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개강총회 (1)
‘왜 그러시지?’
갑작스러운 호출에 의아한 발걸음을 옮긴 태주가 이 교수의 그림자를 쫓아 교직원 전용 통로로 들어섰다.
“오늘 너무 수고했어.”
다른 학생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 교수가 태주의 등에 손을 갖다 대며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역시 퍼포먼스 하나하나가 기대 이상이야. 화려함에 치우치지 않게 기본기에도 충실했고.”
“감사합니다.”
남다른 애정이 묻어나는 이 교수의 마르지 않는 칭찬에 태주가 미소로 화답했다.
“근데 솔직히 주엽이랑 동점이 나올 줄은 진짜 몰랐어.”
“저도 주엽 선배보다 흰색 별이 많이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뭐, 검은색 도형의 개수가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101명 중에 고작 7명만 널 견제했다는 증거니까 10%도 안 되는 속 좁은 선배들은 그냥 가볍게 무시해 버려. 어차피 대세에 큰 영향도 없으니까.”
태주가 주엽을 꺾고 커리큘럼의 자율권을 얻길 원하는 이 교수가 멘탈을 다스리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잘 생각……, 어? 잠깐. 내가 혹시 바쁜데 부른 건가?”
자신의 용건에 몰입한 나머지 태주의 스케줄을 확인하지 못한 이 교수가 아차 싶은 얼굴로 뒤늦게 물었다.
“아니요. 좀 이따 개강총회 빼곤 딱히 없습니다.”
“아, 그래? 난 또 워낙 찾는 사람이 많아서 선약이 있는 줄 알았지.”
“네? 찾는 사람이요?”
별다른 약속이 없던 태주가 이 교수의 말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어. 사실 오늘 수업도 그래서 늦은 거거든. 이렇게 따로 보자고 한 것도 다 그 때문이고.”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간 이 교수가 태주를 부른 이유를 밝혔다.
“아까 교수실로 친구 한 명이 왔었어. 예전에 길드 생활을 같이했던 여자 동기인데, 지금은 헌터 생활을 접고 헤드헌터로 일해. 뭐, 어찌 됐건 둘 다 헌터는 헌터지만.”
“어? 현역에서 일찍 물러나셨네요?”
이종도 교수의 나이가 40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해봤을 땐 상당히 이른 은퇴였다.
“적성 타령을 많이 했었거든. A급 법사에 나름 재능도 있었는데……. 그래도 길드를 박차고 나간 지 10년이 넘었으니까 지금은 완전 베테랑 헤드헌터지. 업계에서도 꽤 유명해. 현승화라고.”
“아, 네.”
손님의 정체는 알게 됐지만, 회귀 전, 유명 헤드헌터의 관리 대상에 든 적이 없던 태주라 이름을 알려줘도 크게 공감이 되진 않았다.
“아무튼 승화가 상대하는 의뢰인들은 거의 영미권 길드인데, 주로 하는 업무 자체가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들을 찾아서 리스트 업한 다음에 매칭까지 시켜주는 거래.”
“얼핏 들어도 만만한 작업은 아닌 것 같네요.”
“일도 일이지만, 특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한가 봐. 국내에선 인재 유출을 조장하는 악덕 브로커라고 욕먹고, 의뢰인에겐 후보자의 허위 스펙 논란과 데드라인 때문에 시달리고.”
“어? 그렇게 힘든데 왜 아직까지 헤드헌팅을 하고 계신 거죠?”
“적성에 맞는대. 매칭을 성공했을 때 느끼는 희열도 있고.”
이 교수 역시 태주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승화에게 들은 답변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리고 아무리 욕을 먹어도 몬스터를 잡고 다녔을 때보단 마음이 편한가 봐.”
“레이드가 진짜 싫으셨나 보네요.”
“뭐, 각성자의 진로에 꼭 헌터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나도 레이드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거고.”
“그럼 교수님께서도 적성 때문에 학교로 오신 겁니까?”
“적성? 글쎄. 난 레이드도 적성에 맞긴 했어.”
3차 각성에 성공한 S급 궁수인 이종도 교수가 엄지와 검지로 브이 자를 만들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번아웃이 안 왔으면 지금쯤 4차 각성까진 찍었을걸?”
“네? 번아웃이요?”
회귀 전엔 미처 몰랐던 지극히 사적인 사연이었다.
“어. 아이러니하게도 최전성기 때 번아웃이 와서 거의 2년 동안 스트레이트로 쉬었거든.”
“의외네요. 교수님들 중에 가장 열정적인 분이시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맞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열정이 문제였던 것 같아.”
대화 내내 태주와 눈을 마주치던 이 교수가 허공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매사에 조급했었거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불만도 늘어났던 거고……. 한마디로, 내가 쏟아부은 열정과 노력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디다고 착각했던 거지. 결국 그 타이밍에 번아웃이 딱! 뭐, 시행착오도 인생의 일부라곤 하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은 기간이었어.”
“그래도 번아웃을 무사히 극복하셨으니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신 게 아닐까요?”
“이야, 같은 말을 해도 참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네.”
이 교수가 태주의 한쪽 어깨를 토닥이며 흐뭇하게 말했다.
“사실 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의 성장을 위한 열정만으로는 번아웃을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어.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찾게 된 거고.”
