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개강 2주차 (1)
“어, 그래. 나가서 할까?”
아이들의 칭찬이 내심 민망했던 태주가 자리도 피할 겸 먼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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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야, 너 조만간 5대 길드의 수장들과 인턴십 논의로 만난다며. 협회장님도 참석하시고.”
복도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세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보력 좋네. 어디서 들었어?”
세준의 아버지가 5대 길드 중 한 곳인 풍림의 임경수 대표인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 차 물어본 태주였다.
“아버지한테. 사실 아버지가 먼저 얘기한 건 아니고, 그냥 네 얘길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왔어.”
“내 얘기? 무슨 얘기?”
“너 지난 주 금요일에 이수 면제로 글로벌 영어 안 나왔잖아.”
“아, 미안. 내가 미리 말 안 해서 서운했지? 어디냐고 문자까지 해줬는데 바쁘다고 설명도 안 해주고.”
최 총장과의 독대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태주가 세준의 볼멘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물론 면제 사실을 미리 밝히지 않은 건 활만 잘 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침묵이었지만.
“아, 그거. 처음엔 살짝 서운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
태주의 예상대로 빠른 인정이 세준의 서운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뭐, 아무튼, 그때 다들 영국의 퀸스맨과 미국의 캘리포니아 불리스에서 온 러브콜 기사 때문에 떠들썩했었거든.”
“러브콜은 무슨. 그냥 관심 표명 정도야. 나한테 직접 연락이 온 것도 아니고.”
정작 당사자인 태주만 호들갑이나 설레발을 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관심을 보이는 게 어디야. 심지어 프로도 아닌 신입생한테. 아마 다른 길드에서 눈독들이기 전에 언론 플레이로 선점하려는 걸 거야. 솔직히 퀸스맨이랑 캘리포니아 불리스가 경솔하게 간만 볼 사이즈는 아니잖아.”
“뭐, 그럴 수도 있고.”
태주가 세준의 추측에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해외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있어?”
본론으로 들어간 세준이 태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진지하게? 아님, 그냥 가능성만?”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태주가 고민해 본 적 없다는 뉘앙스로 태연하게 되물었다.
“진지하게.”
궁수 클래스인 임 씨 부자 모두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를 풍림으로 영입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자 숙원 사업이었기 때문에 세준의 입장에선 태주가 해외로 눈을 돌린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라……. 꼭 지금 대답해야 돼?”
태주는 졸업하기 전까지 선택을 미루어 달라는 최 총장의 제안을 빌미로 무려 3가지 희생을 받아낸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생각이었다.
물론 최 총장이 따로 부탁하지 않았어도 졸업 후 정식 라이센스를 취득하기 전까진 길드와 밀당을 하면서 이득만 취할 계획이었지만.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류정웅이 네가 특별 귀화를 할 수도 있다고 해서.”
“뭐? 특별 귀화?”
‘이것들이 나 없을 때 별 얘기를 다했었네.’
특별 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동기들의 대화가 그토록 심오하게 흘러갔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태주였다.
“아니, 무슨 기사 한 줄에 귀화까지 거론하고 그래.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태주가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귀화까지는 좀 오버지?”
국내 길드와의 계약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던 세준이 태주의 대답에 약간의 희망을 얻었다.
물론 세준의 기대와 달리 태주가 풍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속내를 내비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 돈도 좋고, 해외 진출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대표 헌터로 자리매김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 아니겠어?”
세준이 이런저런 이유를 끌어다 태주를 설득하고 있던 바로 그때.
“곧 수업 시작인데 안 들어가고 뭐 하냐?”
일주일 사이에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은 엄승준 교수가 떡 벌어진 어깨를 앞뒤로 거만하게 흔들며 유유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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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12명 모두 왔으니 따로 출석은 부르지 않겠다.”
오늘도 역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인원이라 가볍게 출석을 생략한 엄 교수였다.
- “네.”
헬스 중독자인 엄 교수의 포스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첫 시간과 달리 군대를 방불케 했던 아이들의 대답과 태도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혹시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 있나?”
건강을 중시하는 스타일답게 수업 전, 부상 등으로 인한 열외 대상자를 체크하는 것 또한 엄 교수의 특징이었다.
- “없습니다.”
옆에 있는 동기들의 안색을 살피던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다들 개인 연습은 충분히 했나?”
- “…….”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있게 대답했던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으음. 그럼 지난 일주일동안 빼먹은 훈련을 몰아서 해야겠군.”
- “아아, 교수님, 안 돼요!”
- “오늘부터 매일매일 연습하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개강 첫 주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엄 교수가 농담조로 던진 이야기였지만, 지레 겁을 먹은 아이들의 목소리에선 다급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뭐지, 이 아마추어 같은 반응은? 아직도 내 수업 방식에 적응이 안 된 건가?”
