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개강 2주차 (3)
“뭐? 계산?”
최 총장이 그랬듯 희범 역시 태주의 이의 제기에 눈썹이 움찔거렸다.
“일단 패배의 리스크가 다르잖아. 궁수 모임이야 우리끼리 자발적으로 조직한 거지만, 클래스 리더는 그만두는 순간 학점 보장 어드밴티지를 날리는 거니까.”
태주의 일리 있는 주장에 희범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태주가 회장직에서 내려온다 한들 궁수 모임의 실세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슈팅 글러브까지 챙긴 상황에서 A+의 실력을 지닌 태주가 A0를 보장해주는 리더의 어드밴티지에 아쉬움을 표할 이유도 전혀 없었지만.
- “듣고 보니 그러네. 희범이 형은 궁수 모임에서 나가는 게 다지만, 태주는 회장직도 내려놓고, 실력으로 얻은 클래스 리더의 자리까지 모두 포기하는 거니까.”
- “심지어 내기의 방식도 1000번 연속 10점을 맞혀야 하는 태주에게만 압도적으로 불리해. 희범이 형은 그저 9점짜리 하나만 나와도 이기는 거고.”
- “게다가 교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분위기를 흐린 것도 엄밀히 따지면 희범이 형이잖아. 솔직히 책임을 지려면, 태주가 아니라 희범이 형이 졌어야지.”
불리하게 흘러가는 여론에 부담을 느낀 희범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너희들도 조금 전까진 좋다고 그랬잖아!”
- “…….”
희범에게 동조했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좋아.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계산이 맞는데?”
아이들의 공감을 잃고 고립된 희범이 태주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우선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 대가로 벌금을 부과할 거야. 그리고 이건 제명 여부와 상관없이 28기 궁수 모두가 지켜야 할 신설 규칙이고.”
태주가 동기들의 압박에 떠밀리듯이 내뱉은 희범의 실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어? 벌금은 얼마로 할 건데?”
궁수 모임의 총무인 세준이 본능적으로 액수를 물었다.
“회비의 10배.”
이해를 돕기 위해 회비에 비유하긴 했지만, 앞서 밝혔듯 궁수 모임에서 제명되어 회비 납부의 의무가 사라져도 벌금에 대한 책임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10배?! 그럼 50만 원?!”
생각보다 높은 액수에 세준이 화들짝 놀랐다.
“그만큼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정한 기준이니까 너무하다고는 생각하지 마.”
태주는 희범이 교수님의 눈을 피해 요령을 부리거나 다른 아이들을 꼬드겨 분위기를 흐린 적이 많다는 것을 회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더구나 리더의 역할을 중시하는 엄 교수의 수업 방침 상 팀원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할 경우 그 피해가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벌금 규정을 신설, 오늘과 같은 분쟁을 미연에 방지해야겠다고 판단한 태주였다.
“그리고 직업 탐구1이 종강할 때까지 비공식 서포터로서 리더의 역할 수행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뭐? 비공식 서포터?”
희범을 비롯한 11명의 아이들 모두 태주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주야, 그건 페널티가 아니라 어드밴티지 아니야?”
희범과 대립각을 세웠던 세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득처럼 보이지만, 회귀 전, 종강 선물로 슈팅 글러브를 주었을 만큼 리더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것을 아는 태주의 입장에선 자질구레한 일처리를 떠넘길 수 있는 비서 한 명을 공짜로 얻게 되는 셈이었지만.
“오케이. 그거야 어렵지 않지.”
이때다 싶었던 희범이 태주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며 덥석 미끼를 물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세준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정식으로 사과해. 진심으로.”
“사과? 그래. 까짓것 하지 뭐. 근데 이 모든 조건이 10000점을 1000번 만에 채웠을 때만 유효하다는 건 알고 있지?”
궁수 모임으로부터의 제명 가능성과 50만 원의 벌금, 거기에 비공식 서포터로서의 업무 부담과 진심 어린 사과까지.
회장직과 클래스 리더 사퇴라는 태주의 페널티 못지않게 리스크가 큰 조건들이었지만, 희범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물론 그 여유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건 태주만이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시간도 없는데 빨리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도 10000점까진 9980점이나 남았는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희범이 마치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태주의 발사선 뒤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 “어? 형은 안 해? 아까 태주가 최저점을 기록한 사람은 궁수 모임에서 제명시킨다고 했잖아.”
희범에게 동조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황급히 발사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뭐야, 태주 말만 듣고 내 말은 못 들었어? 내가 분명 직권 제명은 월권행위라 10000점을 채우기 전까진 인정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
세준과 다투는 과정에서 내팽개친 활을 여전히 바닥에 방치해 둔 희범이 팔짱을 낀 채 태주의 과녁을 노려보며 말했다.
- “그래도 형이 3000점 정도는 만들어 둬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
“3000? 일단 태주가 실수하는 것만 보고 시작할 거야.”
12명 중 유일하게 활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범의 눈빛은 엄 교수의 호통에 대한 불안감이 아닌 태주의 실패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태주가 언제 실패할 줄 알고?”
“곧.”
희범은 포수가 타자를 도발해 실수를 유도하듯 태주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속적인 트래시 토크를 날려 점수에 영향을 미칠 작정이었다.
“막말로 화살에 무슨 유도 장치가 달린 것도 아니고…….”
