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조별 과제 (11)
잠시 후.
“하아……. 이거 꼴이 말이 아니군.”
동굴을 빠져 나온 티마란이 햇빛에 드러난 자신의 더러워진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부에 감각도 없어진 것 같고.”
거미 몬스터의 체액을 뒤집어쓴 티마란이 마비 효과가 있는 거미줄을 팔에서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자. 일단 이걸로 얼굴이나 좀 씻어.”
보다 못한 태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따 티마란에게 건넸다.
“전사는 아니지만, 악력은 세고, 암살자는 아니지만, 순식간에 적의 배후를 노릴 수 있으며, 법사는 아니지만, 아공간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니……. 궁수가 얼음 화살을 쓰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군.”
태주에게 받은 생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티마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힐까지 가능한 건 아니겠지?”
“글쎄. 딱히 힐이 필요했던 적이 없어서.”
“하하하하! 역시 알면 알수록 재밌는 인간이군.”
태주의 자신감에 혀를 내두른 티마란이 정수리에 생수를 들이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울창한 정글에서 벗어나려면 고생 좀 해야겠군.”
생수로 몸을 닦아내고 있던 티마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돼비게이션이 있으니까.”
태주는 꼬꼬로의 탐색 스킬을 이용해 최적화된 루트로 정글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뭐? 돼비?”
내비게이션을 알 리 없는 티마란이 태주의 비유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바로 그때.
▶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오른쪽 손바닥을 뻗은 태주가 티마란의 발 앞에 꼬꼬로를 소환시켰다.
“놀랍군. 이렇게 큰 멧돼지를, 그것도 산 채로 보관할 수 있다니.”
꼬꼬로를 본 티마란이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일반적인 멧돼지와는 생김새부터가 달랐지만, 오크의 눈엔 그저 양질의 단백질 정도로만 비춰졌기 때문이다.
“꼬꼬로?!”
꼬꼬로가 도끼를 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티마란의 섬뜩한 미소에 놀라 황급히 태주의 다리 뒤로 숨었다.
“꼬꼬로는 식량이 아니라 조력자야. 특히 길이나 중요한 물건을 찾는 데는 아주 선수고.”
“하하하하! 이거 미안하게 됐군. 이봐, 꼬꼬로, 티마란은 절대 동료의 살을 탐하지 않아. 그게 설령 알맞게 살이 오른 멧돼지라 해도 말이야.”
도끼를 등에 짊어진 티마란이 태주의 다리 뒤에 숨은 꼬꼬로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어? 잠깐.”
꼬꼬로를 코앞에서 보게 된 티마란이 아래턱에서 자란 황금색 송곳니에 끼워진 용맹한 오크 전사의 빛나는 송곳니 장식을 발견했다.
“그 송곳니 장식은 오크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린 티마란이 꼬꼬로의 송곳니를 향해 거대한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탁!
태주가 송곳니 장식을 빼내려는 티마란의 손목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꼬꼬로 거야.”
송곳니 장식을 오크의 두상에서 획득하긴 했지만, 조별 과제를 끝으로 남남이 될 티마란보단 주종 관계를 맺은 꼬꼬로의 소유로 두는 편이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송곳니 장식이 오크의 것이라고만 했지 자신의 것이라고는 안 했으니까.’
더구나 티마란의 경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환된 것일 뿐, 오크의 두상과는 아무런 동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오크가 제작한 물건이란 이유만으로 송곳니 장식을 넘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
태주의 악력에 또 한 번 놀란 티마란이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손을 거뒀다.
“예민하군. 난 그저 구경이나 해볼 참이었는데 말이야.”
티마란이 태주에게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며 송곳니 장식을 힐끗거렸다.
“이봐, 꼬꼬로, 티마란은 동료의 물건을 절대 탐하지 않아. 그게 설령 위대한 오크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송곳니 장식이어도 말이야.”
티마란의 강력한 부정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더 이상의 미련을 보이기엔 태주의 눈빛이 너무 매서웠다.
“아아, 덕분에 아주 개운해졌군.”
태주의 저지에 머쓱해진 티마란이 다 쓴 생수병을 돌려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제 돼비인지 뭔지를 이용해서 이동하면 되는 건가?”
“어. 지금부턴 꼬꼬로가 앞장설 거야. 그렇지?”
티마란이 건넨 페트병을 인벤토리에 넣어 머무른 흔적을 없앤 태주가 안정을 되찾은 꼬꼬로에게 가이드를 부탁했다.
“꼬꼬로!”
꼬꼬로가 자신을 보호해준 태주의 지시에 야무지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 줘.”
“꼬꼬로!”
태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로를 탐색한 꼬꼬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로 그때.
▶ [알림] 서브 과제1인 조 편성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태주의 눈앞에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알림] 단, 조별 과제의 경우 일일 과제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과제 수행자의 피로도를 고려, 정해진 지점마다 휴식 의사를 확인할 예정입니다.
과제 중 소모된 체력과 정신적 피로는 현실로 돌아감과 동시에 회복이 됐지만, 이는 곧, 현실로 돌아가기 전까지 누적된 신체적, 정신적 부담이 과제를 수행하는 내내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쩐지 제한 시간이 따로 없더라.’
일일 과제의 경우 제출 기한과는 별개로 제한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이번 조별 과제에선 시간적 제약에 대한 안내를 따로 받은 적이 없었다.
‘어? 그럼 24시간이라고 나왔던 과제 제출 기간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알림] 참고로 휴식을 결정한 뒤 현실로 돌아갈 경우 다음 알림이 뜰 때까지 조별 과제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아아, 그럼 다음 알림이 떴을 때를 기준으로 24시간이란 제출 기간이 새롭게 흐르는 거구나.’
