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19화 (119/242)

119. 빌런 vs 헌터 (9)

“……?!”

확대된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함 교수가 태주의 등을 향해 손을 뻗는 재룡의 모습을 포착했다.

“다른 각도로 비춰 봐.”

“네.”

프로그래머가 태주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비추고 있는 화면을 찾아 줌을 당겼다.

“어? 에이, 뭐야.”

거북목을 한 채 가늘게 눈을 떴던 프로그래머가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앞에서 봤을 땐 태주의 등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떼기 위한 은밀한 시도처럼 보였지만, 뒤에서 보니 오히려 보스와의 격렬한 전투 과정으로 인해 반쯤 떨어져 있던 스티커를 제대로 붙여주고 있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님, 이거 제대로 낚였는데요?”

“말했잖아. 쟨 빌런의 자격이 없다고.”

잠시나마 반전을 기대했던 함 교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프로그래머를 쏘아봤다.

“더 볼 것도 없으니까 그냥 마이크나 연결시켜.”

“네.”

함 교수의 따가운 눈총에 주눅이 든 프로그래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같은 시각.

“됐다.”

태주의 스티커를 손바닥으로 단단히 밀착시킨 재룡이 뿌듯한 얼굴로 생색 아닌 생색을 냈다.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치?”

“그래. 수고했으니까 이따가 쌈 쌀 때 삼겹살 두 개씩 넣어.”

활을 거둔 태주가 공대원 모임을 염두에 둔 가벼운 농담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어? 나 원래 두 개씩 넣는데?”

태주의 말에 의아해하던 재룡이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뭐?”

“대패 삼겹살은 얇아서 4장씩 넣어.”

“아아……. 배운 사람이네.”

다큐가 되어버린 농담에 리액션이 고장 난 태주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아꼈다.

“내가 고기에 좀 진심이거든. 아, 이따가 나랑 같이 앉을 거지?”

공대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에 나온 재룡이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나는 아무래도 다른 테이블에…….”

태주가 재룡의 합석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려던 바로 그때.

[“아아.”]

모의 던전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함 교수의 마이크 테스트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이거 교수님 아니야?”

재룡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하아. 역시 제법이네. 잘했어.”]

태주의 죽음을 3주차로 미루게 된 함 교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담백한 칭찬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태주가 자신을 비추고 있는 CCTV들 중 한 대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

그러자 곁에 있던 재룡이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며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너 말고, 태주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갈 법도 했지만, 레이드의 기여도를 떠나 빌런에 임하는 태도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함 교수가 재룡을 콕 집어 칭찬에서 배제했다.

“예? 아, 예…….”

함 교수의 칼 같은 지적에 무안해진 재룡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지각생, 너.”]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던 함 교수가 가뜩이나 위축된 재룡을 또 한 번 지목했다.

“예, 교수님.”

[“넌 던전의 클리어 여부와 상관없이 최하점이야.”]

함 교수가 단호한 말투로 재룡에게 강력한 페널티를 부여했다.

“예?! 최하점이요?!”

생각지도 못한 처분에 놀란 재룡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물었다.

[“놀랄 거 없어. 네 실력이 최하점이란 게 아니라 빌런으로서의 역할 수행 능력이 최하점이란 거니까.”]

“…….”

반박할 수 없는 함 교수의 지적에 말문이 막힌 재룡이 정체를 숨긴 것에 대한 미안함에 태주를 힐끗 쳐다봤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 날 속인 거야?”

태주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재룡에게 모른 척 능청스럽게 물었다.

“이야, 이거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

“어?! 아, 아니야 그런 거.”

태주의 농담에 당황한 재룡이 큰 누명이라도 뒤집어쓴 억울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이, 하재룡.”]

“예, 교수님.”

태주에게 해명을 하려던 재룡이 함 교수의 부름에 바짝 긴장했다.

[“혹시 영화 보는 거 좋아하나?”]

“예? 예, 뭐, 싫어하진 않습니다.”

재룡이 함 교수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연쇄살인마 배역을 맡은 배우는 진짜 범죄자고, 영화 속에서 결혼하면 실제 부부가 되는 거야?”]

“아, 아니요.”

[“근데 왜 너만 착한 척하고, 왜 너만 신태주랑 친한 척해.”]

“어어, 저, 그러니까 그게…….”

비유의 의미를 알아챈 재룡이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금 네가 한 행동이 빌런으로 뽑힌 동기들을 진짜 빌런으로 만들었다는 거 몰라?”]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함 교수의 목소리가 재룡의 경솔한 처신에 살짝 격양됐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나오지 마. 훈련과 실제도 구분 못하는 어리바리한 놈은 나도 가르칠 마음이 안 생기니까.”]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함 교수의 강도 높은 질책에 반쯤 넋이 나간 재룡이 CCTV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거듭 잘못을 인정했다.

