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조별 과제 (10)
“인간의 손을 맞잡는 날이 오다니.”
태주도 작은 손은 아니었지만, 티마란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악수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물론 티마란이 힘을 주는 순간 으스러질 것 같은 가늘고 긴 손가락과 달리 악력에서 만큼은 오크 전사의 괴력마저 압도한 태주였지만.
“……?!”
힘으로 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던 티마란이 손을 뺄 수도 마음대로 흔들 수조차 없는 태주의 설명할 수 없는 파워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용맹함을 증명한 오크 전사로서 차마 상대방의 힘을 인정할 순 없었지만,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과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만 봐도 티마란의 속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태주였다.
‘끝까지 안 아픈 척하기는.’
티마란과 달리 포커페이스가 따로 필요 없을 만큼 평온하다 못해 여유롭기까지 한 태주가 적당한 선에서 손아귀의 힘을 풀어줬다.
흐음!
초록색 피부 덕분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흥분할 때마다 거세지는 티마란의 콧바람이 팔씨름보다 버거웠던 태주와의 악수를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근데 여긴 어디인데 이렇게 어둡고 서늘한 거지?”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티마란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참 일찍도 물어보네. 진짜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
“너의 그 빛에 눈을 뜨기 전까진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기를 드는 순간 정신을 잃었지.”
티마란이 오른쪽 어깨 뒤로 불쑥 솟아 있는 도낏자루를 오른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올라가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문 앞을 막고 있던 태주가 길을 터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입단 테스트.
이미 동행을 결정하긴 했지만, 거미 몬스터와의 예상치 못한 대결은 티마란의 위기 대처능력과 실력을 동시에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먼저 가. 계단이 좁으니까 발 디딜 때 조심하고.”
태주가 티마란의 거대한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로 그때.
▶ 새로운 멤버가 조원으로 합류하였습니다.
조 편성의 순조로운 시작을 알리는 반가운 메시지가 태주의 눈앞에 떠올랐다.
【조원 리스트】 (2/6)
1. 전사 (티마란)
2. 기사 (???)
3. 법사 (???)
4. 궁수 (신태주)
5. 사제 (???)
6. 도적 (???)
‘어? 아예 조 편성 가이드가 있었네?’
이름엔 물음표가 있었지만, 팀원의 구성 자체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근데 첫 멤버부터 참 예사롭지 않네.’
이쯤 되니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보다 나머지 멤버들의 정체가 더 궁금해지는 태주였다.
그로부터 몇 분 후.
“……?!”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구멍에서 올라온 티마란이 8개의 다리가 모두 잘린 채 죽어 있는 초대형 거미 몬스터의 처참한 사체를 발견했다.
“이렇게 큰 거미는 난생 처음이야.”
홀린 듯이 대왕거미에게로 다가간 티마란이 떨어져 나간 거미 다리의 단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얼어있다. 대체 누가 그런 거지?”
손끝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한기를 느낀 티마란이 감탄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리 좀 비웠다고 그새 또 기어 나왔네.”
뒤이어 올라온 태주가 티마란의 물음에 답하듯 근처에 있던 거미 몬스터를 향해 아이스 애로우 한 발을 발사했다.
쉬이익! 푹!
“헉!”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는 거미 몬스터의 최후를 목격한 티마란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주를 돌아봤다.
“어떻게 저런 일이…….”
“자, 이제 네 차례야.”
활을 거둔 태주가 팔짱을 낀 채 거미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알면 알수록 재밌는 인간이군.”
날카로운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흥미소를 지은 티마란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도끼를 가볍게 뽑아 들었다.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순간, 거미 몬스터를 노려보던 티마란의 도끼날에 파란색 오러가 감돌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엄청난 포효가 동굴 안에 있던 모든 거미 몬스터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오, 이건 뭐 거의 도발 수준인데?’
원래 레이드 중엔 탱커 역할을 맡은 팀원이 어그로를 끌어 딜러들이 편하게 공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줘야 했는데, 태주의 눈엔 티마란의 포효가 바로 그러한 용도인 것 같았다.
“크아!”
붕! 댕강!
티마란이 두 손으로 움켜진 육중한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가르자 거미의 몸이 두부를 자른 것처럼 순식간에 양단되었다.
“크아! 크아!”
붕! 댕강! 붕! 댕강!
