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빌런 vs 헌터 (7)
태주를 칭송하던 목소리가 그치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고요해진 모의 던전 안.
수상한 기류를 포착한 태주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공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 “……?!”
태주와 눈빛을 맞교환하던 아이들이 마치 교수님의 질문을 피하고 싶은 학생들처럼 시선을 떨어뜨리거나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설마……. 9 대 1?’
함 교수의 개입이 오래전에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태주가 공대원들의 일치된 행동을 근거로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았다.
‘진짜 평소대로 안 하시네.’
물론 막공으로 위장해 모르는 사람들인 척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집단 린치를 가하는 조직적인 빌런들도 있었기 때문에 함 교수의 결정이 극단적이긴 해도 비현실적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자, 다 쉬었으면 그만 출발할까?”
태주에게 의심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던 정웅이 황급히 정적을 깨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보스를 잡아야 빌런들도 잡지.”
정웅의 말에 맞장구를 친 진현이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몰아갔다.
“아, 그리고 보스를 잡을 때까진 서로 터치하지 않기로 한 거 알지?”
정웅이 공대원들을 돌아보며 출발 전에 했던 얘기를 되풀이했다.
작전을 공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태주를 공격해 일을 그르치는 녀석들이 발생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지만, 그보다 보스를 잡을 때까진 태주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 “어? 어. 그럼. 당연하지.”
- “태주야, 그럼 보스전도 부탁해.”
정웅과 비슷한 생각을 한 아이들이 어색한 호응과 함께 태주를 속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용만 하고 팽하시겠다?’
9 대 1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자신감.
‘진짜 빌런들이 따로 없네.’
태주의 등 뒤에서, 혹은 태주를 등진 채 오가는 은밀한 눈짓들.
‘그렇다면 몰살 시점을 앞당길 수밖에.’
이번 강의의 키워드인 배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공대원들의 배덕한 태도에 태주가 헛웃음을 삼켰다.
바로 그때.
- “어! 온다!”
보스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몬스터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 “각자 위치로!”
- “야! 거의 입시 때 봤던 몬스터 웨이브 수준인데?!”
- “탱커들 정신 바짝 차려!”
- “한 번만 더 버티자!”
파이팅을 외친 공대원들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대형을 갖추며 몬스터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물론 공대원들이 두려워해야 할 진짜 적은 내부에 있었지만.
▶ 스킬 『도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일단 브레인부터.’
후방으로 빠져있던 태주가 빌런들을 선동하고 규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정웅의 뒤통수를 3초간 응시했다.
물론 하나 이상의 대상을 지목할 수 있다는 도발 스킬의 장점을 살려 재룡을 제외한 나머지 7명에게도 공평하게 3초씩 시선을 분산했지만.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눈에는 눈, 배신엔 배신.
자신을 바라보던 불순한 눈빛들을 눈빛으로 되갚아준 태주가 몬스터라는 이자를 덧붙여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했다.
“……?!”
롱소드를 휘두르기 위한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재룡이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몬스터들의 이상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야! 어그로가 안 끌린 것 같아!”
선두에서 어그로를 끌던 진현 역시 클래스를 가리지 않고 달라붙는 몬스터들의 영리한 분산 공격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야! 안 막고 뭐 해!”
1차 저지선이라고 할 수 있는 탱커들이 몬스터들을 잡아두지 못한 채 허무하게 뚫려버리자 대형의 중심에서 원딜을 넣고 있던 법사 정웅이 격양된 목소리로 공대원들을 다그쳤다.
‘안 막는 게 아니라 못 막는 거야.’
정웅이 흥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가 활시위를 당긴 채 코웃음을 쳤다.
6번 공대의 안정적인 팀워크를 위협하는 작은 균열의 시작.
‘사이가 좋으면 빌런이 아니지.’
태주는 그 작은 균열이 만들어낼 걷잡을 수 없는 분열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다급해진 정웅이 광역 마법을 이용해 몬스터들의 전진을 막아보려 했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탱커의 보호 없이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쿠아아아!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괴성과 함께 몬스터들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신체적인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고글상에 표시된 체력 게이지는 손써 볼 틈도 없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태주야! 헬프 좀!”
태주를 최대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던 정웅이 염치도 없이 태주의 이름을 외쳤다.
물론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호구라는 것을 아는 태주는 다른 녀석들을 도와주느라 바쁜 척, 정웅의 부르짖음을 가볍게 흘려들었지만.
[몬스터로부터 심각한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 “야! 힐! 힐! 힐!”
- “힐러 뭐 하냐!”
- “야 이 씨! 난 뭐 노냐!”
- “탱커들 똑바로 안 막을래!”
- “답답하면 네가 와서 막아 봐 이 새끼야!”
비난과 책임 전가가 난무하는 날 선 소통상의 잡음.
부쩍 예민해진 공대원들 사이에 오가는 아슬아슬한 대화가 안정적이었던 공대의 분위기를 위기에서 적대감으로 순식간에 악화시켰다.
[누적된 피해가 한계치에 도달하였습니다.]
몬스터들의 공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대원들의 고글에 달갑지 않은 메시지가 표시됐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 “아, 죽었다.”
- “어, 뭐야. 끝난 거야?”
- “아아, 거의 다 왔는데…….”
- “에이 씨.”
중도 탈락한 공대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아쉬움을 표출하며 고글을 벗거나 목으로 내렸다.
