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개강 2주차 (4)
잠시 후.
쉬이익! 탁!
태주의 손끝을 떠난 1000번째 화살이 승부의 마침표를 찍듯 과녁의 정중앙에 시원하게 꽂혔다.
[X]
발사와 동시에 희범을 돌아본 태주가 바닥에 뜬 엑스 표시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넌 나한테 안 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 “오오, 10000점!”
- “우와, 이게 되네?”
- “게다가 시작과 끝이 엑스텐이야.”
- “아아, 교수님이 이걸 봤어야 되는데.”
태주의 성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발도 빠짐없이 목격한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 “근데 희범이 형 이제 어떡하지?”
-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잘리고, 돈 내고, 사과한 다음에 태주 따까, 아니, 서포터 역할이나 하는 거지 뭐.”
- “하긴,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본인이 이길 것 같아서 수락한 내기니까.”
태주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던 아이들이 유일하게 웃지 못하고 있는 희범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뭐 해. 빨리 안 갔다 오고. 고맙단 인사 안 들을 거야?”
태주가 마지막 67번째 화살 회수를 지시하며 희범의 패배감을 극대화시켰다.
“이런 씨…….”
태주에게 제대로 굴욕을 당한 희범이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과녁을 향해 달려갔다.
“그냥 태주가 태주 했네. 희범이 형이 희범이 형 했고.”
태주가 대신 복수해준 것 같은 통쾌함을 느낀 세준이 희범의 애잔한 뒷모습을 후련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태주야, 이건 콜린스 경도 못할걸? 우리 아버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세준이 퀸스맨의 수장이자 6차 각성 궁수인 개리 콜린스와 5차 각성 궁수인 자신의 아버지까지 거론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
그 사이 돌아온 희범이 동기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화살 뭉치를 내밀었다.
“고마워.”
태주가 약속대로 67번의 왕복 끝에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하아……. 이건 뭐 할 말이 없네.”
깊은 한숨을 내쉰 희범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태주의 압도적인 실력 앞에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 뭐, 권한도 자격도 충분하다는 거 잘 알았고. 교수님들이 왜 아티팩트까지 주면서 특별대우를 하셨는지도 이제야 알겠어. 내가 실수했다. 월권행위 아니냐는 말 취소할게. 그리고 분위기 흐려서 다들 미안해. 임세준 너한테 인신공격한 것도. 50만 원 벌금은 조만간 총무인 세준이한테 줄게. 물론 비공식 서포터인지 뭔지도 한 학기 동안 군말 없이 수행할 거고.”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희범이 진심 어린 사과를 시작으로 태주의 요구사항들을 하나씩 이행해 나갔다.
“그럼 이제 난 궁수 모임에서 완전히 제명된 거지? 하하. 이거 와펜도 달아보기 전에 잘렸네. 아무튼 모범을 못 보여서 면목이 없다. 대신 졸업할 때까지 계속 마주쳐야 되니까 너무 미워하진 마. 앞으론 민폐도 안 끼치고, 갈등을 유발하지도 않을 거니까.”
갈 곳을 잃은 시선과 씁쓸한 웃음.
말하는 내내 불필요한 손동작이 많아진 건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다는 민망함과 궁수 모임을 떠나기 싫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아니. 아직 제명된 거 아닌데?”
태주가 활과 함께 희범이 건넨 화살 뭉치를 집어넣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다들 기억 안 나? 난 분명 특정인을 지목한 게 아니라 점수가 가장 낮은 사람을 제명시키겠다고 했는데.”
순간, 희범을 비롯한 11명의 팀원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들 내 뒤에서 구경만 하느라 10000점은커녕 1000점, 아니, 100점도 못 쏘지 않았어? 이 정도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태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의 희범과 눈을 마주치며 궁수 모임에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이번 승리로 궁수 모임의 기강을 확립함과 동시에 비공식 서포터까지 얻게 된 태주의 입장에선 잘못을 한 팀원을 냉정하게 내치는 것보다 희범의 난처한 상황을 이용해 진정한 리더의 이미지를 챙기는 것이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통제실에서 지켜보고 있을 엄 교수의 눈에도 갈등을 또 다른 갈등이 아닌 화합의 도구로 활용한 태주의 판단이 기특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태, 태주야…….”
