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도전자 (3)
- “이거 하나씩 받아 가세요.”
입구 쪽에서 대기 중이던 조교들이 카트 위에 놓인 물건들을 학생들에게 차례대로 나눠주었다.
고글, 스티커 2장, 볼펜, 그리고 비밀 평가지.
스티커는 마라톤 선수들이 옷의 앞뒤로 붙이는 것처럼 커다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테스트 중엔 이름보다 번호로 실수 여부를 체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태주가 받아든 번호는 4.
랜덤하게 주어진 의미 없는 숫자였지만,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녀석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 “어? 번호가 좀 찝찝한데?”
이름 모를 선배 한 명이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건 또.’
태주의 시선이 녀석의 손에 들린 스티커의 번호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7번.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은 태주가 무슨 위안을 삼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선배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전했다.
“선배님은 행운의 숫자를 받으셨네요.”
- “어. 나는 축구할 때도 등번호가 7번이거든.”
“아, 네.”
딱히 해줄 말이 없었던 태주가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나저나 이제 곧 실제 던전에 들어가야 되는데 떨리지 않아?”
“글쎄요. 아직 실감이 안 나서.”
이번에도 역시 속마음을 숨긴 채 적당히 맞장구만 쳐줬다.
- “사실 난 작년에 이미 들어가 봤거든. 풍림에서 겨울 인턴십 할 때. 알지? 대한민국 5대 길드. 나 거기서 용돈도 받아. 매달 40만 원씩. 아 참, 너도 이미 받고 있나?”
태주가 회귀자임을 모르는 7번 선배가 자랑하듯이 떠들어댔다.
물론 태주가 풍림으로부터 매달 200만 원씩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밝히지 않았겠지만.
- “뭐, E급 게이트라 딱히 위험한 건 없었는데, 그래도 진짜 몬스터라 그런지 뭔가 다르긴 다르더라.”
“아, 네.”
- “뭐야, 어떻게 다른지 안 궁금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려 했던 7번 선배가 태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때.
“아니,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뒤에서 나타난 민주엽이 태주와 7번의 사이로 슬그머니 끼어들며 말했다.
“모르는 선배가 자꾸 말 시켜서 짜증 나지?”
태주에게 어깨동무를 한 주엽이 남은 팔로 7번을 밀어내며 물었다.
- “야, 난 그냥 신입생이 긴장할 것 같아서 몇 마디 해준 것뿐이야.”
한순간에 꼰대로 몰린 7번이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순수한 의도를 피력했다.
“긴장?”
태주의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갖다 댄 주엽이 이번엔 7번에게 다가가 심장 박동 차이를 느껴봤다.
“긴장은 네가 더 하고 있는 거 같은데?”
- “뭐, 뭐?!”
주엽의 장난에 당황한 7번이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태주의 평온한 얼굴을 힐끗거렸다.
“야, 더 망신당하기 전에 가서 스티커나 붙여.”
- “야, 너 진짜 후배 보는 앞에서 쪽팔리게.”
민망함에 귀까지 벌게진 7번이 결국 진짜 몬스터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지 못한 채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스티커 붙여 줄까?”
태주의 대화 상대를 꿰찬 주엽이 손에 든 스티커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네. 그럼 선배 것도 주세요.”
“그래.”
발걸음을 멈춘 두 사람이 물물 교환을 하듯 등에 붙일 스티커 한 장씩을 주고받았다.
“내가 먼저 붙여 줄게.”
태주의 등 뒤로 이동한 주엽이 스티커를 떼며 말했다.
“오늘 흰색 별은 몇 개나 받을 것 같아?”
“흰색 별이요? 검은색 별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죠.”
과도한 자신감으로 경쟁자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태주가 주엽의 유도 질문에 겸손하게 답했다.
“그래? 그럼 난 흰색 별을 몇 개나 받을 것 같아?”
태주의 스티커를 단단히 부착시킨 주엽이 자신의 등을 내어주며 물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실전 테스트 때보단 적게 나오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태주의 대답을 들은 주엽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선배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단 한 번의 평가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만큼 학점에 영향을 주지 않는 모의 던전엔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 붙였습니다.”
등에 붙인 스티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태주가 주엽의 곁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그럼 너도 적당히 할 거야?”
“아니요.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왜지? 네 말대로 실전 테스트도 아니잖아.”
“신입생이 요령을 부리면 안 되잖아요.”
“거짓말.”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자, 아직 준비 안 된 사람?”
채점 파일을 든 이 교수가 학생들을 마주 보며 물었다.
- “없습니다.”
고글 착용까지 모두 마친 학생들이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에 연습하던 모의 던전에 비해 난이도가 낮은 것도 있었지만, 태주의 추측대로 실전이 아니라는 점이 테스트에 임하는 태도 자체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테스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마지막 브리핑을 하도록 하겠다.”
평소엔 통제실에 설치된 화면으로 학생들의 레이드 과정을 지켜봤지만, 던전 실습만큼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특수 고글을 낀 채 현장감 넘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물론 별도의 프로그래밍을 통해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입장한 교수와 조교들의 경우 학생들과 달리 몬스터의 공격 대상에서 제외될 뿐만 아니라 체력 게이지 자체가 없어 대미지를 입을 일도 없었지만.
