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그리에이터 (4)
- “아아, 진짜 그러면 되겠네.”
- “그래. 얼마나 대단한 영상인지 한번 보자.”
- “에이, 당연히 서혜린이 나온 것보다 재밌으니까 끝까지 반대했겠지. 안 그래?”
- “와아, 부담감 장난 아니겠는데? 이 정도면 거의 가수 다음으로 노래하는 느낌이잖아.”
- “한마디로 모 아니면 도지.”
- “도지?”
- “나 같으면 지금이라도 괜찮다고 할 것 같은데.”
- “글쎄. 자존심상 그렇게는 못 할걸?”
정 교수의 결정을 환영한 학생들이 비꼬는 말투로 질투의 화신을 압박했다.
물론 당사자 역시 상황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불리하게 흘러갔음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 이 씨, 이거 이러다 개쪽만 당하는 거 아니야?’
슬그머니 손을 내린 최후의 1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지를 움켜쥐었다.
“자, 그럼 합의가 된 것으로 알고 영상을 이어서 볼게요.”
- “네.”
- “빨리 틀어 주세요. 현기증 날 것 같단 말이에요.”
- “죄송하지만, 소리 조금만 키워주시면 안 될까요?”
- “교수님, 최고 화질로 한 거 맞으세요?”
- “근데 불 끄고 보면 더 잘 보이지 않나?”
- “뭐야, 극장판이야?”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늘어놓던 학생들이 편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잠시 후.
- “우와, 벌써 끝났어?”
- “재밌네. 길이도 적당하고.”
- “자막에 쓴 드립들도 미쳤던데? 거의 인터넷 망령 수준이야.”
- “자막도 자막인데, 개인적으론 편집이 되게 깔끔한 거 같아. 화면 전환도 빠르고.”
- “폰트나 브금처럼 서브적인 디테일에도 세심하게 신경 쓴 게 티가 나.”
전문 인력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한 덕분에 감상을 마친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상의 퀄리티에 대해 입을 모아 칭찬했다.
- “근데 서혜린하고의 케미가 의외로 잘 맞지 않냐? 차 안에서의 티키타카도 자연스럽고.”
- “그러게. 살짝 로코 같은 느낌도 나던데?”
- “심지어 태주가 화면발이 잘 받아.”
- “어, 너도 느꼈어? 아까 서혜린이 운전할 때 조수석 뒷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옆선이 와아……. 나 순간 설렜잖아. 이참에 구독이나 할까?”
- “난 이미 구독도 누르고, 인수다 가서 팔로우도 했어.”
- “뭐야, 벌써?”
- “서혜린이 왜 친근하게 대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헌터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여학생들도 태주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공유하며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야, 아까 순간 이동 대박 아니었냐? 난 무슨 CG인 줄.”
- “그러게. 강의실 이동할 때 쓰면 뛰어갈 일도 없고 완전 딱인데.”
- “나는 그 서혜린이 필요한 물건을 막 바로바로 꺼내는 것도 신기하던데?”
- “아아, 아까 그 헤어롤이랑 빨대 같은 거 꺼낼 때? 그게 바로 인벤토리 능력이잖아.”
- “인벤토리가 있으면, 전공 서적을 안 들고 다녀도 되겠지? 솔직히 신입생 땐 막 자랑하려고 지하철 탈 때도 무리해서 들고 다녔는데, 한 3년 정도 다니니까 분철에 스프링 제본까지 해도 너무 귀찮고 무거워서…….”
- “근데 2.5kg짜리 전공 서적 들고 다니면, 근손실도 안 생기고 좋지 않아?”
- “아참, 근력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까 현장에서 촬영 장비 옮기는 거 도와줄 때 봤어? 다른 사람들은 막 3~4명씩 달라붙어도 낑낑대는데, 쟤는 무슨 빈 박스 들고 가는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어. 완전 괴물이야 괴물.”
- “아아, 근수저 개부럽다. 저 정도면 3대 500도 껌이겠지?”
- “쟨 각성자잖아. 우린 일반인이고.”
- “근데 각성자라고 다 힘이 센 건 아닐걸?”
- “맞아. 내 고등학교 동창 중에 다른 학교 다니는 B급 궁수가 있는데, 일반인보다는 세도 절대 저 정도까진 아니었어.”
- “그냥 S급이 아니라 2차 각성에 성공한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잖아. 그럼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겠지.”
영상 속 태주가 보여 준, 각종 스킬들에 놀란 학생들이 능력에 초점을 맞춘 대화를 나누며 두 번, 세 번 감탄했다.
- “마지막에 인사도 없이 도망가는 추노 엔딩까지 정말 완벽했다.”
- “서혜린 벙찐 표정은 이미 캡처돼서 짤로 돌았을 거 같은데?”
- “풉! 난 서혜린이 혼자 집에 가려고 운전대 잡았을 때 완전 빵 터졌는데.”
- “저기, 2편은 언제 올라와요?”
- “그냥 미리 알림 설정을 해놔.”
본인에게 직접 업로드 일정을 물어보고 싶을 만큼 다양한 후기를 양산한 태주의 영상은 이미 콘텐츠 제작의 이해를 수강한 학생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물론 태주의 영상이 호평을 받을수록 유일하게 거부 의사를 표한 단 한 사람, 바로 서혜린의 팬이자 태주에 대한 질투심으로 똘똘 뭉친 최후의 1인은 더 큰 압박감과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만.
“자, 그럼 영상을 다 봤으니까 이제 약속대로 반대 의견을 낸 학생의 채널을 살펴볼게요.”
딸깍! 딸깍!