물론 조준된 목표물을 끝까지 따라가는 체이싱 애로우가 희범의 심리전에 흔들려 과녁을 벗어날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쉬이익! 탁!
[10]
체이싱 애로우를 이용하면 1000번이 아니라 10000번 연속으로도 엑스텐을 맞출 수 있었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10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조금씩 목표 지점을 수정한 태주였다.
- “오오, 역시.”
- “엑스텐은 아니지만, 그래도 3번 연속 10점이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의 과녁보다 태주의 과녁을 더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왜 벌써부터 호들갑이야. 아직 997발이나 남았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희범의 입꼬리는 아직 고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로부터 1분 후.
“태주야, 더 이상 쏠 공간이 없는 것 같은데?”
세준이 화살로 빼곡하게 채워진 10점짜리 동심원을 보며 말했다.
“화살 회수는 내 거 할 때 같이 해줄까?”
마나를 소모해 만든 화살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재사용을 하진 않았지만, 표적의 교체를 위해서도 화살의 회수는 필수였다.
“아니. 여기 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괜찮아.”
태주가 심판처럼 서 있던 희범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나?”
희범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아아, 그럼 되겠네. 뭐, 딱히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세준이 태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야, 나 지금 놀고 있는 거 아니거든.”
발끈한 희범이 태주와 세준을 번갈아 쳐다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 화살 회수하러 갈 거니까 발사 중지.”
희범의 변명을 한쪽 귀로 흘린 세준이 조준을 멈추게 한 뒤 표적을 향해 나아갔다.
“뭐 해. 안 따라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주가 희범을 노골적으로 재촉했다.
“어? 야, 난…… 에이 씨.”
너무나도 당당한 태주의 요구에 말문이 막힌 희범이 결국 과녁을 향해 투덜거리며 뛰어갔다.
태주의 현재 스코어는 150점.
초반엔 다른 아이들 역시 10점을 심심치 않게 맞혔지만. 태주에 비해 발사 횟수가 현격히 부족했으며, 5발도 채 쏘기 전에 8점이나 9점이 나와 15번 연속 10점을 맞힌 태주의 위엄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했다.
“야! 여기!”
과녁에서 돌아온 희범이 회수한 화살들을 신경질적으로 건넸다.
표적과의 거리가 그리 먼 편은 아니었지만, 태주가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30미터를 왕복하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희범의 입장에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야, 기껏 갖다 줬는데 고맙단 말도 안 하냐?”
희범이 당연하다는 듯이 화살을 챙긴 태주의 얄미운 태도에 또 한 번 발끈했다.
“앞으로 자주 갈 건데 뭘 할 때마다 인사를 해. 그냥 나중에 한 번에 할게.”
태주가 1000번의 시도 중 15번을 쏠 때마다 화살을 회수한다고 가정했을 때, 마지막 10번을 쏘는 경우를 포함, 희범이 과녁을 왕복해야 하는 횟수는 최대 67회이었다.
“나중에 언제?”
“1000번째 화살을 뽑아올 때.”
성공을 확신하고 있던 태주가 남은 66회의 화살 회수 과정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뭐?!”
아직 985번의 시도가 남아 있었지만, 의심이나 긴장감 따윈 느껴지지 않는 태주의 평온한 눈빛에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뭐지 이거? 이러다 진짜 성공하는 거 아니야?’
덜컥 겁이 난 희범의 입꼬리가 처음보다 살짝 내려와 있었다.
잠시 후.
쉬이익! 탁!
[X]
- “우와! 미쳤다 진짜!”
- “아니, 이게 말이 돼?! 이게 된다고?!”
100번이 넘어가는 시점부터 구경꾼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태주의 뒤에 모여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카운트 업 모드】
[도전자: 신태주]
[목표 점수: 9900/10000]
[소요 시간: 01시간 41분 27초]
[발사 횟수: 990회]
[평균 점수: 10점]
[X10(엑스텐): 341회 = 3410점]
[10점: 649회 = 6490점]
[9점: 0회 = 0점]
[8점: 0회 = 0점]
[7점: 0회 = 0점]
[6점: 0회 = 0점]
[5점: 0회 = 0점]
[4점: 0회 = 0점]
[3점: 0회 = 0점]
[2점: 0회 = 0점]
[1점: 0회 = 0점]
[M(미스): 0회 = 0점]
잠깐의 휴식과 짧은 스트레칭을 제외하곤 온전히 도전에만 집중한 태주가 결국 수업 종료 시간을 여유롭게 남긴 상황에서 성공을 목전에 두었다.
- “희범이 형, 뭐 해! 빨리 안 뛰어가고!”
- “아니, 60번을 넘게 왔다 갔다 했으면 좀 알아서 가야 되는 거 아니야?”
- “그러게. 10000점이 코앞인데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이젠 주변에서 더 희범을 재촉하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런 씨…….’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희범이 태주의 과녁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제발 실수 좀 하라고 이 미친놈아! 제발!’
울상이 된 얼굴과 저점을 찍어버린 입꼬리.
‘아니야.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지. 혹시 또 마지막에 긴장이 풀려서 9점을 쏠 수도 있는 거잖아.’
태주의 실패를 확신하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고, 남은 건 패배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몰골과 혹시 모를 실수를 기대하는 샤머니즘적인 믿음뿐이었다.
물론 경쟁자의 부질없는 믿음을 깨뜨리는 게 태주의 특기 중 하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