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도전자 (4)
▶ 파이어 애로우[F]를 선택하셨습니다.
활시위는 당겨졌고, 화살촉을 달구고 있던 불씨는 기름을 부은 것처럼 눈에 띄게 커졌다.
차징으로 인한 화염 효과의 발동.
지난 시간, 성규에게 씻을 수 없는 흑역사를 남긴 화살이 선배들의 눈앞에 또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어? 저건 그때 봤던 그 불화살 아니야?”
- “오오, 그러네. 군대도 안 가는 박성규의 머리를 자발적으로 밀게 만든 치욕의 화살.”
파이어 애로우를 한눈에 알아본 선배들이 태주에게 빼앗겼던 시선을 잠시 성규에게 양보했다.
“후우…….”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성규가 짧아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성규의 한숨 따위에 꺼지거나 흔들릴 위태로운 불꽃이 아니었지만.
쉬이익! 화르르.
태주의 손끝을 떠난 화살이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키며 고블린들을 향해 날아갔다.
- “오우야.”
태주의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던 선배들이 파이어 애로우가 발산하는 강력한 열기에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 “뭐야, 저게 저 정도 화력이었어?”
- “앞머리가 아니라 박성규를 태울 뻔했네.”
활시위를 당긴 것까지만 봤던 선배들이 상상 그 이상의 시각적 임팩트에 일제히 혀를 내둘렀다.
키엑!
화살의 궤적 안에 있던 고블린들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이건 뭐, 거의 지우개 수준인데?”
- “괜히 4학년 틈에 끼어 있는 게 아니네.”
- “근데 솔직히 4학년만큼 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 4학년까지밖에 없어서 들어온 느낌 아니냐?”
화살은 오래전에 지나갔고, 그 어떤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불길보다 강렬했던 여운만큼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다른 동기들이 놀라움에 그치고 있는 사이,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노여움을 느끼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이런 씨…….’
자신의 주특기인 여론몰이를 통해 태주를 고립시키려 했던 세종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태주의 호감 어린 이미지로 인해 어금니를 깨물었고.
‘내가 너무 성급했나?’
실력을 탐색할 목적으로 몸을 풀라 권했던 주엽은 기회를 준 것에 대한 순간적인 후회를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아, 진짜 한 발로 끝내버렸네?”
속 좁은 선배로 비치고 싶지 않았던 주엽이 태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건넸다.
“자, 자,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수업 시간 전에 나가고 싶으면, 빨리빨리 출발해.”
모의 던전이긴 해도 실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기 때문에 이 교수로선 태주의 성장에 대한 흡족함과는 별개로 학생들의 전진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 “네.”
홍해처럼 갈라져 있던 아이들이 다시금 하나의 세력으로 합쳐졌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네?”
태주에게 다가간 주엽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으며 물었다.
“제가 그랬잖아요. 신입생이 요령을 부리면 안 된다고.”
이번에도 역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이었다.
*
*
*
잠시 후.
“다들 수고했어.”
대기실로 돌아온 이 교수가 모의 던전을 마친 학생들을 칭찬했다.
“으음. 일단, 처음에 설계했던 2시간의 플레이 타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끝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특히, 단 한 명의 사상자나 낙오자 없이 온전한 멤버로 돌아왔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어.”
던전 실습의 경우 변수를 예측할 수 없는 실제 던전에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솔 책임자인 이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퍼포먼스보다 안전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박수나 한번 칠까?”
파이팅 넘치는 성격인 이 교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박수를 유도했다.
- “와아!”
- “수고하셨습니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순간, 100명이 넘는 인원이 내지르는 우렁찬 함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대기실을 들썩이게 했다.
바로 그때.
- “저, 교수님, 결과 나왔습니다.”
뛰다시피 걸어온 조교 한 명이 비밀 평가지의 집계 결과가 든 파일을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어, 그래. 고생했어.”
파일을 펼친 이 교수가 예리한 눈빛으로 결과지를 확인했다.
“아, 참고로 오늘은 모의 테스트라 미리 결과를 알려주는 거야. 그것도 딱 비밀 평가지의 집계까지만.”
글자에서 눈을 뗀 이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는 비밀 평가지의 집계 결과에 심사위원들의 채점 결과를 합산해서 최종 학점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게 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이 교수의 말대로 정확한 성적 산출을 위해선 근거 없는 혹평이나 담합 등의 부정행위를 가려내기 위한 별도의 검증 과정과 오판을 줄이기 위한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야만 했다.
“어디 보자.”
다시 결과지로 눈을 돌린 이 교수가 검지로 줄을 그어 가며 주의 깊게 순위를 확인했다.
“아이고.”
대상을 알 수 없는 이 교수의 감탄사에 학생들의 집중력이 극대화됐다.
- “어? 갑자기 왜 저러시지?”
- “그러게. 뭔가 의외의 결과가 나왔나 본데?”
- “의외의 결과? 혹시 신입생이 상위권에 랭크됐나?”
- “에이, 그건 의외의 결과가 아니지. 막말로 레이드 내내 실수 한 번 안 했는데.”
- “아아, 난 그냥 딱 중간만 갔으면 좋겠다.”
태주를 둘러싼 선배들의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하는 동안 이 교수의 시선은 주엽을 향하고 있었다.
“민주엽.”
“네, 교수님.”
맨 앞줄에 있던 주엽이 이 교수의 부름에 마른침을 삼켰다.
“잘했어. 네가 1등이야.”
“감사합니다.”
이 교수의 알 수 없는 반응으로 인해 잠시나마 불안감에 휩싸였던 주엽이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 “오오, 민주엽.”
- “역시 4학년의 자존심.”
