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07화 (107/242)

107. 조 편성 (9)

촤악!

태주가 보르가넨의 상의를 위로 걷어 올렸다.

물론 정원에 오기 전, 보르가넨과 사전에 약속했던 일종의 퍼포먼스였지만.

“오, 주여…….”

옷 안에 감춰져 있던 보르가넨의 길고 깊은 흉터를 목격한 주교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흉터가 보이십니까?”

태주가 주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예.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고통스러웠겠군요.”

주교가 보르가넨의 흉터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연이요? 사연이 궁금하다면 말씀드리죠. 보르가넨 씨.”

옷에서 손을 뗀 태주가 보르가넨을 힐끗 쳐다보며 설명을 부탁했다.

“이건 비테론을 탈출하기 전, 벨지오스의 군대와 싸우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뭐, 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워진 부분과 흉터의 길이가 정확히 일치하죠.”

상의를 내린 보르가넨이 손끝으로 바느질이 된 부분을 천천히 따라가며 말했다.

“목숨을 건지신 것 자체가 기적이군요.”

흉터를 본 이후 줄곧 미간이 구겨져 있는 주교가 보르가넨에게 말했다.

“근데 저에게 왜 흉터를 보여주신 겁니까?”

의도가 궁금했던 주교가 보르가넨의 옷을 들춘 태주에게 물었다.

“이 흉터가 바로 비테론의 과거이자 베로닌의 미래니까요.”

“……?!”

주교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태주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흠칫 놀랐다.

“머지않아 벨지오스의 막강한 군대가 베로닌을 비롯한 주변 성채들을 차례대로 공격할 겁니다.”

야심으로 가득 찬 벨지오스가 비교적 작은 성채인 비테론 하나에 만족할 리 없다고 확신한 태주가 주교에게 잠재적인 위험을 경고했다.

“하지만…….”

“네. 지난 한 달간 아무 일도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계시겠죠.”

주교의 말을 또 한 번 끊은 태주가 벨지오스의 위협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지적하며 협상을 이어갔다.

“베로닌에서 비테론까지 걸어서 하루도 채 안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어제까진 평화로웠던 성채가 하루아침에 생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겠죠.”

“…….”

태주의 끔찍한 가정에 주교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주교든 대주교든 살아 있을 때나 해당하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주교님의 논리대로라면, 벨지오스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해도 순교로 인정되기 어렵겠지만.”

피렐레가 들은 협박 아닌 협박을 고스란히 기억해두고 있던 태주가 상황 파악이 안 된 주교에게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정말 성기사 한 명이면 되는 겁니까?”

승품의 기회를 앞둔 주교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주교님의 개인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 승품의 대가치고는 아주 약소하다 못해 민망한 수준이죠.”

“하지만 계획에 실패할 경우 성기사와 사제를 잃은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저 혼자 떠안게 되는 거라…….”

“주교님, 설마 그 정도의 위험 부담도 없이 대주교가 되려고 하신 겁니까?”

정체되었던 대화를 어느 정도 진전시킨 태주가 또 다시 시작된 주교의 소극적인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느니 차라리 다른 주교님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리는 게 낫겠네요. 뭐, 그럼 주교님이 아니라 그분이 대주교로 승품되시겠지만.”

마지막 초강수를 꺼내든 태주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낸 뒤 발걸음을 돌렸다.

바로 그때.

“잠깐.”

태주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다급해진 주교가 오른손을 뻗으며 태주를 불러 세웠다.

“허허, 꽤나 성급하신 분이군요.”

표현은 동일했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와 선택의 주도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좋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베로닌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성기사 한 명을 지원해 드리도록 하죠.”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사제 수행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강조했던 주교가 결국 승품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태주의 제안을, 그것도 쫓기듯이 받아들였다.

“피렐레.”

“네, 주교님.”

“성기사들의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게.”

“네,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주교의 승낙에 미소를 되찾은 피렐레가 기다렸다는 듯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

*

*

잠시 후.

교회에서 약 3분 거리에 위치한 성기사들의 훈련장에 이르자 담장 너머로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목검과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 우렁찬 기합 소리, 열정적인 가르침이 느껴지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

‘엄 교수님이 딱 좋아할 분위기네.’

더구나 주교의 방문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훈련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어? 저기 주교님 아니야?”

- “그러게.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지?”

훈련에 매진하던 성기사와 성기사 후보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주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훈련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걸음을 멈춘 주교가 누군가를 찾듯 훈련장 전체를 둘러보며 양해를 구했다.

바로 그때.

▶ [알림]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이 반경 10미터 안에 존재합니다.

‘……?!’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네 번째 동료의 등장을 알리는 반가운 메시지가 태주의 눈앞에 떠올랐다.

‘어? 성기사를 영입해도 상관이 없나 본데?’

