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개강총회 (2)
박스를 본 태주는 이미 내용물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자, 이 안엔 한국대 헌터학과의 정통성과 28기만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는데요.”
툭!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사회자가 신입생들보다 더 설렌 표정으로 언박싱을 시작했다.
“짜잔! 어때요? 예쁘죠?”
분주한 손놀림으로 박스를 연 사회자가 신입생들을 향해 과잠을 들어 보이며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 “오오, 대박! 진짜 예쁘다.”
- “몸통은 검은색인데, 팔은 흰색이네?”
- “와아, 나도 드디어 과잠이란 걸 입어보는구나.”
- “그러게. 새터 때 선배들만 입고 다녀서 은근히 부러웠는데.”
- “팔에 아예 28기라고 찍혀 있네. 28th.”
- “풉! 번데기 발음 뭐야.”
- “야, 스미스 씨 해 봐 스미스 씨.”
과잠이 공짜는 아니었지만, 대학 생활의 수많은 로망들 중 하나로서 신입생들에게 남다른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비용을 완납한 상태였다.
“자, 그럼 과잠을 지금 나눠줄까요, 아님, 옷에 뭘 흘릴 수도 있으니까 나갈 때 하나씩 나눠주는 거로 할까요?”
- “선배님, 지금 주세요.”
- “네. 과잠을 입고 마시면 술이 더 달달할 것 같습니다.”
- “어차피 술은 쏟아 봤자 저절로 말라요.”
사회자의 질문에 학생들이 즉시 지급받는 쪽으로 입을 모았다.
“좋습니다. 대신 우르르 나오면 정신이 없으니까 자신이 신청한 사이즈가 나오면 조용히 손만 들어주세요. 알겠죠?”
- “넵!”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신입생들이 홍조를 띤 얼굴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어어, 그리고 박스가 사이즈별로 몇 개 더 있으니까 조금 전에 뽑힌 28기 과대랑 부과대가 같이 좀 수고해 주세요.”
“네.”
마주 앉아 건배를 하고 있던 소영과 원무가 사회자의 부탁에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대신 따로 포장된 황금색 박스는 아주 조심히 들고 와주세요.”
“네? 황금색 박스요?”
과대로 선발된 소영이 발걸음을 멈추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황금색 박스요.”
사회자가 소영의 질문에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 덧붙였다.
잠시 후.
“혹시 못 받으신 분 계세요?”
사이즈별 분배를 끝낸 사회자가 과잠을 입고 있는 신입생들을 향해 빈 상자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 “네. 여기 한 명이요.”
- “태주만 없어요.”
인증샷을 찍어 올리느라 정신이 없던 아이들이 검지를 뻗어 동시에 태주를 지목했다.
“아, 그럼 나머지 분들은 다 받으신 거죠?”
- “네!”
- “완전 딱 맞아요.”
- “야, 나랑 사이즈 바꿀 사람?”
- “나도 한 치수 크게 입을 걸 그랬나?”
- “아아, 나 벌써 닭발 국물 묻었어.”
후배들의 종잡을 수 없는 대화를 적당히 걸러 들은 사회자가 다시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네, 알겠습니다. 신태주 후배님?”
“네.”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태주가 사회자의 부름에 즉시 대답했다.
“일단 앞으로 나와 주세요.”
“네.”
태주가 사회자의 곁으로 다가가자 한정판 과잠임을 눈치채고 있던 동기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황금색 박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지금 이 안에 든 게 뭔지 아시죠?”
“으음. 알 것 같습니다.”
“알 것 같다……. 그럼 더 이상 뜸을 들일 이유가 없겠네요.”
한정판 과잠의 증정식을 준비한 사회자가 테이블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오픈 기회를 양보했다.
“자, 직접 한번 열어 보세요.”
“네.”
하수진의 브랜드 네임이 적힌 은색 리본을 정성스럽게 풀어낸 태주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버프형 과잠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 “우와, 개쩐다 진짜.”
- “디테일이 우리 거랑 완전 다른데?”
- “자수의 퀄리티부터가 넘사네.”
- “뭔가 소재도 더 비싼 걸 쓴 거 같아.”
- “야, 근데 더 충격적인 건 뭔지 알아?”
- “뭔데?”
- “우리 건 내돈내산인데, 태주는 저걸 공짜로 받았다는 거.”
- “이야, 진짜 인생은 될놈될이네.”
한정판 과잠의 차원이 다른 퀄리티를 확인한 동기들이 고개를 쭉 내뺀 채 엉덩이를 들썩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새터 때 이미 설명해 드렸듯이 이 과잠은 한국대 의류학과 출신이자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수진 동문님께서 특별히 디자인해주신 리미티드 에디션이자 무려 11개의 버프가 붙어 있는, 심지어 자체 정화 기능에 도난 방지 기능까지 포함된 과잠계의 명품, 과잠 오브 과잠, 한마디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티팩트형 과잠입니다. 한번 입어 보시죠.”
쇼호스트를 연상케 하는 열정적인 제품 소개를 마친 사회자가 태주에게 직접 착용해 볼 것을 권했다.
“네.”
보관용 커버를 벗겨낸 태주가 과잠을 입던 바로 그때.
