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헤드헌터
[“국제헌터협회에서는 프로의 자격을 획득한 헌터들 중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활동할 의지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할 기회가 없는 이들을 위해 프리레지스트레이션이란 제도를 운용하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프리레지스트레이션이란 말 그대로 예비 등록이란 뜻이고요.”]
“예비 등록이요?”
[“네. 해외 진출이 확정된 건 아니라 예비라는 표현을 붙인 건데, 쉽게 말해, 자신의 프로필이 국제헌터협회에서 마련한 구인 구직 사이트인 빅 사이닝에 등록되는 거예요. 물론 자국 길드에서도 컨택은 할 수 있지만, 해외 활동의 의지를 엿보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국경을 초월한 모든 길드가 잠재적 파트너로서 해당 헌터의 행보를 지켜보게 되는 거죠.”]
“어? 그럼 컨택을 위한 공개적인 루트가 생기는 거니까 길드의 입장에선 원하는 헌터에게 관심을 드러내기가 더 쉬워지겠네요.”
[“헌터의 입장에서도 파트너십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은 길드의 리스트를 파악하기 수월해지는 거죠.”]
“근데 조금 전에 분명 프로의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학부생인 제가 빅 사이닝에 예비 등록을 할 수 있는 거죠?”
[“원칙엔 늘 예외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예상 질문에 답변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승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국제헌터협회에선 일 년에 두 번, 5월과 11월에 프로의 자격은 없지만, 자신의 경쟁력을 미리 가늠해보고 싶은 예비 헌터들을 대상으로 푸드 체인이란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푸드 체인이면, 먹이 사슬 아닌가요?”
[“네. 푸드 체인엔 총 5개의 레벨이 존재하는데 그중 최상위 레벨이자 포식자라는 의미를 지닌 프레데터 등급을 획득하게 되면, 국제헌터협회로부터 준프로의 자격을 얻게 돼요.”]
“그 말인즉슨, 준프로의 자격만 획득해도 예외적인 등록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네. 다만, 프로가 아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기 때문에 프로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프로이기 때문에 부담해야 하는 의무로부터는 자유로워지는 거죠.”]
“그럼 준프로의 신분상 메리트는 딱히 없는 거네요.”
[“그래서 도전자가 많이 없는 편이에요. 프레데터 등급을 받을 수 있는 확률도 생각보다 희박하고요.”]
“으음. 확률도 확률이지만, 한 번에 붙지 못하면 이미지 타격이 크겠네요.”
[“한 번에 붙으실 거예요. 태주 씨를 향한 이 뜨거운 관심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꼭 그래야만 하고요.”]
태주에게 부담을 줄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세계적인 길드가 준프로 테스트도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한 헌터에게 정성을 쏟을 리 만무했다.
[“참고로 테스트는 스위스에 있는 본부가 아닌 지원자의 국적이 속한 대륙별 지부에서 열리니까 태주 씨는 국제헌터협회의 아시아 지부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응시하시면 돼요.”]
“아아, 네.”
태주가 전문성이 느껴지는 승화의 꼼꼼한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듣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기네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빅 사이닝에 예비 등록을 하면, 길드와 헌터를 연결시켜주는 헤드헌터의 존재 목적 자체가 사라지는 거 아닌가요?”
태주의 말대로 중재자라고 할 수 있는 헤드헌터의 역할을 구인 구직 사이트가 대체할 수 있다면, 굳이 길드가 비싼 수수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승화와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태주 씨가 원하는 게 계약이 아니라면.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헤드헌터로서의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할 수 있는 일종의 세일즈 포인트를 파악하고 있던 승화가 자신 있게 반문했다.
[“태주 씨는 현재 프로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빅 사이닝에 가입할 수 없어요. 설령 예외적으로 가입을 했다 해도 현행법상 프로의 신분이 아닌 각성자와는 그 어떤 길드도 정식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죠. 뭐, 그로 인해 나온 개념이 바로 용돈이고요.”]
“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의 자격을 얻을 때까지만 금전적인 지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졸업하기 전이라도 특정 길드와의 계약이 유력해지는 순간, 경쟁 길드의 관심 목록에서 바로 아웃되겠지만.”
[“네. 그게 바로 태주 씨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자 제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죠.”]
대화를 이어가던 승화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한 곳은 좀 애매하지만, 지금처럼 취업문이 좁아진 레드오션 시장에서 두 곳 이상, 그러니까 자신을 두고 경쟁하는 길드가 여럿 존재하는 경우엔 그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스무 곳 이상의 길드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태주 씨의 잠재력은 가히 무한하다고 볼 수 있고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요. 이건 팩트예요. 솔직히 영리를 추구하는 길드가 아무한테나 돈을 뿌릴 만큼 어리숙하진 않거든요. 투자 대비 효율의 극대화. 비즈니스의 세계에 조건 없는 호의는 없으니까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마찬가지라는 건 무슨 의미죠?”
[“기브 앤 테이크. 기브는 저에게 테이크는 길드로부터. 아, 당연히 태주 씨의 입장에선 테이크의 비율이 더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고요.”]
“기브 앤 테이크라……. 해외 길드에서 받는 용돈의 일부가 수수료로 지급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대화의 진도가 너무 빨라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돈 얘기를 빼놓곤 프로를 논할 수 없거든요.”]
