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공대원 모임 (1)
- “…….”
질문을 한 건 소영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아이들 역시 태주의 대답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별로.”
호의적인 미소와 달리 태주가 내뱉은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과대의 경우 권리보단 의무가, 권한보단 책임이 더 많이 따르는, 좋게 말하면, 희생과 봉사를 바탕으로 한 동기들의 일꾼이지만, 자칫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한순간에 욕받이 신세로 전락, 선배와 동기 모두로부터 질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왜? 하면 잘할 것 같은데. 아마 동기들이 좋아해서 나오면 바로 뽑힐걸?”
소영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앞서 정웅이 추측한 대로 태주에 대한 대외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 대부분의 시간을 교내 업무에 할애한다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다.
- “그래. 우리가 뽑아줄 테니까 한 번 해 봐.”
- “네가 되면 동기들의 의견을 수렴하거나 수요 조사 같은 걸 할 때도 굉장히 협조적일걸? 당연히 읽씹들도 안 할 거고.”
주위에 있던 동기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며 바람을 넣었지만, 그깟 부추김에 들뜨거나 흔들릴 태주가 아니었다.
“난 진짜 됐으니까 차라리 소영이, 네가 한번 나가 봐.”
직업 탐구 시간에 맡은 클래스 리더 자리만으로도 충분했던 태주가 질문자인 소영에게 오히려 과대표 출마를 권했다.
“내가?”
뜻밖의 제안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소영이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물론 소영의 반응과 달리 회귀 전, 1학년 과대에는 야무진 성격의 소영이, 부과대에는 소영이를 가장 잘 서포트해 줄 수 있는 위치인 원무가 각각 뽑혔었지만.
“에이, 내가 무슨…….”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 소영이 태주의 제안에 실소를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가 보기엔 똑 부러지게 잘 할 것 같은데?”
“으음. 진짜?”
처음엔 사양하는 듯했던 소영이 태주의 칭찬에 못 이기는 척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내가 그랬잖아. 태주는 왠지 느낌상 안 할 것 같다고.”
어느새 나타난 원무가 소영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태주 말대로 네가 한번 나가 봐. 너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었다며.”
“야, 이 타이밍에 그 얘길 왜 해.”
때 아닌 이력 공개에 민망해진 소영이 이번엔 원무의 무릎이 아닌 복부를 찰싹이며 나무랐다.
“뭐, 어때. 어차피 입후보 과정에서 다 알게 될 건데.”
옷 안으로 손을 넣어 후끈해진 배를 문지르던 원무가 짓궂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다. 이참에 추억도 쌓을 겸 나랑 같이 나갈래? 나도 학생회장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반장은 몇 번 했었거든. 물론 그 커리어가 초등학교 때 끊겼지만.”
먹빵여신인 지수를 따라 햄최몇 영상을 찍었듯 결과의 호불호를 떠나 도전 정신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원무가 이번에도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근데 우리가 나간다고 될까?”
원무의 거듭된 권유에 살짝 마음이 흔들린 소영이 태주를 비롯한 동기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기실음 관두등가.”
“뭐?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남친의 냉소적인 대답을 들은 소영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원무를 쏘아봤다.
“아니. 하기실음(河己失音) 관두등가(官頭登可) 몰라? 물 흐르듯 소리 없이 노력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인데.”
“그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소영이 원무의 농담에 정색을 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손을 치워냈다.
“신박한 개소리가 아니라, 지금은 딱히 가망이 없어 보여도 묵묵히 노력하다 보면, 우리도 과대랑 부과대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원무가 소영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어깨동무를 시도했다.
“게다가 우리가 되면, 과대 업무를 핑계로 연락도 더 자주할 수 있고, 같이 붙어 다닐 기회도 훨씬 많아질 거 아니야. 아, 그리고 과대가 되면 장학금도 준대.”
“으음. 그럼 그럴까?”
소영이 결국 소극적으로나마 출마의 의지를 밝혔다.
물론 소영이 원무와의 추억과 과대 장학금 중 무엇에 흔들린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
*
*
잠시 후.
첫 번째 수업과 달리 3시간을 빠듯하게 사용한 함 교수가 탈락자 대기실에 나타나 학생들을 마주했다.
“배신을 당해본 소감은?”
- “…….”
함 교수의 질문에 잠시 옆 사람을 쳐다보던 아이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 “역시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 “아는 얼굴에게 뒤통수를 맞으니 더 얼얼했습니다.”
- “앞으로는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야 될 것 같습니다.”
- “실제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니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헌터로 지목됐던 아이들이 억울함과 분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다행이네. 제대로 느껴줘서.”
피해자들의 반응이 자신의 의도에 부합했다는 것을 확인한 함 교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너.”
함 교수가 맨 앞줄에 있던 세준을 턱 끝으로 지목했다.
“예, 교수님.”
“라이브의 뜻이 뭐지?”
“예? 라이브요?”
함 교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흠칫했던 세준이 그나마 아는 단어임에 안도하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어, 일단 ‘살아 있는’이라는 의미가 대표적이긴 한데, 그밖에 ‘생방송의’ 혹은 ‘생중계의’라는 뜻으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 라이브의 의미만 봐도 인생은 리허설이 없는 실전 그 자체야. 후회할 순 있어도 돌이킬 순 없지.”