- “뭐야, 이건 의외의 결과가 아니잖아.”
- “그나마 신입생 앞에서 체면은 지켰네.”
태주의 활약을 내심 견제했던 일부 동기들이 주엽의 승리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신태주.”
“네, 교수님.”
주엽과 달리 맨 뒷줄에 서 있던 태주가 오른손을 반쯤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 “어? 신입생은 또 왜 부르시지?”
- “그러게. 혹시 등수 때문에 실망할까 봐 그러시나?”
- “글쎄. 내가 봤을 땐 그렇게 심각한 등수는 아닐 것 같은데…….”
화제의 중심에 있는 만큼 평범한 부름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들이었다.
바로 그때.
“공동 1등 축하해.”
- “……?!”
이 교수의 깜짝 발표에 놀란 아이들이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가 있는 곳을 돌아봤다.
- “헐, 대박.”
- “뭐야, 공동 1등이라고?!”
- “아니, 누가 저렇게 많이 찍어줬지?”
- “많이 찍어준 게 아니라 잘했으니까 찍어줬겠지.”
마치 파이어 애로우를 발사할 때처럼 태주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선배들이 하나둘 옆으로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결국 이 교수와 일직선으로 마주 보게 된 태주가 절제된 기쁨을 드러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감사는 내가 아니라 옆에 있는 선배들에게 해야지.”
이 교수가 태주의 양옆으로 늘어선 선배들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텃세 아닌 텃세로 편파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너희들이 날 선입견에 사로잡힌 소심한 교수로 만들어줘서 너무나도 고맙다.”
실력에 근거한 솔직한 평가를 내려준 4학년들의 공정함에 경의를 표한 이 교수가 겸연쩍게 웃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교수와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던 태주가 두 그룹으로 나뉜 선배들을 향해 한 번씩 인사를 올렸다.
- “뭐지? 불화살이 지나갔을 때보다 더 훈훈한데?”
- “나도 태주한테 흰색 별을 주긴 했어. 까마득한 후배지만, 같은 궁수로서 배울 점도 있었고.”
- “야, 이거 익명 평가인데 그렇게 막 오픈해도 돼?”
- “근데 주엽이는 좀 아깝겠다. 그치?”
- “뭐, 우리가 걱정할 대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해선 단독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주엽이라 나름 충격이 있을 것 같긴 해.”
- “그나저나 교수님께서 우릴 아주 쪼잔한 선배들로 생각하셨네.”
- “장세종이나 박성규 같은 애들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 “야, 장세종도 그렇지만, 특히 박성규 표정이 아주 썩었는데?”
- “당연하지. 누구의 이름을 검은색 별에 적었을지 안 봐도 뻔한데.”
- “다음 시간엔 아예 삭발을 하고 오는 거 아니야?”
세 치 혀만큼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아이들의 오지랖 넓은 시선들.
“…….”
태주의 승전보와 동기들의 비난이라는 최악의 이중창을 듣게 된 세종과 성규가 한쪽 눈살을 찌푸린 채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 “저, 교수님, 근데 공동 1등이란 결과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겁니까?”
태주에게 주제넘은 조언을 하려 했던 7번 선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번쩍 손을 들었다.
“야, 넌 네 점수도 아닌데 그게 왜 궁금해?”
산정 결과에 의혹을 제기하는 듯한 공격적인 말투에 이 교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물론 감점을 당할 만한 실수가 없었던 태주의 입장에선 비밀 평가지에 적힌 검은색 별의 개수가 안티들의 숫자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였지만.
- “그냥 도형의 배점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요.”
“배점? 배점은 단순해. 문제는 원점수를 여러 가지 가중치와 공식에 따라 50%의 비율에 맞게 환산하는 작업이지.”
정확한 점수 산출 방식에 대해선 말을 아낀 이 교수가 태주와 주엽을 향한 동기들의 표심을 여과 없이 공개했다.
“어어, 일단 각각의 도형이 나올 수 있는 최대치가 101개인 건 다들 알고 있지?”
- “네.”
이 교수의 물음에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일단 흰색 별은 주엽이가 22개, 태주가 25개, 흰색 동그라미는 두 사람 모두 20개, 검은색 동그라미는 주엽이가 0개, 태주가 3개, 마지막으로 검은색 별은 주엽이가 1개, 태주가 4개를 받았어.”
- “……?!”
세부적인 집계 결과를 들은 아이들이 두 사람을 동점자로 만든 뜻밖의 분포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뭐야, 정작 흰색 별은 신입생이 더 많았네?”
- “오오, 이게 진짜 반전인데?”
- “어? 그래서 교수님이 ‘아이고’라고 하신 건가?”
- “흰색 동그라미는 동점이니까 논외로 치면, 결국 검은색 도형들 때문에 점수를 따라 잡힌 거네.”
- “와아, 진짜 아깝다.”
- “근데 인간적으로 검은색 별 네 개는 좀 아니지 않냐?”
- “그러게. 두 개까지는 누가 준 건지 확실히 알겠는데, 나머지 두 개랑 검은색 동그라미 3개의 출처는 진짜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삼자인 선배들이 당사자인 태주보다 더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자, 이제 됐지?”
발표를 마친 이 교수가 채점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시간 관계상 나머지 인원의 점수는 게시판에 올려둘 테니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 “네!”
- “수고하셨습니다!”
- “오케이, 이번 주 수업 끝!”
태주의 점수에 몰입하고 있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표정으로 대기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바로 그때.
“아, 그리고 태주는 나랑 잠깐 얘기 좀 할까?”
이 교수가 교직원 전용 통로를 검지로 가리키며 눈짓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