 없이 자리를 벗어난 태주의 돌발 행동에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한 마부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위험하게 뭐 하세요!”
아우우우우!
“빨리 내려오…… 히익!”
태주를 설득하려던 마부가 또다시 들려온 늑대 인간의 울음소리에 놀라 다시금 전방을 주시했다.
‘슬슬 몰려오는구나.’
한쪽 무릎을 꿇은 태주가 펫을 소환하려는 의지와 함께 오른쪽 손바닥을 뻗어 자신의 발 앞을 조준했다.
▶ 펫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예스를 선택하자 오른손에 나타난 표식에서 연기처럼 빠져나온 꼬꼬로의 몸이 태주가 지정한 위치에서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꼬꼬로.”
베로닌 성채에 이르렀을 무렵,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다는 판단하에 표식 속에 숨겨 놨던 꼬꼬로가 하트를 뒤집어 놓은 듯한 코를 벌렁거리며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꼬꼬로?!”
물론 소환 직후의 상쾌함도 잠시, 심하게 덜컹거리는 바닥과 마차의 속도만큼이나 세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에 놀라 앞발에 잔뜩 힘을 줬지만.
“오랜만이야.”
꼬꼬로가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은 태주가 송곳니 장식이 빠지지 않게 한 번 더 돌려 넣은 뒤 자초지종을 겸한 작전 브리핑을 시작했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꼬꼬로. 거미 동굴에서 했던 작전 기억나지? 막판에 송곳니 장식이 있던 방까지 거미들을 몰고 갔던 거.”
태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황금 호각을 꼬꼬로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꼬꼬로?!”
상당히 긴박한 타이밍에 소환된 나머지 비명까지 지르며 나타났던 꼬꼬로가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땐 상황을 볼 수 없어서 감으로 부른 건 맞는데, 오늘은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라 그때처럼 아슬아슬하게 회수하진 않을 거야.”
“꼬꼬로?”
태주의 회유를 가만히 듣고 있던 꼬꼬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니까 일단 철벽 스킬로 몸을 보호한 다음에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마차를 쫓아오면 돼. 그때보다 간단하지?”
마차의 후미를 향해 몸을 돌린 태주가 꼬꼬로에게 작전 반경을 보여주고 있던 바로 그때.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 으아악!”
뒤통수에서 들리는 알 수 없는 대화에 슬쩍 뒤를 돌아본 마부가 짧은 꼬랑지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꼬꼬로의 새하얀 엉덩이에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이제 한 번만 더 놀라시면 됩니다.”
마부의 호들갑에 태연하게 반응한 태주가 심상치 않은 마력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차분하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평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정판 과잠을 실전에 착용했다는 정도.
“꼬꼬로. 이 옷 어때? 멋있지?”
“꼬꼬로.”
귀여운 외모와 달리 영악한 꼬꼬로가 사회생활을 하듯 주인의 옷이 아닌 눈치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크아아앙!
사나운 울부짖음과 함께 숲에서 뛰쳐나온 늑대 인간이 손끝에 걸리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로 마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꼬꼬로?!”
거미 몬스터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살벌한 비주얼에 당황한 꼬꼬로가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태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긴장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털끝 하나 다칠 일 없으니까.”
꼬꼬로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태주가 자신이 엄호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첫 번째 늑대 인간을 본보기로 제거했다.
▶ 아이스 애로우[I]를 선택하셨습니다.
태주가 고른 건 늑대 인간의 추격을 단 한 발로 저지할 수 있는 아이스 애로우였다.
물론 숲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파이어 애로우를 사용하는 게 꺼려지기도 했지만, 관통 부위가 얼어붙는 탓에 움직임 자체가 제한되는 아이스 애로우와 달리 체이싱 애로우나 파이어 애로우의 경우 몬스터의 맷집에 따라 화살에 맞은 상태로도 추격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쉬이익! 푹!
오른쪽 어깨에 화살을 맞은 늑대 인간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앙!
그리고 시작된 견딜 수 없는 냉기.
특히, 미약하게나마 추가된 한정판 과잠의 공격력과 치명타 확률 증가 옵션이 기존에 적용된 각종 대미지 증가 버프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타격 지점을 중심으로 시작된 빙결 효과를 더욱 빠르게 확산시켰다.
쿵!
결국 뇌까지 전달된 냉기가 늑대 인간의 경직된 몸을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 늑대 인간(1/30)을 처치하였습니다.
“봐봐. 생긴 것만 저렇지 별거 아니잖아.”
꼬꼬로를 실력으로 안심시킨 태주가 늑대 인간들의 공격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험 하나를 들었다.
▶ 스킬 『도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이제 땅에 내려줄 테니까 뒤에서 뭐가 나타나든 이걸 불 때까진 앞만 보고 달려. 알았지?”
태주가 호각을 바라보는 꼬꼬로의 얼굴을 3초간 응시했다.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크아아앙! 크아아앙!
‘많이도 몰려왔네.’
동료의 죽음을 통해 먹잇감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정보를 학습한 늑대 인간들이 전략적인 대형을 유지한 채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꼬꼬로. 철벽 준비.”
“꼬꼬로!”
태주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꼬꼬로가 비장한 기합 소리와 함께 황금빛을 발산하는 돔 형태의 거대한 방어막을 생성했다.
“좋아. 그럼 뛰어!”
“꼬꼬로!”
태주의 엄호와 철벽 스킬로 자신감을 얻은 꼬꼬로가 출발 신호와 동시에 마차 아래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앙!
순간, 마차의 측면을 양방향에서 공략하기 위해 두 그룹으로 나뉘었던 늑대 인간들이 꼬꼬로가 발산하는 강력한 어그로에 이끌려 하나의 대형으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팅! 팅! 팅! 팅!
꼬꼬로의 속도를 압도하는 늑대 인간들이 송곳니와 손톱으로 끊임없이 방어막을 공격했지만, 철벽이란 이름을 가진 스킬답게 그 어떤 균열이나 흠집도 표면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철벽의 성능은 확인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늑대 인간들의 공격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태주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잠시 후.
▶ 늑대 인간(30/30)을 처치하였습니다.
‘끝났다.’
▶ [독립 과제]를 완료하였습니다.
꼬꼬로의 꽁무니만 쫓던 늑대 인간들을 깔끔하게 섬멸하자 과제의 종료를 알리는 반가운 메시지가 승전보처럼 떠올랐다.
▶ 점수를 산정합니다.
▶ 과제 점수 [A+]
▶ [독립 과제]의 달성으로 획득한 점수는 [조별 과제]의 점수 산정 시 자동으로 반영됩니다.
‘오케이. 에이쁠.’
성적을 확인한 태주가 꼬꼬로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잘했어 꼬꼬로.”
물론 늑대 인간의 제거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철벽으로 무장한 꼬꼬로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별다른 피해 없이 미션의 성공 시점을 앞당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수고했어.”
태주가 손바닥을 뻗는 것만으로는 회수가 불가능한 거리에서 전력 질주를 하고 있는 꼬꼬로를 마차의 지붕 위로 불러들이기 위해 황금 호각을 꺼냈다.
바로 그때.
“어어!”
초반의 우려와 달리 안정적인 운행을 이어가고 있던 마부가 느닷없이 식겁한 소리를 내며 마차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