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106화 (106/242)

106. 조 편성 (8)

“뭐? 성기사?”

태주의 계획을 들은 보르가넨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격하게 맞장구를 쳤다.

탁!

“아아, 그러고 보니 벨지오스의 하수인들은 다 흑마법에 걸렸으니까 자네 말대로 평범한 기사보단 성기사를 데려가는 게 더 낫겠군.”

“피렐레 사제님, 혹시 주교님을 만나러 갈 때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교회에 속한 성기사를 합류시키기 위해선 주교를 만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

태주의 부탁을 들은 피렐레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교님을 소개해드릴 순 있지만, 성기사를 내어달라는 용건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겁니다.”

“왜죠?”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우선 교회 측의 공식적인 요구가 아닌 형제님 개인의 필요에 의한 주관적인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원칙에 대한 예외를 적용할 만큼 저의 신분이 확실해야 되겠네요.”

아쉽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 외지인에 종교적인 연결고리도 없는 태주가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네. 더구나 주교님의 경우 현재 대주교로의 승품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교 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하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평소 성격도 매우 깐깐하신 편이고요.”

“으음. 그럼 주교 평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명분이 무엇인지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네요.”

그나마 현실적인 접근법을 찾은 태주가 주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결정적인 구실을 찾기 위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

그리고 이어진 침묵의 시간.

보르가넨과 피렐레 역시 태주를 돕기 위해 머리를 맞댔지만,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

“피렐레 사제님.”

제일 먼저 정적을 깬 건 태주의 목소리였다.

“네. 말씀하십쇼.”

“혹시 비테론 교회에 종교적인 가치가 높은 성물 같은 것이 있습니까?”

“네? 성물이요?”

질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피렐레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이왕이면 다른 교회에선 볼 수 없는 비테론 교회만의 성물로요.”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중요한 성물을, 그것도 사제와 성도들을 무참히 살해한 흑마법사를 단죄함과 동시에 회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어떨까 싶어서요.”

“글쎄요. 확실히 성공만 하면 대주교로의 승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적인 공적이 되겠지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위험 부담이 있는 일엔 극도로 몸을 사리고 계신 상황이라…….”

주교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피렐레가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회수할 만한 성물이 있다면 주교님을 뵙기 전에 말씀해주세요.”

모든 경우의 수를 열어둔 태주에겐 피렐레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흐릿한 기억마저 하나의 히든카드가 될 수 있었다.

“비테론 교회만의 성물이라…….”

태주로부터 고민할 거리를 넘겨받은 피렐레가 턱을 매만지며 조건에 부합하는 성물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하나 있습니다!”

비테론 교회의 내부를 머릿속으로 샅샅이 뒤져보던 피렐레가 몸을 움찔거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비테론 교회의 지하엔 사제들의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순교를 당한 성인의 유해 일부가 성유물로 모셔져 있습니다.”

“성인의 유해 일부요?”

“네. 정확히 얘기하면, 종교적 박해로 인해 단두대형을 당한 성 헤리투스의 두개골이 황금으로 장식된 성유물함 속에 안치되어 있는데, 그거라면 종교적인 가치도 높고,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유해의 특성상 회수할 명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으음. 다행히 제가 원했던 성물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네요.”

피렐레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태주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잠시 후.

교회 뒤편에 위치한 작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결의를 다졌다.

“이제 곧 가벼운 산책을 위해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주교의 일과를 파악하고 있던 피렐레는 딱딱한 주교실보다 아기자기한 정원에서 대화를 풀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근데 주교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은 없나? 내 오랜 경험상 부탁할 때 누가 곁에 있으면, 꼭 당사자도 아닌 것들이 훼방을 해서 말이야.”

망을 보듯 정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보르가넨이 피렐레에게 물었다.

“아니요. 조용한 사색을 위해 늘 다른 사제들의 동행 없이 혼자서만 산책을…… 어! 저기 오십니다.”

보르가넨의 현실적인 우려에 답하던 피렐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교가 나타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럼 작전대로 제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약속된 만남이 아닌 만큼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가 불필요한 위압감을 줄 필요까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익숙한 얼굴인 피렐레가 나서 주교와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할 예정이었다.

“주교님, 산책하러 나오셨습니까?”

주교가 정원 안으로 충분히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피렐레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 피렐레, 자네도 산책 중인가?”

우연한 만남이라 여긴 주교가 별다른 의심 없이 온화한 얼굴로 화답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정원엔 어쩐 일인가?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네. 제가 있던 비테론 교회와 관련된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비테론? 갑자기 거긴 왜…….”