팔짱을 낀 엄 교수가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두 줄로 선 아이들의 얼굴을 한 명씩 뚫어져라 쳐다봤다.
“클래스 리더. 앞으로.”
엄 교수가 학생들의 만장일치로 리더가 된 태주를 불러냈다.
“네, 교수님.”
“클래스 리더의 어드밴티지가 뭐였지?”
엄 교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불만이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중간, 기말 점수와 관계 최소 A0의 성적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슈팅 글러브에 대한 얘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회귀 전엔 한 학기 동안 고생한 클래스 리더에게 종강 선물로 주어졌지만, 이번엔 블랙홀 게이트를 클리어 할 확률이 가장 높은 태주에게 베팅한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그에 상응하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게 성적을 보장받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클래스 리더라고 해서 수업 중에만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도 다음 수업을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팀원들을 준비시키는 것. 그 또한 리더로서의 역할이자 어드밴티지의 대가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교수님. 앞으론 더 철저히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 다음을 기약하는 건 아마추어의 정신 상태지 프로의 자세가 아니다.”
학생들이 큰 잘못을 한 게 아니란 건 엄 교수도 알고 있었지만, 개인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관성이자 습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태함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학기 초부터 단호하게 아이들을 다그치는 엄 교수였다.
“모든 건 습관이 된다. 성실함도, 게으름도, 노력도, 포기도, 심지어 이기고 지는 것 또한 습관이 되어 너희들의 앞날을 좌우하게 된다. 고작 일주일 빼먹은 훈련? 속으론 날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으로 여기겠지만, 몸이란 건 원래 편한 쪽으로 빠르게 적응하고, 유익한 쪽으로 더디게 학습되는 법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기고, 또 당길 수 있는 꾸준함과 성실함. 이것이 바로 성장의 핵심이자 너희들을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구원해줄 유일한 습관이 될 것이다.”
서툰 화법으로 인해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한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실전 경험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엄 교수의 일침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에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심해라. 연습도 실전처럼, 평시에도 전시처럼 훈련할 수 있는 자만이 작은 격차를 만들어내고, 그 작은 격차를 꾸준히 벌릴 수 있는 자만이 군계 속, 한 마리 학으로 거듭나는 거니까.”
- “…….”
수업 전까지만 해도 취업난 때문에 준비할 게 많다며 캠퍼스의 낭만이 사라진 신입생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던 아이들이지만, 정작 궁수로서의 기본적인 훈련조차 게을리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클래스 리더.”
“네, 교수님.”
“지금부터 수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합산 스코어가 10000점을 넘긴 사람만 먼저 집에 보내고, 나머지는 명단을 정리해서 교수실로 가져와. 참고로 거리는 30미터, 발사 횟수엔 제한이 없다.”
근성 교육을 마친 엄 교수의 만만치 않은 페널티 훈련에 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 “뭐? 10000점? 그럼 10점만 계속 맞춰도 최소 1000발은 쏴야 되는 거잖아.”
- “야, 인간적으로 10점을 어떻게 1000번 연속으로 꽂아. 그냥 수업 시간 내내 쉬지 말고 쏘라는 거지.”
- “하긴, 우리가 무슨 태주도 아니고.”
- “와아, 사방이 CCTV에 컴퓨터 집계 방식이라 1점도 속일 수도 없겠네.”
- “아무리 봐도 일찍 가긴 다 틀렸다.”
게으름에 대한 반성과는 별개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전해보는 극단적인 훈련법에 태주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일제히 혀를 내둘렀다.
“질문 있는 사람?”
엄 교수가 훈련장을 떠나기 전에 형식적인 질문 시간을 가졌다.
- “저, 혹시 중간에 잠깐 쉬거나 화장실에 다녀와도 되나요?”
한 학생이 모두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우선적으로 물었다.
“시간을 안배하는 것 역시 자기 관리의 영역이므로 선택은 자유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개인에게 묻겠다.”
결국 쉬어도 좋고, 화장실에 가도 좋다는 의미였지만,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엄 교수의 한마디가 묘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 “교수님, 만약에 실패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이번에도 역시 모두의 입안에 맴돌고 있던 공통적인 질문이었다.
“도전도 해보기 전에 실패했을 때를 걱정하다니……. 정 그렇게 궁금하면 본인이 직접 실패해 보면 되겠군.”
엄 교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근데 교수님, 그럼 태주는 10000점을 다 쏴도 명단을 제출해야 되니까 집에 못 가는 거네요?”
반면, 태주에게만 해당하는 사적인 질문이었음에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나서는 세준이었다.
“글쎄. 과연 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을까?”
학생들을 일찍 보내주려고 내준 미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엄 교수의 입장에선 세준의 질문이 쓸데없는 걱정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엄 교수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진 것처럼 그러한 반응을 곁에서 지켜보던 태주 역시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