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빌런 vs 헌터 (6)
- “자, 그럼 시작해 주세요.”
레이드 준비를 마친 6조의 공대원 10명이 조교의 안내에 따라 모의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증강현실이 구현됩니다.]
순간, 특수 고글의 전원이 켜지며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피해가 누적되면 테스트가 중단됩니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터라 눈앞의 메시지가 아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잡담을 나누는 아이들이었다.
“제발 헌터가 나와라 제발.”
A급 무투가 김진현이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기도를 하듯 중얼거렸다.
“야, 넌 처음에 빌런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그랬잖아.”
지난 시간에 이어 두 번 연속 같은 공대에 속하게 된 정웅이 진현의 모습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이기는 게 좋잖아.”
헌터가 5번 연속 승리했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진현이 정웅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 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태주야, 내가 아깐 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했는데, 지난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진짜 너무 너무 고마워.”
태주로부터 게임의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들은 재룡이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맙긴. 아, 그리고 득구한테 들었는데, 오늘 아버지 사업 때문에 늦은 거라며. 잘 해결됐어?”
“아, 그거. 뭐, 대단한 일 때문에 늦은 건 아니고, 그냥 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했었어. 사실 삼강에서 요즘 새로운 채굴 장비들을 개발하고 있거든.”
혹여나 자랑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조심스러웠던 재룡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2주 연속으로 같은 조가 되니까 뭔가 신기하다. 뭐, 지난 시간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탈락해서 실제로 같이 뛰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단순한 동기를 넘어 현시점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슈퍼 루키인 태주의 실력을 직관할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재룡이었다.
바로 그때.
- “……?!”
신나게 잡담을 나누던 공대원들의 말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막혀버렸다.
선정 완료.
마른침을 삼킨 아이들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끈끈한 유대감을 가져야 할 공대원들 사이에 헌터와 빌런이라는 강한 적대감이 형성된 것이다.
[당신은 헌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뭐? 내가 헌터라고?’
선정 결과를 확인한 태주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함 교수의 의도를 헤아려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빌런의 선정 기준을 알고 있는 태주의 입장에선 헌터로 지목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입학 성적과 생존 미션 데이터를 기반으로 빌런을 뽑았었는데…….’
그 당시, 태주는 헌터로 선정됐었다.
물론 회귀 전이니 태주가 기억하고 있는 기준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상황이 180도로 달라진 지금, 수석 입학에 생존 미션까지 통과한 지금의 태주에겐 납득할 수 없는 통보였다.
‘설마.’
앞선 거짓 생존자들의 말과 달리 빌런의 선정 방식은 랜덤이 아니었다.
때문에 태주는 빌런의 승리가 압도적인, 아니,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함 교수의 의도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치 지난 시간, 태주에게만 팀플이 아닌 솔플을 제안했던 것처럼.
‘으음?’
“……?!”
부쩍 말수가 없어진 재룡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빌런의 향기가 느꼈다.
‘엄청 티 나네.’
장난기가 발동한 태주가 재룡의 등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반응을 살폈다.
“탱커는 앞장서야지.”
툭!
“어?!”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스티커에 손이 닿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재룡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근딜인 전사가 원딜인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되잖아.”
재룡이 빌런이란 것을 확인한 태주가 모른 척,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어차피 레이드 과정에서 탈락할 멤버이기도 했지만, 자신과 팀이 된 사실 자체를 기뻐하는 재룡을, 심지어 공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자신이 시작부터 떨어뜨린다는 것은 여러모로 그림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어, 그렇지. 앞으로 가야지. 안 그래도 가려고 그랬어. 하.”
태주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착각한 재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위치를 조정했다.
“왜.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어?”
정웅이 빌런이 걸리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진현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물었다.
“어? 뭐가?”
정웅을 힐끗 쳐다본 진현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아니, 너 빌런이냐고.”
“아닌데? 나 헌터 나왔는데.”
“진짜? 확실해? 근데 왜 안 좋아해?”
정웅이 진현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거야 당연히 헌터로 선정되는 순간 빌런을 경계해야 되니까 그렇지.”
“그래? 뭐, 아님 말고.”
“뭐야, 그런 넌 왜 뭐가 나왔는지 얘기를 안 하는데?”
“나? 나야 당연히 헌터가 나왔으니까 빌런인지 아닌지 의심을 해 본 거지.”
물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는 두 사람의 표면적인 대화가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헌터인 척 밑밥을 까는 건가?’
사실 빌런으로 선정되는 순간, 같은 공대에 속한 빌런들의 리스트가 함께 제공되기 때문에 자신의 결과만 알 수 있는 헌터들과 달리 전략적인 사인을 주고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긴, 류정웅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빌런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헌터들을 속일 수 있는 고도의 심리전.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태주는 빌런인 정웅이 역시나 빌런으로 선정된 진현의 정체를 먼저 의심하고, 정웅의 의도를 눈치챈 진현이 반대로 정웅을 의심하는 공개적인 검증 과정을 통해 헌터들의 피아 식별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야, 빌런들한테 미리 얘기하는데, 우리 인간적으로 보스를 잡을 때까진 서로 터치하지 말자.”