마우스를 쥔 정 교수가 검지를 까딱거리자 평론가로 빙의한 학생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채널명: 노현철의 수학부심]
[구독자: 2명]
- “엥? 꼴랑 2명?”
- “오오, 실명 쓰는 패기는 인정.”
- “뭐야, 이거 보여 주려고 어그로 끈 거야?”
비교 자체가 무색한 현격한 체급 차이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포기NO!) 수포자를 위한 중1 수학 60분 컷!]
[조회수: 5회]
[0(모) : 0(윷) : 0(걸) : 0(개) : 0(도)]
“수포자? 아니, 교육방송이야 뭐야?”
- “이건 뭐, 너무 유익해서 깔 수가 없네.”
- “근데 우리가 이걸 꼭 봐야 되나?”
- “왜. 미지수 X와의 만남이 설레지 않아?”
- “무리수는 중1 때 안 가르치지?”
- “뭐야, 시간은 또 왜 이렇게 길어?”
- “러닝 타임 60분이 킬포네.”
- “그럼 1시간 동안 혼자 떠드는 거야?”
- “참나, 수포자가 그 시간 동안 앉아 있기도 하겠다.”
- “그보다 본인은 60분짜리 영상을 준비했으면서 고작 20분짜리 영상에 태클을 건 거야?”
- “심지어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자신의 시간을 양보하면서까지 관심 없는 영상을 봐야 되냐고 그랬어.”
- “우와, 지금 내 심정이 딱 그건데.”
- “어차피 1~2분 틀다 말 거 그냥 대충 보고 넘겼으면 좋겠다.”
- “그나저나 조회수가 5인데 한 명도 평가를 안 했네?”
- “심지어 악플보다 무섭다는 무플이야.”
- “듣다가 다 나간 거 아니야?”
- “요즘 중1들 인내심 심각하네. 라떼는 한번 앉으면 3~4시간씩 공부했는데.”
- “야, 너 지금 한국대에서 공부 자랑하는 거야?”
평가할 의욕마저 사라진 아이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와아, 나보다 인기 없는 채널은 또 처음보네.”
영상 공개 이후 줄곧 의기소침해 있던 원무가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태주야, 황당하지? 황당할 거야.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너를…….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부쩍 말이 많아진 원무가 멀리 있는 현철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아, 수학을 포기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재능 기부 형식의 영상이네요.”
채널의 성격을 확인한 정 교수가 영상을 클릭하려던 바로 그때.
“저, 교수님!”
수치심의 한계를 느낀 현철이 다급한 목소리로 정 교수를 부르며 번쩍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영상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왜죠? 조금 전엔 분명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고…….”
“아니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급한 나머지 정 교수의 말까지 끊은 현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음 채널로 넘어갈게요.”
엄 교수가 현철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윷튜브 창을 닫았다.
- “이야, 이번에도 혼자만 손을 들었네.”
- “영상 공개 멈춰!”
- “따로 즐겨찾기 해놨다가 나중에 불면증 오면 봐야겠다.”
- “와아, 그건 진짜 두 번 죽이는 거 아니냐?”
- “이러니 사탄이 일자리를 잃지.”
물론 영상의 공개 여부를 떠나 노현철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지만.
*
*
*
시계를 확인하는 학생들이 부쩍 많아졌을 무렵.
“휴.”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채널을 가까스로 소개한 정 교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다음 시간에도 재미있는 콘텐츠 기대할게요.”
- “네!”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태주야, 우리도 그만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원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제 수식어가 하나 또 생겼네? 100만 윷튜버.”
원무를 따라 일어난 소영은 책상 위에 걸터앉아 혼잡해진 입구가 한산해지길 기다렸다.
바로 그때.
“안녕하세요.”
시종일관 도도함을 유지했던 먹빵여신 임지수가 태주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순간, 태주에게 도전장을 내밀러 왔다고 착각한 원무와 소영이 지수의 등장에 경계심을 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태주가 용건을 말할 때까지 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갑자기 아는 척을 해서 의아하셨죠? 사실 콘텐츠가 너무 재미있어서 칭찬해드리려고 왔어요. 뭐, 은색 말판이 전부인 제가 100만 윷튜버에게 칭찬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좀 우습지만……. 아, 그리고 구독에 모도 누르고 알림 설정까지 했어요.”
태주의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당황한 지수가 합장을 한 채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저도 구독 리스트에 먹빵여신님 채널을 추가할게요. 물론 본계정이랑 부계정 둘 다.”
“아아, 너무 감사해요. 사실 처음엔 1위 자리를 뺏긴 것 같아서 좀 질투도 나고 그랬는데, 이젠 아니에요. 뭐, 워낙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덕분에 새로운 시도에 소극적이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엔 먹방이 아닌 의외의 콘텐츠에도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지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해맑게 말했다.
“네. 저도 응원할게요.”
“와아, 응원해 주신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아, 그리고 같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태주님의 인기에 묻어가려는 게 아니라 진짜 팬심이 생겨서요.”
“네, 뭐.”
“아, 감사합니다. 혹시 선호하는 앱이나 필터가 있으세요?”
얼른 휴대폰을 꺼낸 지수가 태주의 곁에 바짝 붙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냥 편하신 대로.”
“아, 그래요? 그럼 보정이 필요 없는 외모시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찍을게요.”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연사 모드라는 것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외로운 시간이 길었던 태주에게 있어 팬 서비스는 언제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바로 그때.
“저기요.”
태주의 미니 팬미팅을 지켜보고 있던 노현철이 슬그머니 다가와 비장한 목소리로 대화를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