현재 남은 인원은 10명 중 5명.
도발 스킬에 지목된 8명 중 무려 절반이 넘는 인원이 단숨에 제거됐지만, 어그로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그로에 걸린 대상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지속되는 도발 스킬의 끈질긴 생명력.
공격 대상이 8명에서 3명으로 줄어드는 순간,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몬스터들의 숫자도 자연히 증가했기 때문에 당하는 입장에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야! 몬스터가 더 많아진 거 같아!”
적에게 포위되지 않게 도망치면서 싸우고 있던 진현이 질릴 대로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거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물론 진현의 불평에 대꾸해줄 여유 따윈 없는 정웅은 실드 마법으로 시간을 끌며 살아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지만.
‘네가 죽어야 끝이야.’
쉬이익! 쉬이익!
반면, 서서히 괴멸 상태로 치닫는 빌런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감상하던 태주는 태업 의혹을 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액션만을 취하며 자신이 초래한 혼돈을 즐기고 있었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아아!”
치고 빠지기 작전을 펼치며 한 자리에 1초 이상 머물지 않았던 진현이 결국 아쉬움의 절규를 토해내며 그대로 멈춰 섰다.
[사망으로 간주하여 테스트가 종료됩니다.]
- “후우, 그래도 오래 버텼네.”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던 어쌔신마저 긴 한숨을 후련하게 뽑아내며 고개를 떨궜다.
이제 남은 인원은 류정웅 단 한 명뿐.
‘이제 슬슬 속도를 높여볼까?’
다만, 류정웅이 죽으면, 도발의 효과가 풀려 어그로를 끌어줄 대상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마지막 지정자가 아웃되기 전, 몬스터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 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쉬이익!
“태주야! 어떡하지?!”
정웅을 둘러싼 몬스터들을 열심히 제거하고 있던 재룡이 태주를 돌아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일단 뒤로 빠져.”
열심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태주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맞나 싶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재룡에게 말했다.
“어? 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재룡이 가로 베기를 하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아니.”
척!
태주가 자신을 등진 채 롱소드를 휘두르고 있는 재룡의 한쪽 어깨를 짚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 뒤로 빠지라고.”
“……?!”
두 귀를 의심케 하는 태주의 파격적인 지시에 재룡의 말문이 막혔다.
전사의 어그로를 거부하는 매직 아처의 패기.
탱커의 입장에선 원거리 딜러를 앞세우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거절의 의사를 내비칠 수 없었던 건 상식을 벗어난 대형의 요구 주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태주였기 때문이다.
“어. 그럼 부탁할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낸 재룡이 태주의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 “대체 어쩔 셈이지?”
- “그러게. 저 많은 걸 혼자 상대하겠다고?”
- “뭐야, 벌써 잊었어? 입시 때 이미 히든 웨이브를 솔플로 깼었잖아.”
- “하긴, 태주라면 또 모르지.”
비상구로 향하던 탈락자 7명이 걸음을 멈춘 채 다시 고글을 착용했다.
바로 그때.
▶ 파이어 애로우[F]를 선택하셨습니다.
화살을 바꾼 태주가 활시위를 당긴 채 5초의 시간을 느긋하게 흘려보냈다.
‘감히 날 작업해?’
태주는 실드가 벗겨진 정웅이 다음 실드를 만들기 전에 대미지 누적으로 탈락하도록 몬스터의 제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보내줄게.’
화살촉의 불씨가 횃불처럼 커진 것을 확인한 태주가 활시위에 걸어놨던 손가락을 스르륵 놓았다.
쉬이익! 화르르.
태주의 손끝을 떠난 화살이 화염방사기와 같은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정웅의 왼편에 있던 몬스터들을 한 방에 쓸어버렸다.
- “우와! 진짜 미쳤다!”
- “저건 원 샷 원 킬이 아니라 원 샷 텐 킬인데?”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탈락자들의 감탄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 “아아, 나 죽기 전에 좀 저렇게 쏴주지.”
- “이제 보니 공대 전력의 9할이 아닌 전부였네.”
- “하아……. 결국 B+는 물 건너 간 건가.”
- “야, 저걸 보고도 스티커를 뗄 엄두가 나긴 하냐?”
- “하긴, 어차피 순간 이동으로 피해 다니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잡을 텐데.”
- “근데 우리가 전부 빌런인 건 꿈에도 모르겠지?”
- “글쎄. 알았으면 몬스터가 아니라 태주 손에 먼저 죽지 않았을까?”
- “으음. 듣고 보니 그러…… 어! 실드가 깨졌다!”
제3자의 마음으로 편안하게 레이드를 관전하던 아이들이 정웅의 위기 상황에 일제히 거북목이 되었다.
“태주야! 빨리!”
실드의 재생성 시간이 필요했던 정웅이 서포트 요청과 함께 태주에게 달려갔다.
“엎드려.”
“뭐?! 엎드리라고?! 아, 알았어!”
재룡과 마찬가지로 태주의 뒤에 숨을 작정이었던 정웅이 도루를 시도하는 1루 주자처럼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바로 그때.
‘3, 2, 1…….’
쉬이익! 화르르.
마음속으로 숫자를 줄여나가던 태주가 정웅의 슬라이딩 타이밍에 맞춰 활시위를 놓은 뒤 나지막이 말했다.
“끝.”
물론 끝을 맞이할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