시스템의 알림이 떴다는 건 조원 리스트에 표시된 기사의 범주에 성기사도 포함된다는 걸 의미했다.

“오셨습니까 주교님.”

티마란까진 아니더라도 엄 교수에 버금가는 체격을 지닌 한 남성이 주교에게 달려와 예의를 갖췄다.

“오오, 게르딘, 안 그래도 자네를 찾고 있었네.”

자신을 대주교로 만들어 줄 중요한 조력자를 마주한 주교가 평소보다 더욱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저를 말씀이십니까?”

주교의 의도를 알 리 없는 게르딘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단 인사부터 나누게. 여긴 피렐레와 마찬가지로 비테론 출신인 보르가넨 형제님, 그리고 이쪽은……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소개조차 듣지 못했군.”

보르가넨의 이름과 출신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작 이번 작전의 핵심 인물인 태주에 대해선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주교였다.

“신태주입니다.”

“게르딘입니다.”

서로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본 두 사람이 호불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자, 그럼 인사도 나눴으니 이제 자네를 찾아온 이유부터 밝혀야겠군.”

주교의 경우 성기사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특수한 위치였기 때문에 설득을 위한 빌드업 과정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밤 비테론 교회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네. 신성을 모독하고, 무고한 피로 성전을 얼룩지게 만든 장본인인 벨지오스를 성스러운 빛으로 심판하게 해달라는 분노에 찬 기도를 말이야.

기도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대주교 승품을 위한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겐 진정성 있는 고백으로 다가왔다.

“예. 저도 벨지오스에게 복수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조원 후보에겐 동일한 목표가 부여되어 있다는 시스템의 설명대로 벨지오스에 대한 게르딘의 감정은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그래. 내 자네의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렇게 약속도 없이 발걸음을 했다네.”

덩달아 비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주교가 갑자기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빼 게르딘의 목에 걸어 주었다.

“아니, 이 귀한 걸 왜 저에게…….”

주교의 이례적인 행동에 당황한 게르딘이 목걸이를 움켜쥔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게르딘 자네는 모두가 인정하는 베로닌 최고의 성기사네. 또한 벨지오스를 단죄하고, 성유물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이기도 하지.”

두 귀를 의심케 하는 주교의 무리한 지시에 훈련장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 “뭐야, 설마 우리더러 비테론에 가라는 거야?”

- “글쎄. 우리가 아니라 게르딘만 가는 거 같은데?”

- “근데 저건 게르딘을 아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 아니야?”

- “그러게. 게르딘이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 “에이, 게르딘만큼 신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 “그나저나 성유물만 회수하는 것도 힘든데, 벨지오스까지 단죄하라니 원.”

- “뭐, 성기사의 존재 목적에 반하는 지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입장에선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주교에게 직접적으로 우려를 표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성기사와 성기사 후보생들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게르딘의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어떤가. 여기 있는 모험가들과 함께 비테론으로 떠날 수 있겠나? 참고로 이들은 모두 벨지오스를 단죄하기 위해 모인 보기 드문 용자들이네.”

“예, 주교님. 부족하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모두의 예상과 달리 게르딘은 주교의 이번 결정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번 영입은 생각보다 쉽겠는데?’

주교에 대한 게르딘의 남다른 충성심을 확인한 태주가 성기사 클래스의 무난한 합류를 기대하고 있던 바로 그때.

▶ 새로운 멤버가 조원으로 합류하였습니다.

벨지오스를 처단하는 것에 대한 의사의 합치와 함께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딘의 이름이 조원 리스트에 추가 되었다.

【조원 리스트】 (5/6)

1. 전사 (티마란)

2. 기사 (게르딘)

3. 법사 (보르가넨)

4. 궁수 (신태주)

5. 사제 (피렐레)

6. 도적 (???)

“허허, 역시 자네라면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네.”

태주가 제시한 요구 사항을 가뿐하게 충족시킨 주교가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게르딘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오늘 안으로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를 마치는 대로 무리에 합류하게.”

“예, 주교님, 하지만 이왕이면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동료 성기사들과 함께 가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태주와 보르가넨의 실력이 못미더웠던 게르딘이 처음으로 주교의 멤버 구성에 난색을 표했다.

“나도 그러고 싶네만, 대체 누가 자네를 따라 비테론으로 갈지 의문이군.”

주교가 자신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는 성기사와 성기사 후보생들의 나약한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주교의 말에 주위를 돌아본 게르딘이 동료들의 싸늘한 반응에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복귀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임무인 만큼 믿고 의지할 만한 동료들인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게르딘이 태주와 보르가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주교에게 부탁했다.

“두 분 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게르딘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승품의 성패가 달린 주교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두 사람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네. 그러시죠.”

물론 태주의 입장에서도 주교의 말에만 순응할 게 뻔한 게르딘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적어도 한 번쯤은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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