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관용에 당황한 희범이 숨을 곳을 찾고 싶을 만큼 초라해진 자신을 반성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 “뭐야, 그럼 태주가 희범이 형을 안 자른 거야?”
- “정확히 말하면, 안 자른 게 아니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거지. 뭐, 내가 태주였다면 저렇게까지 못했겠지만.”
- “그래서 태주가 진정한 리더 아니겠어? 솔직히 실력만 있고 포용력이 없으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잖아.”
- “하긴, 고작 12명밖에 없는 궁수 모임인데, 앞으로 4년간 희범이 형만 쏙 빼놓고 우리끼리만 뭉치는 것도 좀 그렇긴 해.”
- “사실 나도 태주가 진짜 제명시키면 어떡하나 좀 걱정했는데……. 아, 물론 벌금이랑 비공식 서포터에 대해선 무조건 찬성이고.”
태주의 예상대로 희범을 이용한 이미지 관리는 성공적이었다.
“이야, 와해되기 직전이었던 궁수 모임을 다시 끈끈하게 만들다니. 역시 넌 우리랑 그릇부터가 달라.”
태주의 넓은 아량에 탄복한 세준이 엄지를 치켜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 “그래. 그러니까 앞으론 회장이나 클래스 리더에서 물러나겠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 막말로 네가 아니면 우리 중에 누가 그 역할을 감당하겠어. 안 그래?”
- “당연하지. 아마 다른 클래스 들도 리더가 바뀌는 걸 인정하지 못할걸? 그나마 태주가 있으니까 만만하게 못 보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고.”
대체불가의 존재가 된 태주의 입지는 궁수 모임 내에서 더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세준아, 지난 시간에 뽑아둔 내 마지막 화살, 아직도 가지고 있어?”
태주가 엄 교수의 번외평가에 사용됐던 체이싱 애로우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아, 그거. 당연히 가지고 있지.”
엄 교수가 태주를 부르는 바람에 대신 화살을 수거했던 세준이 남다른 디자인의 화살 한 개를 화살통에서 꺼냈다.
“여기.”
“어, 그래,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건넨 태주가 세준으로부터 받아든 화살을 바닥에 내려놨다.
“어? 태주야, 너 뭐 해?”
세준을 비롯한 궁수 모임 멤버들이 의도를 알 수 없는 태주의 행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 이거? 와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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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대답을 마친 태주가 엄 교수에게 받은 화살 뭉치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 “어? 저거 그때 리더 투표 때 썼던 거 아니야?”
- “그러게. 저 화살 깃은 내가 따로 주문한 거라 딱 보면 아는데.”
- “태주야,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꺼낸 거야? 설마 우리한테 돌려주려고?”
- “근데 엄 교수님께서 저건 평범한 화살이 아닌 팀원들의 믿음이니까 명예롭게 간직하라고 하지 않았나?”
화살의 출처를 단박에 알아본 아이들이 태주의 주위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바로 그때.
툭! 툭! 툭! 툭!
한쪽 무릎을 꿇은 태주가 앞서 내려놓은 자신의 화살을 기준으로 손에 든 화살 11개를 둥그렇게 배열하기 시작했다.
- “어? 화살을 왜 바닥에 깔지?”
- “근데 이렇게 놓고 보니까 꼭 시계처럼 생겼는데? 1시부터 12시까지.”
- “태주가 12시면, 내 건 4시 방향이네.”
태주의 무릎이 펴진 건 활시위를 끼우는 부분인 노크를 맞댄 12개의 화살이 바깥쪽을 향해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후였다.
- “근데 이게 와펜 디자인이라고?”
궁수 모임 동기들이 머리를 맞댄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
찰칵! 찰칵!