[“그건 그렇고, 신태주, 너.”]

재룡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함 교수가 상대를 바꿔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보스를 고작 20초 만에 잡을 수 있지?”]

마이크를 켠 진짜 이유.

함 교수는 보스의 약점을 찾아내는 태주의 눈썰미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그냥 여기저기 쏴보다가 얻어 걸린 거라.”

물론 그러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약점을 공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순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함 교수의 코웃음이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그럼 두 번 연속 목을 공략한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지난번 건 이미 말씀드렸듯이 드래곤 브레스가 발동되기 전에 목구멍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려본 것뿐입니다.”

태주가 함 교수의 집요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차분한 해명으로 모든 의혹을 일축했다.

“오늘은 그냥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좀 잠잠해질까 하는 마음에 몇 발 쏴본 거고요.”

[“한마디로 두 번 다 우연의 일치다?”]

심증은 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던 함 교수가 결국 이렇다 할 소득 없이 간파의 비결에 대한 질문을 그쳤다.

[“좋아.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태주와의 기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선 함 교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을 뒤로한 채 레이드를 마무리 지으려던 바로 그때.

[“자, 그럼 이제…….”]

“저, 교수님.”

본의 아니게 함 교수의 말을 끊은 태주가 오른손을 반쯤 들어 질문이 있음을 알렸다.

[“뭐야.”]

자신의 발언 타이밍에 허락도 없이 끼어드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함 교수지만, 유독 태주에게만큼은 기존의 캐릭터와 달리 의외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룡이에게 최하점을 주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

함 교수의 호통에 의기소침해 있던 재룡이 태주의 당돌한 건의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최하점은 아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태주의 의견을 곱씹어보던 함 교수가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며 이유를 물었다.

“네. 교수님 말씀대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건 맞지만, 엄밀히 따지면, 재룡이가 아니라 교수님께서 먼저 규칙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태주야,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행여나 태주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이 된 재룡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태주를 말렸다.

물론 태주의 어필이 비단 재룡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번째 수업 만에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나중엔 감당이 안 되겠지?’

브레이크의 필요성.

‘뭐, 평소대로 안 하시면, 하시게끔 만드는 수밖에.’

사실 별다른 개입이 없었던 지난 시간과 달리 눈에 띄게 심해진 함 교수의 견제에 맞불을 놓아야겠다고 판단한 태주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대에만 적용되는 높은 난이도와 평가 잣대를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구실로 재룡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물론 태주의 의도를 모르는 재룡의 눈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진정한 친구로 비춰졌지만.

[“무슨 근거로 내가 규칙을 어겼다는 거지?”]

태주의 주장을 억측이라고 여긴 함 교수가 헛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하지만, 솔직히 모든 공대가 똑같은 난이도로 레이드를 진행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서요.”

[“난이도? 지금 설마 교수의 고유 영역에 트집을 잡는 거야?”]

어차피 동기들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날 사실이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난이도를 통일하는 순간, 태주가 죽는 모습을 종강 때까지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질문의 본질을 흐리며 최대한 화제를 돌리려는 함 교수였다.

“트집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동등하지 못한 조건에서 시작된 레이드인 만큼 그로 인한 처벌 역시 정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불공정한 테스트 방식에 제동을 걸기 전까진 타협할 마음이 없는 태주가 함 교수의 예상대로 쉽게 물러설 리 없었지만.

[“하아.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간만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를 만난 함 교수가 지친 기색을 내비치며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테스트에서 동등하고 공정한 기준을 적용해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재룡이에 대한 가혹한 처분도 거둬주셨으면 하고요.”

협상의 주도권을 잡은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어진 찰나의 침묵.

[“…….”]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선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합리적인 요청이었기에 교수의 재량권을 들먹이며 무작정 묵살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한 함 교수가 결국 태주의 뜻대로 공정한 평가를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수업의 부담감을 줄이는데 성공한 태주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각생, 너.”]

“예, 교수님.”

태주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을 확인한 재룡이 선처를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최하점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지.”]

“어?! 그럼 다음 시간에 나와도 되는 겁니까?”

[“지각이나 하지 마.”]

“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되찾은 재룡이 함 교수에 대한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F학점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인 태주를 돌아봤다.

“태주야, 진짜 고마워.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재룡의 진심 어린 인사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태주가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던 바로 그때.

촤악!

“……?!”

갑자기 태주의 귓가에 스티커를 떼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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