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빌런 vs 헌터 (5)
‘연기들 잘하네.’
태주가 1조의 생존자인 호철과 승섭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함 교수가 스포를 막을 생각이 없는 진짜 이유.
그건 바로 두 사람이 떠들어대는 내용들 중 대부분이, 다시 말해, 헌터가 이겼다는 것도, 빌런 2명이 초반에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도, 심지어 빌런의 선정 과정이 랜덤이라는 것과 스포에 대한 주의를 받지 않았다는 것까지 모두 함 교수의 지시에 의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둘 다 빌런이면서…….’
당시엔 10개의 공대 모두 빌런의 승리로 끝났었다.
물론 함 교수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설계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로 하여금 빌런에 대해 방심하도록 만든 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
1조의 생존자 2명이 남은 89명의 대기자를 안심시킨 뒤 사라지고, 이어서 2조의 생존자들이 한 번 더 대기실에 남아 있는 79명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무한 격려의 함정.
결국 9조의 응원을 끝으로 마지막 10조가 입장할 때까지 대기실의 분위기는, 그리고 테스트를 앞둔 학생들의 마음가짐은 점점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 “야, 이거 생각보다 할 만한 것 같은데?”
- “그러게. 뭐, 8명 중에 6명만 남았으면, 사망률이 75%이긴 한데, 일단 10명이 뛴 것도 아니고, 심지어 힐러도 없었다니까.”
- “하긴, 8명이 깼을 정도면 미친 난이도는 아니지.”
- “그럼 초반에 빌런 티를 내는 사람만 체크하면 되겠네.”
- “그래도 빌런 중에 힐러가 있으면 최소한 보스를 잡을 때까진 살려둬야 되지 않을까?”
- “아님 힐러가 아니더라도 맨 앞에 세워서 어그로를 끌게 하거나 몸빵으로 쓸 수도 있지.”
- “아아, 나도 빨리 들어가서 스티커 떼고 싶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헌터의 압도적인 승리를 선포한 호철과 승섭의 희망적인 메시지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 제대로 사기가 오른 아이들이었다.
물론 모니터를 끄고, 스피커도 활용하지 않은 채 오직 생존자의 입을 통해서만 대기실의 분위기를 통제하고 있는 함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방심이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오늘도 완패할 분위기네.’
아직 8번의 거짓 선동 기회가 더 남아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단 한 번의 유언비어만으로도 빌런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제 임무를 완수했으니 데려가야지.’
2회차 신입생인 태주의 예상대로 조교 한 명이 호철과 승섭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 “일단 두 분은 공대원들이 있는 탈락자 대기실로 이동해주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얘들아, 우린 먼저 갈게.”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행복하세요.”
여유가 넘치는 호철과 승섭이 동기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조교의 뒤를 따랐다.
- “잘 가.”
- “알려줘서 고마워.”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아이들이 덩달아 손을 흔들며 행복회로를 돌렸다.
“아주 신이 났네. 신이 났어.”
태주와 같은 6번 공대에 속한 A급 법사 류정웅이 팔짱을 낀 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동기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태주의 곁으로 다가온 정웅이 이번엔 탈락자 대기실로 향하는 생존자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더러 대놓고 죽어보라는 분이 첫 판부터 2명을 살려 보낸다고? 글쎄. 생존자들이 유난 떠는 것도 꼴 보기 싫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별도의 오더가 있는 것 같아.”
각성자가 되기 전부터 한국대를 지망할 만큼 명석한 두뇌를 지닌 정웅이 안경의 브리지 부분을 검지로 밀어 올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솔직히 빌런의 위험성을 그렇게 강조하셨는데, 이런 역설적인 결과가 나오는 건 테스트의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 같지 않아? 나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 빌런이 압살하도록 조작했을 거 같은데.”
혼잣말을 늘어놓던 정웅이 슬쩍 태주의 의견을 물었다.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태주가 정웅의 물음에 적당히 동조해 주었다.
그나마 날카로운 관점으로 함 교수의 의도를 꿰뚫어 본 유일한 녀석이지만, 정웅의 비판적인 시각 역시 얼마 못 가 무뎌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넌 공감할 줄 알았어.”
태주의 맞장구에 기분이 좋아진 정웅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 2번 공대는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1조의 생존자들이 조교를 따라 대기실을 떠나자 나머지 조교가 다음 공대원들을 데리고 모의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
*
*
잠시 후.
- “어, 나왔다.”
5조의 생존자 2명이 게이트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동기들의 무사 귀환을 맞이하는 반응은 갈수록 시원치 않았다.
- “어? 이번엔 2명밖에 안 되네.”
- “그러게. 4조는 무려 5명이나 돌아왔는데.”
- “에이, 거긴 창민이가 있었잖아.”
실상은 허창민 덕분에 빌런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이었지만, 같은 속임수가 반복되다 보니 그 누구도 표면적인 결과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 “야, 너희들도 헌터야?”
대기실에 있던 아이들이 5조의 생존자들에게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 “어? 어떻게 알았어?”
마치 실제 빌런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듯 5조의 생환자들 역시 앞선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헌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그냥 딱 보면 아는 거지.”
동기들의 연이은 성공이 자신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 확신한 아이들이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경솔하게 지껄였다.
