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빌런 vs 헌터 (8)
촤아악!
슬라이딩을 통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정웅이 찜질방에 들어온 듯한 뜨거운 열기가 등 위로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쿠아아아!
정웅의 뒤를 맹렬하게 쫓던 몬스터들이 화살의 궤적을 중심으로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물론 태주가 다음 발을 준비하기 위해 활시위를 당긴 사이, 잔여 몬스터들이 정웅을 위에서 덮쳤지만.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결국 희미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체력 게이지가 몬스터들의 일격에 바닥을 드러냈다.
“아…….”
난생 처음 슬라이딩까지 했던 정웅이 분전 끝에 맛본 씁쓸한 패배감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 “어? 죽었나 보다.”
- “그러게. 조금만 더 버텼으면 살았을 텐데.”
- “근데 몬스터들의 숫자가 좀 선을 넘긴 했어.”
- “괜히 슬라이딩해서 옷만 더러워졌네.”
긴박함에 주먹을 불끈 쥐었던 탈락자들이 간발의 차이로 맞이한 정웅의 죽음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끝.’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정웅의 탈락과 동시에 화살을 바꾼 태주가 얼마 남지 않은 몬스터들을 차례대로 제거해 나갔다.
쉬이익! 쉬이익!
꾸웨엑!
“와아…….”
일정한 패턴 없이 움직이는 까다로운 목표물마저 기어코 잡아내는 체이싱 애로우의 놀라운 명중률에 재룡의 턱이 저절로 늘어졌다.
“이제 됐으니까 나와.”
상황을 정리한 태주가 활을 내리며 재룡에게 말했다.
“어? 어, 알았어.”
직업 탐구 시간이 아니면 보기 힘든 태주의 활솜씨를 코앞에서 목격한 재룡이 한 박자 늦은 대답과 함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에이 씨, 어차피 죽을 거 괜히 오버했네…….”
진현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정웅이 옷에 묻은 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구시렁거렸다.
“이왕이면 좀 일찍 도와주지.”
여전히 염치가 없는 정웅이 탈락의 원인을 태주에게 돌렸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우리도 살았을 거 아니야.”
B+를 놓친 진현 역시 태주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근데 어차피 한 명만 살아남으면 되는 거 아니야?”
“뭐?”
정웅과 진현이 미안한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주의 태연한 대답에 흠칫 놀랐다.
“너희 둘 다 헌터라며. 그럼 한 명만 살아 나가도 다 같이 승리하는 거잖아. 안 그래?”
“어? 어, 뭐, 그야 그렇지…….”
태주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제 발이 저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뭐야, 반응들이 왜 이래.”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손에 든 활을 잠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은 태주가 두 사람의 뒤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설마 헌터가 아니라 빌런이었어?”
그리곤 정웅과 진현의 어깨를 한쪽씩 짚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하아……. 미안.”
태주의 추궁에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빌런임을 실토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 아아, 그럼 보스전까지만 이용하고 죽일 생각이었나 보네. 바로 이렇게.”
촤악!
태주가 두 사람의 등에서 보란 듯이 스티커를 떼어냈다.
“……?!”
순간, 거친 손놀림에 놀란 두 사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왜. 뭐, 할 말 있어?”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있던 용건도 잊게 만드는 태주의 살벌한 눈빛에 당황한 정웅과 진현이 기껏 든 고개를 황급히 가로저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대기실에 가서 좀 쉬고 있어.”
척!
태주가 떼어낸 스티커를 원래 있던 자리에 대충 부착시킨 뒤 발걸음을 돌렸다.
“컥!”
물론 모기를 때려잡을 때보다 약하게 손바닥을 놀렸음에도 두 사람은 숨이 턱 막힌 듯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앞으로 밀려났지만.
“태주야, 가, 같이 가.”
자신도 빌런인 탓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재룡이 태주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한 차례의 웨이브를 더 극복한 이후에 도달한 보스의 방.
크르르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사자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몬스터가 철퇴가 달린 꼬리를 흔들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와아…….”
자신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는 몬스터와 제대로 눈이 마주친 재룡이 전의를 상실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 이번에도 뒤로 빠져 있을래?”
재룡의 경직된 표정을 읽은 태주가 가벼운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으음. 아니. 이번엔 내가 앞장설게.”
잠시 고민을 하던 재룡이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태주의 빈말을 거절했다.
“뭐, 내 힘으로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최소한 싸워는 봐야 될 것 같아서.”
“시작하자마자 죽을 수도 있어.”
당시엔 보스의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대부분의 동기들이 보스전에서 탈락했다는 얘기는 확실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
물론 지금은 함 교수의 개입으로 인해 그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해진 보스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뭐, 꼴찌가 수석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죽기 전까진 확실하게 어그로를 끌어줄게.”
졸지에 유일한 빌런이 된 재룡이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학점을 내건 엄 교수의 솔깃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태주를 공격해야겠다는 마음을 단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래? 그럼 딱 한 타이밍만 버텨 봐.”
자신에게 두 번이나 마음의 빚을 진 재룡이 절대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한 타이밍만?”