함 교수가 왼손을 들어 신호를 주자 수업 내내 꺼져 있던 대기실의 화면이 켜지면서 테스트의 결과가 공개됐다.
[생존 현황 및 사망 사유]
- “야, 떴다.”
- “어? 사망 사유까지 알려주네?”
참가자들끼리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한 상태였지만, 통제실에서 집계한 것만큼 정확할 순 없었기 때문에 상황 파악 여부를 떠나 눈길을 사로잡긴 충분했다.
[헌터]
- 총원: 40명
- 생존자: 1명
- 사망자: 39명
┗ 몬스터: 21명
┗ 빌런: 18명
빌런과 헌터의 숫자를 5 대 5로 맞춘 상태에서 6조처럼 빌런으로 돌변한 케이스까지 발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헌터의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 “우와, 생존자 한 명 강렬하네. 뭐랄까. 뭔가 교수님을 상대로 1인 시위를 하는 느낌?”
- “어? 나는 시위보다 수학 선생님이 낸 100점 방지용 문제를 검산도 없이 암산으로 풀어버리는 얄미운 전교 1등 같던데.”
- “와아, 수학 선생님이라고 하니까 느낌이 확 오는데? 진짜 생각만 해도 열 받겠다.”
- “역시 교수님께서 신경 쓰실 만해.”
태주의 객관적인 실력이 워낙 독보적이고도 압도적이다 보니 두 번째 수업 만에 함 교수의 마음을 이해하는 학생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 “그나저나 저 39명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니…….”
- “거의 절반 가까이는 빌런한테 죽었네.”
- “그러게. 빌런만 아니었으면, 그래도 전체 인원의 50% 정도는 살았을 텐데.”
탈락자 대기실의 분위기가 술렁이고 있는 사이, 빌런들의 기습 성과가 화면상에 게시됐다.
[빌런]
- 총원: 60명
- 생존자: 27명
- 사망자: 33명
┗ 몬스터: 20명
┗ 헌터: 12명
┗ 자살: 1명
- “근데 헌터만큼은 아니지만, 빌런들도 생각보다 많이 죽었는데?”
- “야, 근데 신기한 게 몬스터한테 죽은 비율만 따져보면, 100명 중에 41명, 그러니까 교수님이 말씀하신 최대 사망률 60%랑 거의 엇비슷하게 나왔어.”
- “어? 그러네. 뭐, 6조의 난이도만 높이지 않으셨으면, 60% 이하로도 나왔겠지만.”
- “뭐야, 헌터한테 당한 12명 중에 태주가 제거한 빌런만 9명인 거야?”
- “아니지. 재룡이는 자살로 분류됐으니까 8명이 되는 거지.”
- “어? 근데 재룡이 택한 건 자살보다 태주에 대한 리스펙트에 더 가깝지 않나? 예를 들면, 승복에 의한 기권, 뭐 이런 식으로.”
- “하긴, 저건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
헌터들은 태주의 생존을, 빌런들은 재룡의 죽음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던 바로 그때.
“주목.”
결과 확인의 시간을 허락했던 함 교수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 “…….”
섀도 오브 데스 이후 함 교수의 지시에 대한 반응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 학생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하던 일을 멈췄다.
“100명 중 72명 사망……. 실전이었으면, 아주 볼 만했겠네.”
함 교수가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수업 전으로 돌아가 결과를 바꿀 순 없어.”
- “…….”
순간, 함 교수의 가정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 학생들의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현재는 우리의 몫이지만, 과거와 미래는 신의 고유 영역이거든. 뭐, 가끔 순리를 거스른 것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긴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함 교수가 태주가 있는 곳을 힐끗 쳐다봤다.
물론 태주가 회귀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니 던전 앞에 모의가 붙든 현실 앞에 증강이 붙든 그냥 매 순간을 실전이라고 생각해. 단 한 번뿐인 죽음에 익숙함 따윈 없으니까.”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를 마친 함 교수가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대형 시계를 확인했다.
“너무 의욕적이었나…….”
주어진 강의 시간을 남김없이 사용한 함 교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수업 끝.”
- “수고하셨습니다!”
함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학생들의 안색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신입생 특유의 활기를 되찾았다.
*
*
*
그날 오후.
공대원 모임의 1차 회식 장소인 삼겹살집 앞에 도착한 태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룡이를 발견했다.
“어, 태주야, 왔어?”
재룡이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뭐야, 통화하러 나왔어?”
“아니. 혹시 못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에이, 설마 여기를 못 찾아올까.”
태주가 거대한 돼지 머리 모형이 걸려 있는 핑크색 간판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가?”
태주를 따라 간판을 올려다본 재룡이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지금 안에 몇 명이나 있어?”
“지금? 다섯 명.”
“다섯 명? 그럼 우리까지 포함해서 일곱 명이니까 이제 세 명만 더 오면 되겠네?”
“아니.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 더 와야 돼.”
“뭐?”
재룡의 더하기 빼기 실수에 두 귀를 의심한 태주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야, 십에서 칠을 뺐는데, 왜 사야, 삼이지.”
“아, 그게…….”
태주의 지적에 잠시 머뭇거리던 재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한 명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