고민의 원인을 들은 주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사실 오늘 모험가 두 분이 찾아와 제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흥미로운 제안? 그게 뭔가?”

주교가 피렐레의 뒤편에 서 있는 태주와 보르가넨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저, 그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주교님과 동료 사제들은 물론 비테론 교회의 성도들까지 무참히 살해한 흑마법사 벨지오스를 단죄할 수 있게 힘을 보태달라고 했습니다.”

“오, 주여.”

주교의 첫 반응은 피렐레와 마찬가지로 회의적이었다.

“난 자네가 이런 무모한 제안을 받고도 고민을 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네.”

성유물과 성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분위기로 봐선 주교의 수락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자네 혹시 뻐꾸기의 습성을 알고 있나?”

“네? 뻐꾸기요?”

피렐레가 맥락에서 벗어난 것 같은 주교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제에게 있어 잡념은 남의 둥지에 자리 잡은 뻐꾸기 새끼와도 같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크기지만, 부질없는 고민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뻐꾸기 새끼처럼 말씀이 들어갈 자리를 서서히 빼앗게 되지.”

“…….”

자신 있게 나섰던 피렐레가 생각이 분산되는 것을 경계하는 주교의 단호한 지적에 말문이 막혔다.

“사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게.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사제 수행의 본질적인 부분이니 말이야.”

피렐레의 팔뚝을 가볍게 토닥인 주교가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산책을 이어갔다.

바로 그때.

“인사가 늦었습니다. 주교님.”

보르가넨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태주가 주교의 앞을 가로막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형제님들이 바로 피렐레 사제가 말한 모험가 두 분이시군요.”

두 사람에게 호의적 일 리 없는 주교가 고고한 태도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눴다.

“네. 제가 바로 주교님께서 말씀하신 그 뻐꾸기 새끼입니다.”

“오오, 이런. 형제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으니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엔 주교가 태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이해는 저희가 구해야죠.”

“……?!”

태주의 당돌한 응수에 흠칫한 주교가 숙였던 고개를 채 들기도 전에 눈동자부터 치켜떴다.

“피렐레 사제님은 저희와 함께 비테론으로 갈 겁니다. 지금도 그 말씀을 드리기 위해 주교님을 뵈러 온 거고요.”

“피렐레,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에 실패한 주교가 피렐레를 매섭게 노려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이미 마음을 굳히고 온 피렐레가 주교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사제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러한 연유로 주의 곁에 간다면 순교로 인정되기 어려울 걸세.”

피렐레의 선택이 못마땅했던 주교가 성인으로 추앙될 수 있는 순교자의 기준을 거론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바로 그때.

“네 어차피 살아 돌아올 거라 순교로 인정되긴 어렵겠죠.”

성직자들의 대화에 끼어든 태주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주교님, 저희는 주교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드리려는 겁니다.”

“도움이요? 허허, 제가 언제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까?”

태주의 능력을 얕본 주교가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현재, 대주교로의 승품 적격성을 심사하기 위한 주교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보게 피렐레, 자네 진짜.”

내부 정보가 발설되었다는 것을 안 주교가 유력한 용의자인 피렐레를 쏘아보며 인상을 구겼다.

“물론 적격 심사 중인 후보가 한 명은 아닐 테니 아직 확정되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지금 제가 떨어지길 바라는 겁니까?”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반대요?”

“네. 제가 주교님을 대주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허허, 어떻게 말입니까?”

태주의 호언장담을 다급할 때 튀어나오는 허언 정도로 여긴 주교가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다른 주교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큰 공적을 세울 수 있게 해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베로닌의 주교가 신성 모독을 자행한 벨지오스를 단죄하고 비테론 교회에 있는 성유물을 회수하는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으음. 그럼 확실히 다른 주교들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긴 하겠군요.”

태주의 솔깃한 제안을 들은 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신 베로닌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성기사 한 명을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주교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한 태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론 위험 부담을 싫어하는 주교의 소극적이고도 깐깐한 성격이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었지만.

“허허, 꽤나 성급하신 분이군요.”

상대방으로 하여금 맥이 탁 풀리게 만드는 주교의 진전 없는 화법에 세 사람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분명 이상적인 계획이긴 하지만, 현실적인 계획인지에 대해선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저의 제안을 거절하시겠다는 겁니까?”

“허허, 전 그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시간이 없다면요.”

주교의 궁색한 변명을 단칼에 끊은 태주가 곁에 있던 보르가넨의 상의를 움켜쥐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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