벽을 등진 채 손으로 배에 붙은 스티커를 가린 정웅이 이번엔 다른 공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휴전을 제안했다.
“그래. 어차피 수적에서도 우리가 우위니까 현명하게 판단해.”
그러자 진현이 정웅의 의견에 동조하며 경고의 말을 덧붙였다.
자신들이 헌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또 한 번의 의도적인 퍼포먼스.
그 당시, 헌터에서 빌런으로 돌변하는 경우를 제외한 초기 빌런의 숫자는 공대별로 5명, 즉 헌터와 1대1의 비율이었지만, 1조부터 5조까지의 생존자들이 반복적으로 퍼뜨린 허위 정보로 인해 빌런의 숫자가 2~3명 정도라고 알고 있는 진짜 헌터들의 입장에선 두 사람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어! 나왔다!”
본의 아니게 선두에서 공대원들을 이끌고 있던 재룡이 고블린 무리의 등장에 황급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자, 다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너나 잘해.”
남을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는 정웅의 공대장 행세가 못마땅했던 진현이 고블린들을 향해 돌진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볼까?’
모두가 몬스터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태주의 이목은 재룡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른 동기들의 실력이야 이미 회귀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우혁을 대신해 들어온 행운의 신입생인 재룡의 검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후방으로 빠져 있던 태주가 활을 꺼내드는 액션만을 취한 채 재룡의 첫 발검을 유심히 지켜봤다.
“이야!”
재룡이 허리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뽑아 사선으로 휘둘렀다.
붕!
기합 소리에 묻혀서 그렇지 검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위협적으로 들렸다.
꾸웨엑!
재룡의 공격을 받은 고블린이 괴로워하는 모션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사라졌다.
‘뭐, 아직까진 나쁘진 않은데?’
공대원들의 우려와 달리 재룡의 움직임은 걱정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하긴, 그래도 B급 각성 수준에 합격 커트라인까진 자력으로 올라온 거니까.’
의외라고만은 볼 수 없는 재룡의 무난한 기본기에 태주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
*
*
잠시 후.
“참 말을 안 들어.”
통제실에 앉아 6번 공대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함 교수가 흥미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죽으라고 깔아 준 판에서 춤을 추면 어떡하나.”
함 교수의 눈엔 극한의 공포를 유발하는 상태 이상 공격인 섀도 오브 데스에 걸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100%의 사망률을 예상했던 생존 미션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6번 공대에게만 적용된 난감한 난이도를 경험하고도 공대원 전원을 살린, 다시 말해, 단 한 번도 뜻대로 움직여 준 적이 없는 태주의 행보가 미치도록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신태주만 빼고 전부 빌런으로 바꿔.”
- “네? 한 명만 빼고 전부 다요?”
증강현실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함 교수의 파격적인 지시에 두 귀를 의심했다.
“교수님, 혹시 저 학생에게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미 던전의 난이도도 다른 공대보다 2배는 더 높여놨는데, 여기서 빌런과 헌터의 비율까지 9대1로 해버리시면…….”
함 교수와 태주의 관계를 알 리 없는 프로그래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한? 있지…….”
함 교수가 프로그래머의 질문에 헛웃음을 지었다.
“근데 지금으로선 도저히 갚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프로그래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함 교수의 시선은 오로지 모니터 속 태주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 “아아, 네……. 그럼 바로 전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토를 달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프로그래머가 함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태주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의 헌터들을 모두 빌런으로 변경했다.
“아, 그리고 빌런들의 고글에 표시될 메시지에 이 말도 하나 추가해 줘.”
- “네? 어떤…….”
“태주를 제거하는 사람은 최소 B+라고.”
*
*
*
함 교수가 프로그래머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릴 무렵.
- “야, 이거 생각보다 빡센데? 난 벌써 누적 대미지만 88이야.”
- “그러게. 우리만 다른 던전에 들어왔나? 왜 아까 들었던 거랑 얘기가 다르지? 몬스터의 구성이나 난이도도 완전 딴판이고.”
연이은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공대원들이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나마 태주가 후방에서 미친 서포트를 해 준 덕분에 다 같이 왔지. 안 그랬으면, 거의 7~8명은 죽었을걸?”
- “당연하지. 태주가 공대 전력의 8할 이상인데.”
- “8할? 9할이 아니고?”
6번 공대의 탈락자는 현재까지 0명.
물론 빌런으로 의심 되는 녀석들의 스티커를 뗄 기회도 많았고, 하다못해 도발 스킬을 활용하면, 방우혁에게 그랬듯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손쉽게 빌런들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태주는 그러지 않았다.
‘평소대로 안 하시네.’
선정 기준을 어기면서까지 빌런에서 제외한 함 교수의 고집스러운 견제.
함 교수와의 기 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던 태주는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이 올 때까지 빌런의 제거 시점을 미루고 있었다.
바로 그때.
‘으음?’
몬스터를 노려볼 때를 제외하곤 한 곳으로 모인 적이 없던 공대원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태주를 향해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