“그게 교수님에겐 후진 양성이었군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재능들이 모인 한국대 헌터학과의 교수직은 내게 딱 맞는 옷이었거든. 새로운 적성 그 자체.”
과거를 회상하던 이 교수의 어두웠던 낯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큰 기쁨이거든. 내가 널 입시 때부터 눈여겨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날 번아웃에서 구원해 준 대한민국, 아니, 세계 최고의 재능인데.”
태주를 향해 엄지를 치켜든 이 교수가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내며 뜻밖의 감사를 표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승화도 오늘 같은 생각으로 온 건데……. 아, 그리고 이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이 교수가 태주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너한테 전해주라고 아주 신신당부 하더라.”
“저한테요?”
“어. 거기 적힌 올리비아 현이 승화의 활동명이야.”
“라스트 피스? 회사 이름이 마지막 조각이네요?”
명함에 적힌 정보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태주가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승화가 차린 회사인데,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하는 것처럼 의뢰인이 원하는 인재를 반드시 찾아주겠다는 뜻이래.”
“아아, 네.”
태주가 손에 든 명함을 앞뒤로 확인한 뒤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근데 그분이 왜 저한테 명함을 주신 거죠?”
헤드헌터라는 직업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질문에도 순서가 있듯, 처음부터 의뢰인의 정체를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 한국인에게 부탁하면 더 수월하다고 판단했는지 지난주에 뜬 네 기사를 보고 헤드헌팅 의뢰가 쏟아졌었나 봐.”
“지난주에 뜬 기사라면.”
“맞아. 퀸스맨과 캘리포니아 불리스의 러브콜.”
“근데 전 아직 1학년이라 헤드헌팅을 당하기엔 많이 이른 듯싶은데요.”
3가지 인센티브를 조건으로 졸업하기 전까진 길드의 선택을 미루기로 한 최 총장과의 약속이 떠오른 태주가 관리 대상 수준의 유대 관계를 통한 금전적인 지원만 얻는 쪽으로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의도적인 난색을 표했다.
“안 그래도 승화가 이미 의뢰인들을 찾아가서 알아듣게 설명은 했다는데, 다들 졸업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서로 자기들 쪽으로 먼저 연결해 달라고 그랬대.”
“거기가 어디인데요?”
“정확한 얘기는 너랑 만나서 하고 싶다는데, 현재까지 접촉하고 있는 길드만 한 대여섯 군데 정도 되다 봐. 뭐, 더 많을 수도 있고.”
“아아, 그렇게나 많이요?”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해외 길드가 5곳 추가될 때마다 최 총장으로부터 전설 등급의 아티팩트를 받기로 했던 태주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길드의 숫자에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근데 이번엔 기사 한 줄이 안 나네요?”
길드의 선택을 유보하는 것과 더불어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 또한 인센티브를 얻기 위한 태주의 의무 사항이었다.
“혹시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보다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런 걸까요?”
“아니.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승화말로는 영입 경쟁이 너무 치열해질까 봐 다들 쉬쉬하면서 물밑 작업만 진행하는 중이래. 물론 헤드헌터 회사가 라스트 피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태주 너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길드의 숫자가 정확히 몇 군데인지는 본인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
승화의 제안에 대한 이 교수의 속마음이 궁금했던 태주가 잠시 생각에 잠긴 척을 했다.
“왜? 갑자기 비공식 오퍼가 늘어나서 부담스러워?”
“네. 뭐,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보다 교수님의 조언을 먼저 구하고 싶어서요.”
“내 조언?”
“네. 친구분의 부탁이라 말씀은 전해주셨지만, 교수님의 의견은 또 다르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신입생인 태주를 4학년 수업에 넣은 장본인이라 딱히 반대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헤드헌터와 태주를 연결해 준 사실이 드러날 경우 매달 용돈을 지급하면서까지 태주의 영입을 희망하고 있던 다수의 국내 길드로부터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지를 한 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나는 당연히 찬성이지. 그리고 친구라서 도와준 게 아니라 너를 위해 전해준 거야. 더 넓은 무대에서 성장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태주의 예상대로 이 교수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너한테 해가 되는 부탁이었으면, 친구든 가족이든 당연히 내 선에서 커트를 했겠지. 안 그래?”
이 교수가 검지와 중지를 가위처럼 움직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조건부 동맹 관계인 최 총장과는 다른 이 교수의 무한한 신뢰에 태주가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긴.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아 참, 대신 넌 나처럼 번아웃에 빠지면 안 돼. 알았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태주가 이 교수의 뼈 있는 농담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맹세했다.
“그래. 그럼 개강총회 잘 다녀오고, 승화한테는 너 편한 시간에 아무 때나 연락해. 난 어디 좀 들렀다 갈 테니까.”
“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 교수와 한참을 동행하던 태주가 교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먼저 트레이닝 돔의 지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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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에 위치한 대형 주점.
개강총회 및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화합의 자리엔 학과장을 비롯한 일부 교수들과 신입생 전원, 그리고 다양한 학번의 선배들이 한데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자, 자, 교수님과 선배님들을 제외한 신입생들만 다들 주목해 주십쇼.”
새터 때 사회를 맡았던 2학년 학생회 선배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나타나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드디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