“일단, 던전의 길이가 꼭 난이도와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실제 테스트에서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는 보스를 잡고 나올 때까지 알 수 없어.”
이 교수의 말대로 E급 던전이 꼭 D급 던전보다 짧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론 E급 던전의 평균 귀환 시간인 2시간을 기준으로 모의 던전의 이동 거리를 조정하게 될 거야. 오늘도 역시 그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테스트를 준비해 둔 상태고.”
귀환 시간이 2시간이라고 해도 단순히 가는 데 1시간, 오는 데 1시간으로 균등하게 계산할 순 없었다.
상식적으로 같은 거리라도 몬스터를 상대하며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던전 끝에서 게이트로 돌아오는 시간보다 최소 2배 이상은 소요됐기 때문이다.
“지금 혹시 화장실 가고 사람?”
- “없습니다.”
이 교수의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이 대답과 동시에 피식거렸다.
“어? 왜 웃지?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설마 소요 시간이 2시간밖에 안 돼서 그래?”
이 교수가 학생들의 경솔한 반응에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실제 던전은 휴게소 없는 고속도로야. 물론 극도의 공포심으로 인해 갔다 와도 지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내 경험상 레이드와 같이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황에선 생리현상에 신경을 빼앗기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게 돼.”
- “…….”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 교수의 진지한 조언에 학생들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화장실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야.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레이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들을 스스로 찾고 제거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의 컨디션을 객관적으로 체크할 수 있는 예민함을 기르라는 뜻이지.”
핑계는 연습 중에나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교수가 모의 테스트에 앞서, 풀어질 대로 풀어진 학생들의 마음가짐을 실전에 적합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자, 그럼 브리핑은 이 정도로 하고, 고글의 전원이 켜지면 바로 출발해. 조교들도 수고 좀 해주고.”
- “네.”
학생들의 대답 소리가 모의 던전 안을 울리자 레이드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 문구가 각자의 눈앞에 떠올랐다.
[증강현실이 구현됩니다.]
[피해가 누적되면 테스트가 중단됩니다.]
‘첫 판이라고 다들 탐색전이네.’
이 교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의 평가에 민감해진 대부분의 학생들은 별다른 대형 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좁은 보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러면 바로 감점인데.’
물론 득점이 아닌 감점 요인에 주목하고 있던 태주는 클래스별 포지션에 위치한 상태로 경계 자세를 유지해야 점수 또한 유지된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활과 장갑을 꺼내든 태주가 궁수에게 적합한 자리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눈빛은 진지하게, 시선은 전방을.
활은 45도 아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공격 태세로 전환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손가락 세 개를 활시위에 살짝 걸어두었다.
스슥. 슥슥.
태주의 예상대로 레이드 시작과 동시에 볼펜을 쥐고 있는 조교들의 손놀림이 눈에 띄게 바빠졌다.
바로 그때.
키엑!
창을 든 고블린 한 마리가 101명의 예비 헌터들을 패기 있게 막아섰다.
- “어? 고블린이다.”
- “아이고 무서워라.”
- “야, 누가 먼저 잡을래?”
- “그냥 아무나 잡아.”
첫 번째 몬스터의 정체에 코웃음을 친 학생들이 성에 안 찬다는 표정으로 서로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검을 들지 않는 전사, 입을 굳게 다문 법사, 활시위를 당기지 않는 궁수,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힐러, 느긋한 어쌔신, 주먹을 쥐지 않은 무투가.
본인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교수와 조교들의 눈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감점 사유였다.
스슥. 슥슥.
또다시 분주해진 심사위원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실전에서도 이렇게 떠넘길 거야?”
태주와 마찬가지로 감점법의 채점 포인트를 알고 있는 주엽이 평가자들의 귀를 의식한 멘트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샥!
눈보다 빠른 발과 발보다 빠른 공속.
키엑!
주엽의 단검이 바람을 가르자 괴성을 그친 고블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쁘진 않네.’
전력을 다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목격한 주엽의 레이드 장면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봤지?”
뒤를 돌아본 주엽이 후방으로 빠져 있던 태주를 응시하며 말했다.
- “…….”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아이들이 주엽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알아서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선배들이 있다고 위축될 거 없으니까 다른 궁수들한테 양보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한 것처럼 그냥 보이는 족족
때려잡아. 혹시 뭐라고 하는 애가 있으면 나한테 바로 얘기하고.”
제삼자의 눈엔 긴장한 후배를 챙기는 선배의 훈훈한 모습으로 비쳤지만, 실상은 이미지 관리의 목적 이외에 태주의 활 솜씨를 확인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려였다.
키엑!
주엽의 바람과 달리 태주의 대답보다 먼저 들린 건 죽은 동료의 비명을 듣고 나타난 고블린들의 괴성이었다.
“마침 잘됐네.”
고블린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주엽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며 태주의 시야를 열어 주었다.
“한 세 발 정도 쏘면 몸이 풀리나?”
주엽이 갖가지 무기들로 무장한 고블린 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대답을 마친 태주가 활을 세우자 경쟁자들은 물론 심사위원들의 이목까지 단숨에 집중됐다.
“한 발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