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조 편성 (10)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태주가 인벤토리 안에 있던 활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꺼내들었다.
“전 준비됐습니다.”
“……?!”
순간, 그 광경을 지척에서 목격한 주교와 게르딘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쳐다봤다.
“저도 준비를 해야 되나요?”
게르딘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피렐레가 오른손을 반쯤 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피렐레 사제님께서도 비테론에 가십니까?”
주교를 보필하기 위해 동행한 줄 알았던 피렐레의 깜짝 고백에 게르딘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피렐레가 어색한 눈웃음과 함께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으음. 그럼 어쩔 수 없이 각기 다른 세 개의 클래스를 모두 시험해봐야겠군요.”
실력을 검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게르딘이 테스트의 진행을 도와줄 인원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들였다.
“후보생 4명만 선착순으로 집합.”
- “네!”
게르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기가 바짝 든 후보생 4명이 우렁찬 대답 소리와 함께 게르딘의 시야 안으로 앞 다투어 달려갔다.
“창고에 가서 훈련용 허수아비 4개만 가져오도록.”
- “네!”
후보생들의 분주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게르딘이 훈련용 허수아비가 준비되는 동안 테스트의 방식을 설명했다.
“궁수에겐 정확도를, 법사에겐 광역 마법을, 사제에겐 버프 능력을 시험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 두시기 바랍니다.”
“근데 광역 마법은 정확히 어떤 요소를 시험하는 겁니까?”
광역 마법의 경우 파괴력, 속성, 피해 범위, 시전 속도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법사의 입장에선 게르딘의 모호한 평가 방식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보다는 비테론에서 탈출하신 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일단 다수의 적들을 동시에 상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 있는 마법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자신 있는 마법이라…….”
또 하나의 첫인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시험대라 게르딘의 부연 설명을 들은 이후 더 큰 선택 장애에 빠진 보르가넨이었다.
“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번엔 피렐레가 보르가넨의 뒤를 이어 게르딘에게 질문했다.
“아, 피렐레 사제님, 말씀하시죠.”
평소 안면이 있던 피렐레에겐 태주나 보르가넨을 대했을 때보다 확실히 호의적인 느낌이었다.
“제가 비테론에서 쫓기듯이 도망친 터라 전투에 필요한 장비들을 하나도 챙겨 나오지 못했는데, 혹시 다른 사제들에게 장비를 좀 빌려올 수 있을까요?”
“네. 어차피 마지막 순서로 미루면 되니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바로 다녀오시죠.”
게르딘이 피렐레의 피치 못할 사정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근데 빌려줄 사람은 있어요? 아무래도 비테론에 간다고 하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뜻 빌려주지 않을 것 같은데.”
태주가 교회로 돌아가려는 피렐레의 조급한 발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일단 부탁은 해보려고요.”
태주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피렐레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그럴 거면 차라리 주교님께 부탁해 보세요.”
“……?!”
자신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고 있던 주교가 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조언에 흠칫 놀랐다.
“예? 주교님께요?”
피렐레가 내심 기대하는 눈빛으로 주교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다 교회를 위한 일인데, 그 정도 지원은 당연히 해주시겠죠. 안 그래요 주교님?”
“허허, 피렐레 자네에게 그런 말 못 할 고민이 있었군.”
모종의 거래로 인해 거절의 여지가 없었던 주교가 태주의 노골적인 요구를 싫은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
“일단 내 이름을 대고 빌리게.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 돌려주지 못할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주교님.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주교의 배려에 꾸벅 고개를 숙인 피렐레가 태주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낸 뒤 황급히 교회로 뛰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나무로 만든 훈련용 허수아비를 하나씩 들고 온 후보생 4명이 게르딘의 앞에 일렬로 늘어서며 물었다.
“세 개는 저기에 삼각 대형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한 개는 저쪽 담벼락 끝에 갖다 놓도록.”
- “삼각 대형의 간격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대충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정도로만 벌려 놔.”
- “네!”
게르딘의 손끝을 따라 고개가 돌아가던 후보생들이 또 한 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 그럼 어느 분부터 하실까요?”
테스트 준비를 마친 게르딘이 태주와 보르가넨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먼저 하도록 하죠.”
탁!
한 발짝 앞으로 나선 보르가넨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적당한 위치로 이동해 주시죠.”
“네.”
보르가넨이 삼각 대형으로 배치된 훈련용 허수아비들과 대치 상태를 이루도록 자리를 옮겼다.
“후우.”
한 달 넘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 보르가넨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지난날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본 케이지!”
쿵!
실제 적을 마주한 듯 비장한 눈빛으로 돌변한 보르가넨이 지팡이 끝으로 땅을 강하게 내리찍으며 첫 번째 주문을 외쳤다.
푸슉!
순간, 훈련용 허수아비들의 주위로 코끼리의 상아처럼 생긴 거대한 뼈들이 흙바닥을 뚫고 솟아올랐다.
“버닝 필드!”
