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빌런 vs 헌터 (10)
“야, 너 지금 뭐 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태주가 복부에 붙어 있던 스티커를 제 손으로 떼어 낸 재룡의 돌발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 이거? 사실 던전을 클리어한 것도 기쁘고, 최하점을 면하게 된 것도 기쁘긴 한데, 생각해 보니까 내 힘으로 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재룡이 손에 든 스티커를 흔들어 보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왜. 혹시 교수님 말씀 때문에 그래?”
“아니. 그냥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해서 그래. 네 덕분에 너무 날로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비상구가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본 재룡이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 부근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좀 전에 편들어줘서 고마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살아 나갈 자격은 우리가 아니라 너한테만 있는 것 같아.”
태주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전한 재룡이 실력과 인성 모두에 대한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아, 물론 다음번엔 같이 나갈 수 있게 나도 열심히 노력할 거야.”
재룡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나도 응원할게.”
태주가 재룡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터치하며 기특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나 먼저 갈 테니까 좀 이따 대기실에서 보자.”
비상구를 향해 미련 없이 나아가던 재룡이 한 번씩 뒤로 걸으며 태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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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 “어, 왔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태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 “뭐야, 설마 태주 혼자 살아남은 거야?”
- “그러게. 지금까지 한 명만 돌아온 조는 하나도 없었는데.”
- “어! 혹시 태주가 빌런이라 나머지 공대원들을 다 죽이고 나온 거 아니야?”
- “으음. 꽤 그럴듯한 가설인데?”
- “대박! 그게 바로 우리가 걱정했던 양날의 검이잖아.”
생존자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던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태주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 “태주야, 넌 빌런이야 헌터야?”
태주의 생존 자체는 모의 던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의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기들의 관심사는 역시 배정된 역할에 쏠려 있었다.
“헌터.”
앞선 가짜 헌터들과 달리 태주는 궁금증을 유발하거나 뜸을 들이지 않았다.
- “헌터? 진짜야?”
- “뭐야, 그럼 헌터가 6번 연속으로 이긴 거네?”
- “어? 근데 태주가 같은 편이었던 것치고는 헌터들의 피해가 너무 큰데?”
- “그러게. 심지어 창민이가 있던 4조는 무려 5명이나 살아남았는데.”
- “받쳐주는 멤버들이 별로였나?”
- “태주야, 너 혹시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 “그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얘기해 봐.”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워진 동기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진실은 도전자 대기실이 아닌 탈락자 대기실에 있었지만.
“태주야, 난 이번에 들어가는데 혹시 뭐 해줄 얘기 없어?”
7번을 뽑았던 세준이 화살의 깃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냥 들어가 보면 알아.”
태주는 앞선 생존자들과 달리 최대한 말을 아꼈다.
어차피 자신이 경험한 던전의 난이도와 다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요구 조건이 온전히 수용된 마당에 함 교수의 테스트 의도를 방해하는 불필요한 스포를 발설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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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태주다!”
한 아이가 조교와 함께 탈락자 대기실로 넘어온 태주를 검지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 “태주야, 6조의 난이도만 완전 헬이었다며?”
- “근데 난이도를 떠나서 빌런만 9명인 게 더 헬 아니야?”
- “그나저나 보스를 어떻게 20초만 잡았지? 우린 노멀 모드로도 거의 2분 가까이 걸렸는데.”
- “심지어 솔플이었다잖아. 재룡이는 체력 21이라 뒤로 빠져 있었고.”
- “그러니까 교수님께서 착용 중인 반지까지 턱턱 빼주셨겠지. 그것도 전설 등급으로.”
- “역시 갓태주. 믿고 있었다고!”
탈락자 대기실의 경우 함 교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던전 안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거짓 없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주를 맞이하는 분위기부터가 도전자 대기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 “태주야, 네가 재룡이 쫓겨나는 것도 막아줬다며.”
- “아니, 하재룡은 대체 몇 번이나 신세를 지는 거야?”
- “오오, 역시 S급 인성.”
물론 이러한 여론이 형성된 데에는 안전한 목격자로 살려뒀던 재룡의 역할이 컸지만.
- “잠깐. 그러고 보니 생존자들 중에 진짜 헌터는 태주밖에 없네?”
- “뭐, 아직 4개의 공대가 더 남아있긴 한데,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나 빌런의 구성으로 보나 헌터가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
- “어? 그럼 지난 시간에 이어 2주 연속 혼자 살아남은 거야?”
- “우와, 역시 어나더 레벨.”
- “왜 교수님께서 유독 태주가 속한 공대만 견제하셨는지 이제야 알겠네.”
- “하긴, 던전 안에서 죽는 더러운 기분을 체험해보는 게 목표라고 대놓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눈치 없이 계속 살아 있으면, 교수님 입장에서도 난감하긴 하시겠지.”
- “더구나 이젠 난이도 조절도 마음대로 못하시잖아.”
- “아아, 나도 종강 전까지 최소한 한 번은 살아남고 싶은데…….”
- “야, 창민이도 아직 못했는데, 네가 무슨 수로.”