보스의 무시무시한 외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재룡이 자신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물론 그것이 바로 태주가 재룡에게 원하는 솔직한 반응이었지만.
“지금 체력 얼마나 남았어?”
사실 태주는 이미지와 인맥을 동시에 관리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자신의 활약상을 알릴 안전한 목격자로 재룡을 살려둔 것이었다.
“체력? 21.”
때문에 더 큰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은 태주의 입장에선 오히려 보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래서 재룡의 의심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내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뭐? 21? 그럼 한 타이밍도 못 버티잖아.”
“아, 그런가?”
의욕에 못 미치는 민망한 체력 게이지를 확인한 재룡이 머쓱하게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업그레이드 된 보스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태주는 생존 미션에서 상대한 레드 드래곤 때와 마찬가지로 간파 스킬을 이용해 상대의 약점부터 파악할 작정이었다.
“어? 어디 가는데?”
“가까이서 얼굴 좀 보고 오게.”
“뭐?”
태주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재룡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반경 20미터 안이라는 발동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네 발 달린 보스의 돌격 범위 안으로 주저 없이 들어선 태주였다.
▶ 스킬 『간파』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그리고 이어진 보스와의 눈싸움.
▶ 간파할 대상을 3초간 바라보십시오.
크아아아앙!
“크윽!”
고막이 남아날 것 같지 않은 보스의 포효에 재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 둘…….’
물론 태주는 버스만 한 크기의 사자형 몬스터가 천둥 같은 소리로 위협해도 크게 개의치 않은 채 숫자만 세어 나가고 있었지만.
‘셋.’
▶ 스킬 『간파』가 발동되었습니다.
순간, 간파 대상의 공략 포인트가 태주의 머릿속에 데이터처럼 전송됐다.
‘저기구나.’
갈기에 가려진 목, 그중에서도 울음소리를 담당하는 성대 부위가 약점이란 것을 알아낸 태주가 다시 거리를 벌렸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어때? 더 무섭게 생겼어?”
먹먹해진 귓구멍을 검지로 후비고 있던 재룡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태주에게 대면 소감을 물었다.
“아니. 우습게 생겼어.”
“뭐?”
“괜히 끼어들 생각하지 말고, 반대쪽 귀나 파고 있어. 이번에도 길어야 30초 컷이니까.”
27초 만에 레드 드래곤을 제거했던 태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룡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야, 그래도.”
크아아아앙!
“크윽!”
태주를 향해 손을 뻗었던 재룡이 또 한 번 울려 퍼진 강력한 포효에 얼른 귀를 감쌌다.
*
*
*
같은 시각.
“원한은 다음에 갚아야겠군…….”
통제실에 앉아 보스전을 지켜보던 함 교수가 해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미끼만 물고 사라지는 영리한 물고기 탓에 빈 낚싯바늘만 연거푸 끌어올린 조사의 안쓰러운 모습처럼.
“와아,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정말 보기 드문 인재가 맞네요. 왜 던전의 난이도와 빌런의 숫자를 조정하라고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함 교수의 무리한 지시에 의문을 제기했던 프로그래머가 태주의 압도적인 실력에 뒤늦은 공감을 표했다.
“그나저나 야심차게 준비한 보스마저 허무하게 잡혔으니 이제 믿을 건 저 친구밖에 없네요.”
프로그래머의 시선이 6번 공대의 유일한 빌런인 재룡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아니. 쟨 빌런의 자질이 없어.”
함 교수가 기대감 없는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 그래도 B+ 정도면 혹하지 않을까요? 뭐, 저 친구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솔직히 자력으로 B+를 받을 만한 실력까진 아닌 것 같아서요.”
비록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헌터학과 학생들을 다년간 지켜본 터라 재능을 알아보는 눈만큼은 여느 스카우터 못지않았다.
“아,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개인적인 유감은 없었지만, 주어진 역할에 몰입하지 못한 재룡의 의도적인 규칙 위반으로 인해 테스트의 긴박감이 떨어진다고 느낀 프로그래머가 함 교수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일단 보스를 잡았다는 명분으로 아티팩트 하나를 생성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다음 빌런의 고글에만 비밀 메시지를 띄우는 거죠. 헌터가 아티팩트를 파밍하는 동안 등에 붙은 스티커를 떼라고.”
모의 던전에선 아이템에 손을 댄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야 획득이 가능했는데, 프로그래머는 그러한 절차상의 빈틈을 이용해 태주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소용없어.”
물론 프로그래머의 예상과 달리 함 교수의 반응은 싸늘했지만.
“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기회는 이미 많았거든. 물론 몰라서 놓친 게 아니라 모른 척했다는 게 문제지만.”
공대원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던 함 교수는 9명의 빌런들 중 오직 재룡에게만 배신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다.
“테스트 종료하고, 스피커 연결시켜.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반전 따윈 없다고 판단한 함 교수가 앞에 놓인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어! 교수님! 저기 좀 보세요!”
함 교수의 지시에 따르던 프로그래머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두 사람의 모습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