뼈로 만든 새장이란 의미 그대로 훈련용 허수아비들을 단숨에 가둬버린 보르가넨이 이번엔 바닥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광역 마법을 연속으로 시전했다.
화르르!
불길이 어찌나 거센지 본 케이지 안에 갇힌 훈련용 허수아비들이 새까만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으음.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전 난이도를 떠나 광역 마법을, 그것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속으로 성공시킨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보르가넨의 실력에 대한 더 이상의 추가 검증 없이 바로 테스트를 마무리한 게르딘이었다.
“이게 최선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십쇼.”
녹슬지 않은 자신의 마법 실력에 만족감을 드러낸 보르가넨이 게르딘의 속단을 경계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 그럼 준비해 주실까요?”
“네.”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게르딘의 안내에 따라 한쪽 발을 내딛던 바로 그때.
“아니요. 이쪽이 아니라 저쪽입니다.”
게르딘이 훈련용 허수아비가 세워진 담벼락과는 끝과 끝이라 할 수 있는 태주의 뒤쪽 담벼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총 열 번의 기회 중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위치에 몇 발이나 들어가는지를 중점적으로 볼 겁니다.”
“네. 그러죠.”
발사 지점을 힐끗 돌아본 태주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적당한 위치로 이동해주시…….”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가 게르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
활을 소환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에 빠진 게르딘이 다른 궁수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움직임에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 “야! 지금 봤어?!”
- “뭐야, 진짜 궁수 맞아?”
- “그러게. 좀 전에 활을 꺼냈을 때도 그렇고, 뭔가 우리가 아는 궁수의 개념은 아닌 것 같은데?”
보르가넨이 그랬듯 점멸 스킬을 처음으로 목격한 현장의 모든 이들이 태주의 의도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설마 활까지 잘 쏘는 건 아니겠지?”
- “글쎄. 그건 좀 더 지켜봐야 되지 않을까?”
- “하긴, 게르딘이 몇 발을 맞히느냐보다 어디를 어떻게 맞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활솜씨에 대한 기대감과 의심이 공존하는 사이, 게르딘이 지정한 발사 위치로 순식간에 이동한 태주가 목표물을 노려보며 화살의 종류를 선택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 “어! 화살이 생겼다!”
- “뭐지? 활시위를 당기니까 저절로 생겼어!”
태주의 첫 발을 숨죽인 채 기다리던 이들이 화살의 자동 장착 방식에 두 눈을 의심했다.
바로 그때.
쉬이익!
태주의 손끝을 떠난 첫 번째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딱!
첫 번째 화살이 훈련용 허수아비에 그려 놓은 오른쪽 눈에 박히자 곳곳에서 이른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 “오오.”
- “어쩌다 맞은 거 아니야?”
물론 고작 한 발로는 실력인지 요행인지 알 수 없다며 판단을 미루는 깐깐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아직까진 운인 줄 알겠지?’
표적과 더불어 보는 이들의 심리까지 꿰뚫은 태주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왼쪽 눈을 노렸다.
쉬이익! 딱!
- “어? 이번엔 반대쪽이다.”
- “근데 저 정도 실력이면 앞에 것도 어쩌다 맞힌 게 아닌 거 같은데?”
- “…….”
두 번째 화살이 왼쪽 눈에 명중하자 의혹을 제기했던 이들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쉬이익! 딱!
세 번째 발은 이마, 네 번째 발은 목, 다섯 번째 발은 심장.
“허허, 이쯤하면 충분하지 않겠나?”
적의 급소만을 노린 흠잡을 곳 없는 활솜씨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주교가 게르딘에게 테스트의 조기 중단을 넌지시 제안했다.
“예, 주교님, 그럼 여기까지 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주교의 말에 순종적인 게르딘이 결국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태주를 향해 큰 목소리로 발사를 중지시켰다.
“그만해도 좋습니다!”
‘뭐야, 벌써?’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몸도 풀리기 전에 활을 거둔 태주가 보르가넨의 곁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다.
“일단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탁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르딘이 태주와 보르가넨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좀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네. 두 분 다 실전이 더 기대되는 실력을 가지고 계시네요.”
게르딘이 보르가넨의 뼈 있는 질문을 칭찬으로 무마했다.
“그럼 이제 피렐레 사제님의 버프 능력만 보고, 출발 준비를 하겠습니다.”
마지막 테스트를 앞둔 게르딘이 입구 쪽을 바라보며 피렐레가 돌아왔는지를 확인했다.
“아, 그럼 전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테테와의 약속 시간을 체크하고 있던 태주가 게르딘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될 동료와 따로 만나기로 했거든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태주가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베로닌 광장으로 향했다.
*
*
*
잠시 후.
베로닌 1세의 동상을 접선 장소로 삼은 태주가 비둘기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남성을 발견했다.
‘저 사람인가?’
테테가 나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의문의 남성을 제외하곤 동상 주변을 배회하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조원 후보가 맞는지 확인해보는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바로 그때.
‘어?’
남자와의 거리를 좁혀가던 태주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뭐지? 알림이 안 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