태주에 대한 동기들의 찬사가 쏟아질수록 만년 2인자의 이미지가 굳어지고 있는 창민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지고 있었다.
“…….”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빌런의 5 대 0 압승을 이끌었다는 사실에 동기들의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6조의 탈락자 8명에 이어 스스로를 탈락시킨 재룡까지 탈락자 대기실에 합류하는 순간, 화제의 중심 자체가 창민에게서 태주에게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아참, 근데 우리 이번 주 금요일에 신입생 환영회랑 개강총회를 같이 한다며.”
태주의 들러리가 되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창민이 주변에 있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대홧거리를 넌지시 흘렸다.
- “어. 헌터관 앞에 있는 게시판이랑 복도에도 다 써 붙여 놨던데? 학생회에서 따로 문자도 돌렸고.”
- “오오, 또 꽁술 먹을 건수가 생겼네?”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아이들이 창민이 던진 떡밥을 덥석 물었다.
- “근데 그때 대면식만 하는 게 아니라 1학년 과대랑 부과대도 같이 뽑을 거라던데?”
- “과대랑 부과대? 그거 엄청 피곤한 거 아니야?”
- “그래. 뭘 귀찮게 그런 걸 해. 어차피 잘해야 본전에, 못하면 개욕만 처먹을 텐데.”
- “어? 새터 때 온 선배들 대부분이 하면 좋다고 그랬는데.”
- “야, 그 선배들은 다 학생회 멤버니까 당연히 좋다고 그러겠지. 안 그래?”
- “뭐,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순 없을걸?”
- “맞아. 나도 아는 형이 과대 출신인데, 할 일도 은근히 많고, 시간도 겁나 뺏겨서 1년만 하고 바로 그만뒀대. 괜히 평점만 엉망 되고.”
- “하긴, 헌터학과 10대 스펙에도 안 들어가는 교내 활동에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지.”
- “근데 그거 그냥 인싸들이 인맥 쌓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막말로 과대라고 해서 누가 ‘아이고, 과대님’ 하면서 리더처럼 떠받들어 주는 것도 아니잖아.”
- “가끔 인싸가 되고 싶은 아싸들도 지원할걸?”
- “어? 나는 한 번 도전해 보려고 그랬는데.”
- “그나저나 우리 학번에선 누가 뽑힐까?”
순간, 과대 활동의 득과 실에 대한이야기를 주고받던 아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 “창민아, 넌 나갈 생각 없어?”
한 아이가 개강총회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낸 창민에게 지원 의사를 물었다.
“나? 글쎄. 고등학교 때까지도 딱히 임원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앞에 나서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던 창민이 관심 없는 얼굴로 불출마의 뜻을 밝혔다.
“으음. 일단 우리 학번을 대표할 만한 후보로는 태주가 독보적이긴 한데…….”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든 원무가 소영의 생일 선물을 고를 때 보다 더 신중한 표정으로 태주를 추천했다.
“야, 대표하면 대표했지 왜 찝찝하게 말끝을 흐려.”
그러자 관계든 의사표시든 모호한 것을 싫어하는 소영이 곁에 앉아 있던 원무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확실한 의견을 요구했다.
“아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긴 한데, 왠지 느낌상 태주가 안 한다고 할 것 같아서.”
소영의 매운 손맛에 정신이 번쩍 든 원무가 자신의 무릎에 힐을 넣으며 얼버무렸던 말끝을 마무리 지었다.
“나도 원무랑 같은 생각이야.”
이번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넌 또 왜? 너도 느낌상 안 할 것 같아서?”
소영이 정웅의 시그니처 동작에 한쪽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일단 과대가 되면, 말 그대로 학년과 동기들을 대표해서 각종 행사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야 되는데, 솔직히 태주처럼 글로벌한 관심을 받다 보면, 아무래도 교내보단 대외 활동의 가능성이 더 높을 거 아니야.”
실제로 태주의 스케줄엔 5대 길드와의 인턴십 논의와 국내외에서 열리는 각종 대회 참가 일정 및 국제 컨퍼런스 동행 등 대외적인 활동 계획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으음. 듣고 보니 또 그러네.”
원무의 빈약한 논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소영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 정웅의 의견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근데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
바닥에서 일어난 소영이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태주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태주야, 다른 학교에 다니는 궁수 친구가 하도 졸라서 그러는데, 혹시 남는 화살에 사인 하나만 해줄 수 있어?”
- “어? 나는 사촌 누나가 찐팬이라면서 부탁했는데.”
- “태주야, 일일이 해주기 귀찮으면 그냥 단톡방에 사인 한 장 올린 다음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베끼라고 그래.”
- “오오, 그거 괜찮은데?”
태주는 여전히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슈퍼 루키로서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저기, 태주야.”
동기들의 뒤에서 까치발을 든 소영이 태주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어, 소영아. 왜?”
남자 동기들의 어깨 위로 머리를 빼꼼 내민 소영과 눈이 마주친 태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너 내일 모레,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에 개강총회랑 신입생 환영회 있는 거 알지?”
“어.”
“그때 과대랑 부과대도 같이 뽑는다는데 혹시 나갈 생각 있어?”
“…….”
순간, 소영의 질문을 들은 태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