휴대폰을 꺼낸 태주가 화살이 배치된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어차피 제작하기로 한 거 좀 더 일찍 부착하면,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나 궁수 모임에 대한 소속감 같은 게 더 강해질 것 같아서. 뭐,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불필요한 갈등도 줄어들 것 같고.”
- “아아.”
태주의 깊은 뜻을 알게 된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으음. 그러고 보니까 화살의 구도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뭔가 12명의 동기들이 세계로 뻗어나간다는 느낌도 들고.”
- “그래? 난 보자마자 사각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경계와 조준을 떠올렸는데?”
- “그럼 중앙엔 한국대 마크랑 28기 궁수 모임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거야?”
- “화살의 디자인이나 색상을 다르게 해서 12명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뭐, 이니셜을 집어넣어도 좋고.”
단순한 관심을 넘어 적극적인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 궁수 모임 아이들이 태주가 만든 밑바탕에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더해 가며 와펜의 디자인을 완성해 나갔다.
“세준아, 네가 전에 와펜의 제작을 풍림의 홍보팀한테 맡긴다고 그랬지?”
태주가 방금 찍은 사진을 세준에게 보내며 물었다.
“어. 안 그래도 단톡방에서 아이디어를 취합했다가 투표를 진행하려고 그랬어.”
“그래? 그럼 사진은 보냈으니까 일단 후보군에 넣어줘.”
태주가 과잠에 부착할 28기 궁수 모임의 와펜 디자인을 세준에게 제출했다.
- “어? 그냥 투표 없이 이걸로 하면 안 돼?”
- “그러게. 내가 봤을 때도 결속력을 다지자는 느낌이 강한 디자인이라 메시지적인 측면에서도 괜찮은 거 같아.”
거의 모든 아이들이 태주가 제안한 디자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뭐야, 그럼 그냥 이걸로 한다?”
이견이 없음을 확인한 세준이 태주가 보낸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재차 물었다.
- “어.”
아이들이 세준의 물음에 한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그럼 이 구도로 샘플 몇 개를 제작할 테니까 최종 디자인은 나중에 단톡방에서 결정하는 걸로.”
와펜의 제작을 도맡게 된 세준이 바닥에 펼쳐져 있던 화살들을 정성스레 모아 태주에게 내밀었다.
“태주야, 여기. 덕분에 의미 있는 디자인이 나올 것 같아.”
“덕분은 무슨. 그럼. 잘 부탁해.”
세준이 건넨 화살 뭉치를 인벤토리에 넣은 태주가 남은 수업 시간을 체크했다.
“어? 이제 1시간도 채 안 남았는데, 왜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지? 다들 10000점 안 채울 거야? 내가 분명 최저점이 제명된다고 했을 텐데.”
- “아, 맞다! 이러다 희범이 형 대신 내가 잘릴 수도 있는 거잖아.”
- “어! 뭐야! 그거 다 안 잘리는 걸로 결론난 거 아니었어?!”
희범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인 양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사실 엄 교수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아아, 난 아직 10발밖에 못 쏴서 95점밖에 안 되는데.”
- “야, 비켜. 거기 내 자리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이들이 황급히 발사선으로 돌아가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특히 희범과의 내기 전과 달리, 단 한 사람도 태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쏟아내지 않았는데, 이러한 흐름은 모두 리더로서의 권위와 발언권을 실력으로 입증한 태주의 현명한 선택에 기인한 것이었다.
“고, 고마워…….”
태주의 앞을 지키고 있던 희범이 자리로 돌아가기 전,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마우면 가서 점수부터 채워. 지금 혼자만 0점인 건 알지?”
“어? 어, 그래. 알았어. 대신 내가 수업 시간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안 쉬고 쏠게. 진짜야.”
그제야 웃음을 되찾은 희범이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위치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바로 그때.
[“모두 동작 그만.”]
교수실이 아닌 통제실에 있던 엄 교수의 목소리가 궁수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