[한정판 학과 잠바]
- 등급: 희귀
아티팩트형이란 수식어답게 태주의 눈앞에 과잠의 스펙이 떠올랐다.
- 근력 5% 증가
- 공격력 5% 증가
- 치명타 확률 5% 증가
- 체력 회복 속도 15% 증가- 마나 회복 속도 15% 증가
- 포션 효과 15% 증가
‘포션 효과 증가는 또 처음 보네.’
전설 등급 아티팩트에 비해 개별적인 수치는 낮았지만, 꼭 필요한 옵션들만 모아 놓은 종합 선물 세트처럼 다양한 버프들이 태주의 눈을 즐겁게 했다.
- 방어력 20% 증가
- 민첩성 5% 증가
- 지력 5% 증가
- 속성 대미지 15% 감소
- 상태 이상 대미지 15% 감소- 정화 마법 활성화 상태
자체 정화 기능은 미리 부착되어 있었지만, 도난 방지 기능의 경우 소유자를 인식시키는 별도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옵션들과 달리 마지막에 추가될 수밖에 없었다.
▶ 옷에 깃든 능력은 착용 시에만 적용됩니다.
“직접 입어 보니까 어떠세요?”
슬그머니 다가온 사회자가 한정판 과잠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소감을 물었다.
“좋습니다.”
태주가 손바닥으로 과잠의 표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참고로 학과장님의 말씀으론 단순한 옷이 아니라 방어구로 분류된다고 하셨는데, 제작 과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번 작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한정판 과잠은 제작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 “아아.”
순간, 한정판 과잠의 단종 소식을 들은 신입생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보물찾기 때 확보한 나머지 선물들은 학과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으니까 편한 시간에 들러서 받아 가세요.”
“네.”
리더스 배지와 궁수 모임의 와펜을 부착할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있던 태주가 사회자의 안내에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그때.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사회자가 부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학과장이 태주에게 다가가 도난 방지 마법을 시전했다.
“익스클루시브.”
번쩍!
그러자 붉은빛을 발산한 과잠이 혈압측정기처럼 태주의 몸에 맞게 수축되었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제 그 옷은 너만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입어 보는 것까진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과잠을 분실할 경우 소유자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신호로 인해 위치를 탐색할 수 있었다.
[한정판 학과 잠바]
- 도난 방지 마법 활성화 상태
학과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 추가된 옵션이 태주의 시야를 가렸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한정판 과잠의 소유권을 온전히 얻게 된 태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
*
*
다음 날 오전.
동기들과 달리 숙취로부터 자유로운 태주가 이 교수에게 받은 명함 속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라스트 피스의 올리비아 현입니다.”]
고작 두세 번의 연결음 만에 승화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 혹시 신태주 씨?”]
눈치 빠른 승화가, 정확히 얘기하면, 태주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승화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어제부터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목소리를 듣게 됐네요.”]
“어제 학교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바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말로는 학사 일정을 내세웠지만, 실은 한시적 동맹 관계인 최 총장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승화와의 통화를 후순위로 미룬 것이었다.
물론 겸사겸사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해외 길드가 5곳씩 추가될 때마다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제공한다는 약속도 재확인하게 되었지만.
[“아니요. 이렇게 연락을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에요.”]
태주의 계획을 모르는 승화의 입장에선 제안을 거절당할 수도 있는 긴장된 상황이었지만, 일단은 자신의 커리어와 회사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거물급 고객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중이었다.
[“뭐, 마음 같아선 먼저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허락도 없이 번호를 받아 가는 건 태주 씨께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종도, 아니, 이 교수님에겐 따로 연락처를 묻지 않았어요.”]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라뇨. 당연한 걸…….”]
인사는 충분히 나눴다고 여긴 승화가 먼저 일 얘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교수님께는 어디까지 듣고 오셨어요?”]
“그냥 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해외 길드가 몇 군데 있고, 그들로부터 의뢰를 받은 친한 헤드헌터분께서 저와 통화를 원하신다는 정도만 전해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다만, 태주 씨는 지금 태주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다른 유명 헤드헌터 회사에서도 이미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태주 씨와의 접촉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고요.”]
“네. 하지만 전 이미 스무 곳 이상의 국내 길드로부터 관리 아닌 관리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해외 길드와의 접촉이 국내 길드의 지원을 끊는 악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승화의 해결책이 못 미더울 경우를 대비한 역제안 카드도 최 총장과의 논의를 통해 따로 구상해 둔 상태였지만.
[“네. 태주 씨가 현재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에겐 헤드헌팅을 의뢰한 길드만이 아니라 추천 리스트에 포함된 태주 씨 역시 중요한 의뢰인이란 걸 꼭 좀 알아주셨으면 해요.”]
베테랑 헤드헌터인 승화가 공감을 바탕으로 한 당부의 말과 함께 태주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다소 실험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태주 씨 혹시 국제헌터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프리레지스트레이션 제도에 대해 알고 계세요?”]
“아니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승화의 입에서 역제안 카드로 준비해 둔 대안을 듣게 된 태주가 소리 없는 웃음을 띤 채 태연하게 말했다.
[“네. 아직 프로가 아니니 그럴 수밖에요.”]
범상치 않은 자격 요건을 흘린 승화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