“네.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까 있는 그대로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럼 태주 씨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으니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할게요.”]
아마추어답지 않은 태주의 열린 태도에 자신감을 얻은 승화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본격적인 제안에 들어갔다.
[“우선 전, 태주 씨와 매니지먼트 관계를 형성할 생각이에요.”]
“매니지먼트라면, 길드를 위한 헤드헌터가 아니라 제 매니저 역할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지금으로선 그게 태주 씨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이익은 극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정확히 어떻게 말이죠?”
[“일단 빅 사이닝에 공개될 프로필상의 모든 연락처를 태주 씨가 아닌 제 걸로 등록할 거예요.”]
“으음. 명칭만 매니저로 바뀐 거지 길드와 헌터의 중재자라는 포지션엔 변함이 없는 거네요.”
[“태주 씨께서 이미 국내 길드 스무 곳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국내 길드 스무 곳과 해외 길드 스무 곳을 관리하는 건 차원이 다르거든요. 교섭 언어와 문화는 물론 현지법과 길드의 평판 등에도 정통해야 하고요.”]
“한마디로 전문성이 없으면, 금전적인 약속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말씀이시군요.”
[“태주 씨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학교생활과 병행하기엔 무리가 있겠죠. 더구나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문의 전화 때문에 밤낮으로 시달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헤드헌터라는 본업 때문에 매니지먼트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업무 조율에 있어선 나름의 노하우가 있거든요. 헤드헌터 파트를 분담해 줄 부하 직원들도 있고요.”]
베테랑 헤드헌터인 승화가 자신의 경력과 회사의 협업 시스템을 내세워 태주를 안심시켰다.
“그럼 혹시 국내 길드와 관련된 업무도 맡으실 생각이세요?”
[“아니요. 국내 길드는 지금처럼 태주 씨가 나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 교수가 태주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알 리 없는 승화가 국내 길드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해선 따로 밝히지 않았다.
[“물론 스무 곳이 넘는 길드와 일일이 소통한다는 것이 쉬운 건 아니지만, 제가 봤을 땐, 국내 길드의 오퍼가 현시점에서 더 늘어나긴 어려울 것 같거든요. 오히려 줄면 줄었지.”]
“이미 영입을 위한 경쟁이 심화된 상태라 계약을 기대하고 뛰어드는 후발 주자가 나오긴 어렵다는 뜻이군요.”
[“이미 5대 길드에 대기업까지 참전한 마당에 어떤 배짱 있는 길드가 함부로 베팅을 하겠어요.”]
“근데 베팅이 부담스러운 건 해외 길드도 똑같지 않을까요? 국적을 떠나 스무 곳 이상의 길드가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 오퍼를 넣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아니요. 경쟁이란 범주에선 다를 바가 없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빅 사이닝에 프로필을 등록한 것만으로도 해외 활동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 길드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애초에 활동 무대가 다르기도 하고요.”]
“뭐, 저로선 국내는 국내끼리, 해외는 해외끼리 경쟁 구도를 형성하는 게 가장 베스트이긴 하죠.”
[“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특정 길드와의 계약 논의를 피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동 무대를 정하는 시점 또한 최대한,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미루는 스킬이 필요해요.”]
서로의 니즈를 분명히 파악한 두 사람이 진전 있는 대화로 앞으로의 계획을 솔직하게 의논했다.
[“자꾸 저를 포장하는 것 같지만, 다행히 제가 태주 씨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네. 물론 전화상으로 결정할 수준의 가벼운 계약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종도 교수님의 친구분이시라고 하니 한번 믿음을 가져 보겠습니다.”
[“어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태주와의 구두 계약을 성사시킨 승화가 상냥한 말투와 대비되는 격한 몸짓을 통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했다.
물론 영상 통화였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다소 방정맞은 세리머니였지만.
[“아, 그리고 제가 운영하는 회사는 현재 뉴욕에 있어서 한국엔 헤드헌팅 의뢰가 있을 때만 들어오곤 했는데, 이번에 태주 씨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하게 되면, 아예 사무실 하나를 서울에 오픈할 생각이에요.”]
자신이 태주가 얻은 기회에 편승해 수수료만 노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승화는 매니지먼트 업무에 대한 진심을 라스트 피스의 한국 지사 설립으로 증명할 계획이었다.
[“계약서는 제가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까 시간 날 때 천천히 읽어 보시고, 충분히 고민해 보신 다음에 이 번호로 연락을 주세요. 앞으로 호칭은 편하게 매니저라고 불러주시고요.”]
“네. 매니저님.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감사는요. 제가 더 감사하죠. 이렇게 황금 같은 주말에 기꺼이 시간도 내어 주시고……. 덕분에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겠네요.”]
행여나 계약이 무산될까 조마조마하고 있던 승화가 후련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근데 태주 씨는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아, 신입생이니까 동기들 만나러 나가시나?”]
“아니요. 밀린 과제가 좀 있어서요.”
[“네? 밀린 과제요?”]
“네. 밀린 과제요.”
대답과 동시에 헛웃음을 진 태주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 조별 과제를 이어서 하시겠습니까?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