물론 태주와 헌터로 둔갑한 빌런들의 눈엔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우스웠지만.
- “뭐야, 또 성공이야?”
2조가 돌아올 때까진 지속됐던 작전 회의나 개인 정비의 모습은 4조의 완승 이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레이드의 결과에 대해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하던 류정웅마저 태주의 예상대로 함 교수의 의도에 대한 의심을 거둔지 오래였다.
“자,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가?”
바닥에 앉아 있던 정웅이 생존자들의 거짓 무용담을 채 듣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따지고 의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두뇌와 판단을 과신하는 부류마저 속일 수 있는 최고의 수단, 반복.
아이러니하게도 류정웅처럼 확실한 근거 없이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 치밀한 이들이 오히려 변수를 고려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반복되는 동일한 결과물을 근거로 성급한 오판을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 “6번 공대는 10명이 아니라 9명이죠?”
인솔을 맡은 조교가 정웅에게 물었다.
“네. 나머지 한 명은 좀 늦는다고 그랬어요.”
- “어어, 그럼 일단 같이 이동할게요.”
6조의 스티커 부착 상태를 눈으로 체크하던 조교가 별다른 지적 없이 입구 쪽으로 앞장섰다.
바로 그때.
철컹!
갑작스러운 엘리베이터 소리에 대기실에 있던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 “어? 재룡이 왔다.”
- “와아, 타이밍 기가 막히네.”
- “아니지. 이왕 늦은 거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아예 안 들어가도 되는 건데.”
- “근데 바쁘면 그냥 째지 뭘 저렇게 꾸역꾸역 기어 왔지? 막말로 한두 번 빠졌다고 해서 F가 뜨는 것도 아닌데.”
- “그러게. 다른 수업도 아니고 함 교수님 수업을…….”
수업보단 공대원 모임에 참석하고 싶어 왔다는 것을 모르는 동기들이 재룡의 등장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마자 몸을 옆으로 돌려 잽싸게 빠져나온 재룡이 동기들이 있는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며 조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어? 지금 바로 들어가야 되는데, 혹시 뭐 하는지는 알아요?”
발걸음을 멈춘 인솔 조교가 재룡에게 물었다.
- “네? 아, 아니요. 아직…….”
조교가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재룡이 머쓱한 표정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대답했다.
- “어어, 이거 어떡하지?”
인솔 조교가 난감한 표정으로 다른 조교와 눈빛을 교환했다.
- “그럼 일단 다른 공대원들의 의사부터 확인하고 결정할게요.”
인솔 조교의 시선이 재룡에게서 6조의 공대원들에게로 옮겨졌다.
- “어떻게. 지금 합류해도 괜찮아요? 시간 관계상 공대원분들이 레이드를 진행하면서 규칙을 설명해야 될 것 같은데.”
- “…….”
미션 자체에 대한 부담감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지만, 공대원들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테스트의 규칙을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100등, 다시 말해, 한국대 헌터학과의 문을 닫고 들어온 재룡이 레이드 과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약간의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명이 아쉽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든 건 어디까지나 함 교수의 지시를 받은 가짜 헌터들의 영향이 컸지만.
“……?!”
순간, 생존 미션을 앞두고 이루어진 공대 편성 과정에서 방출, 태주의 선택을 받기 전까지 잉여 전력이라는 민망함을 견뎌야 했던 재룡이 공대원들의 머뭇거림에 악몽이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 저는 그냥…….”
표정 관리에 실패한 재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포기 의사를 밝히려던 바로 그때.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모두가 재룡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고글과 스티커를 챙겨온 태주가 인솔 조교에게 허락을 구하며 재룡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 태, 태주야…….”
다급하게 뛰어온 나머지 태주와 인사를 나눌 여유조차 없었던 재룡이 공대 편성 과정에서 느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이게 네 목숨이야.”
척!
태주가 재룡의 복부와 등에 손수 뗀 스티커를 무심하게 붙여줬다.
“고글은 쓸 줄 알지?”
“어? 어, 그럼.”
마치 임금의 하사품을 받듯 두 손을 내민 재룡이 황송한 얼굴로 태주가 건넨 특수 고글을 받아 황급히 뒤집어썼다.
“이제 가도 될 것 같은데요?”
레이드를 위한 기본 세팅을 도와준 태주가 인솔 조교에게 출발 의사를 밝혔다.
- “…….”
따로 공대장을 정한 적은 없었지만, 그 누구도 태주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기를 들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 “와아, 지난 시간에도 느꼈지만, 진짜 인성도 S급 아니냐?”
- “역시 재룡이한텐 태주가 은인이네. 그냥 밥 한 번 사는 걸로 끝내면 안 되겠는데?”
- “그러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공대의 입장에선 전력에 큰 영향이 없는 멤버일 수도 있는데.”
6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공대의 아이들이 태주의 훈훈한 결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태주가 보여준 배려심의 밑바탕엔 단순한 이미지 관리의 목적 이외에도,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던전 채굴 회사인 삼강 하베스트의 후계자이자 자신에게 두 번이나 신세를 진 재룡의 호감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인맥 관리의 의도가 함께 숨어 있었지만.
- “네. 그럼 다시 이동하도록 하죠.”
공대원들의 반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인솔 조교가 다시 모의 던전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