마치 태주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친절한 시스템이었다.
▶ [알림] 단, 휴식을 마친 뒤 조별 과제로 복귀할 경우 진행이 중단된 시점부터 과제를 이어가게 됩니다.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 같은 건가?’
아직은 학기 초라 여유가 있었지만,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부터 쌓이기 시작하는 교수님들의 이기적인 과제 분량에 치이다 보면, 현실 속 시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시스템의 과제마저도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었기 때문에 태주의 입장에선 조별 과제 중에 쉴 수 있는 타이밍을 제공하는 시스템의 배려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 조별 과제를 중단하고 현실로 돌아가시겠습니까? (Y/N)
‘그래. 뭐, 일단 펫도 얻었고, 조원도 한 명 구했으니까.’
초반부터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태주가 큰 고민 없이 예스를 선택했다.
▶ 현실로 돌아갑니다.
*
*
*
개강 2주차 월요일.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태주가 트레이닝 돔 지하에 위치한 궁수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어? 태주야, 안녕.”
- “태주, 하이.”
미리 도착해 있던 동기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어, 안녕. 다들 일찍 왔네?”
- “역시 태주는 오늘도 빈손이구나.”
- “인벤토리 능력 개부럽.”
활과 화살을 무겁게 짊어진 아이들이 휴대폰 하나만 달랑 쥐고 있는 태주의 가벼운 발걸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야, 근데 대학교가 은근히 빡세지 않냐? 신입생이라고 딱히 공부할 게 없는 것도 아니고.”
- “그러게. 막상 입학하고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 웹툰이나 웹드라마에서 보던 캠퍼스 라이프의 낭만도 별로 없는 것 같고……. 혹시 헌터학과라 그런가?”
- “글쎄. 내가 듣기론 각성자의 수가 누적돼서 그렇다던데?
- “각성자의 수?”
- “전국에 헌터학과만 30곳이고, 1년에 입학하는 각성자의 수만 재수생 포함해서 약 2천명이잖아. 졸업생들이 레이드로 먹고 살게 하려면 당연히 빡세게 가르쳐야지.”
- “하긴, 한 해에 목숨을 잃거나 부상으로 은퇴하는 각성자의 수보다 신입생의 수가 훨씬 더 많으니까. 뭐, 다른 학교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고.”
- “막말로 과거에 비해 게이트의 발생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아니고, 상위 20%의 길드가 A급 이상의 쓸 만한 던전을 싹쓸이 하고 있는 마당에, 그저 그런 길드에 들어가거나 그때그때 모인 사람들끼리 공대를 구성해서 레이드를 뛰는, 소위, 막공이나 전전해서 언제 돈을 벌고, 언제 N차 각성을 하겠어. 안 그래?”
- “아아, 그래서 새터 때 선배들이 취업에 필요한 스펙들을 미리미리 쌓아두라고 그랬구나. 일단 졸업장을 따면 스펙을 보정할 기회가 막막하다고.”
캠퍼스의 낭만에서 시작된 대화가 어느덧 지극히 현실적인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 “괜히 역대 최악의 취업난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보통 헌터학과 10대 스펙이라고 그러잖아. 간판, 학점, 인턴, 자격증, 수상 경력, 교수 추천서, 봉사활동, 각성 등급, 리더스 배지, 용돈……. 물론 해외 길드에 취업하려면 어학 점수랑 특수 비자까지 있어야 되고.”
- “야 이 씨, 인간적으로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간단하게 각성 등급으로만 뽑으면 안 돼? 어차피 이 바닥에선 등급이 깡패잖아.”
- “에이, 엄연히 N차 각성이란 게 있는데, 어떻게 포텐 체크도 안 하고 함부로 뽑아.”
- “하긴, 초기 각성이 A였는데, N차 각성에 실패해서 평생 A로만 사는 경우도 있고, 초기 각성은 B였지만, 3차 각성까지 성공해서 S를 찍는 경우도 있으니까.”
- “그래서 길드가 과도한 스펙을 요구하는 거잖아. 던전 경험이 없는 사회 초년생의 N차 각성 확률을 예측하려고.”
랜덤하게 등급이 결정되는 초기 각성과 달리 2차 각성부터는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이었기 때문에 길드의 입장에선 4년간의 결실을 면밀히 검토, 최대한 성실하고, 재능 있는 인재들을 선별하려 했다.
- “아아, 태주는 좋겠다. 취업 걱정이 없어서. 한국대라는 간판에, 수석 입학이라 딱히 학점 걱정도 없고, 세계 최초의 매직 아처에 2차 각성까지 성공했으니.”
- “그러게. 퀸스맨이나 캘리포니아 불리스 같은 세계적인 길드의 러브콜도 받고.”
순간, 현타가 온 아이들의 넋두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 “용돈을 받는 길드도 20곳이 넘고, 입학식 때 리더스 배지도 받았잖아. 게다가 교양 영어도 면제고……. 아마 지금처럼만 하면 나머지 스펙들도 금방 만들걸? 조기 졸업도 거의 확정적이고.”
- “하아……. 갑자기 자괴감이 드네. 딱히 해놓은 것도 없는 것 같고.”
- “그러게. 인벤토리 능력만 부러운 게 아니었어.”
순간, 단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있던 태주에게 동기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바로 그때.
“저기, 태주야, 잠깐 얘기 좀.”
평소와 달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임세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가 대화를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