거미 몬스터를 두 동강 내는 과정에서 기분 나쁜 체액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마비 효과가 있는 거미줄이 여기저기 들러붙기도 했지만, 티마란은 그 어떤 외부적인 시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야에 들어오는 적들을 빠른 속도로 정리해 나갔다.
‘광전사가 따로 없네.’
조별 과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태주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심화 테스트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 난이도를 좀 높여 볼까?’
▶ 스킬 『도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태주가 어그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티마란의 넓은 등판을 3초 동안 응시했다.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
기세 좋게 나아가던 티마란이 사방에서 빠른 속도로 몰려드는 거미 몬스터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살짝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지목을 당한 대상이 죽기 전까진 임의로 풀 수 없는 무시무시한 스킬이었지만, 어차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기 전엔 개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
“크아! 크아!”
붕! 댕강! 붕! 댕강!
다행히 도끼를 휘두르는 속도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티마란이 느끼는 압박감과 정신적 피로도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비켜라!”
붕! 붕! 붕! 붕! 붕! 붕! 붕! 붕!
짜증과 분노가 극에 달한 티마란이 거미 몬스터들을 향해 벼락같은 일갈을 날리더니 이내 프로펠러처럼 몸을 빠르게 회전시켜 포위망을 좁혀오던 적들을 한 방에 쓸어버렸다.
‘오오, 저런 스킬도 있었네?’
당사자인 티마란은 죽을 맛이었지만, 평가자의 입장에선 혼자 보기 아까운 명장면이었다.
‘일단 저 정도면 합격. 그나마 민폐는 안 끼치겠네.’
더 이상의 테스트는 무의미하다고 여긴 태주가 펫을 소환하려는 의지와 함께 오른쪽 손바닥을 뻗었다.
▶ 펫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그러자 꼬꼬로를 회수하면서 사라졌던 표식이 소환 여부를 묻는 메시지 창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꼬꼬로.”
표식 속에서 빠져나온 꼬꼬로가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태주를 올려다보며 송곳니 장식을 뽐냈다.
“꼬꼬로, 저기 저 오크 아저씨 보이지?”
한쪽 무릎을 꿇은 태주가 꼬꼬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티마란이 싸우고 있는 곳을 보여주었다.
“꼬꼬로?!”
대왕거미에게 그랬듯 티마란에게 돌진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한 꼬꼬로가 거미 몬스터들을 사정없이 갈아버리는 무시무시한 회전 공격에 놀라 황급히 태주의 어깨동무에서 벗어나려 했다.
“꼬꼬로, 우리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꼬꼬로?”
밀실에서의 기억이 마지막인 꼬꼬로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일단 내가 신호를 주면 광휘를 발동시킨 다음에 송곳니 장식이 있던 방으로 무작정 달려. 알았지?”
“꼬꼬로.”
태주의 작전 브리핑을 듣고 있던 꼬꼬로가 무슨 대단한 임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뛰라고 할 때 뛰어.”
태주가 꼬꼬로의 정수리를 3초간 내려다본 뒤 점멸을 이용해 멀찌감치 떨어졌다.
바로 그때.
‘됐다.’
하나 이상의 대상을 지목할 수 있다는 도발 스킬의 특성을 활용, 티마란에게 집중되어 있던 어그로를 분산시키자 거미 몬스터의 절반가량이 방향을 틀어 꼬꼬로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뛰어!”
충분히 어그로가 끌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태주가 거미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출발 신호를 보냈다.
“꼬꼬로!”
광휘 스킬로 거미줄의 마비 효과를 미연에 방지한 꼬꼬로가 돌진 스킬에 버금가는 속도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그럼 이제 티마란을 구해볼까?’
느긋하게 활시위를 당긴 태주가 무리한 회전 공격을 그친 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티마란을 도와 남은 거미 몬스터들을 제거해 나갔다.
“티마란, 설마 벌써 지친 거야?”
화력 지원을 하며 다가가던 태주가 도발 스킬의 존재를 숨긴 채 능청스럽게 물었다.
“지쳐? 내가? 하하하하! 용맹함을 증명한 오크 전사는 절대 지치는 법이 없지! 크아! 크아! 약해 빠진 것들. 싸움이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군! 크아! 크아!”
붕! 댕강! 붕! 댕강!
“아아, 그래? 그럼 난 그냥 빠질까?”
자존심 강한 티마란의 귀여운 허세에 장난기가 발동한 태주가 활시위에서 손을 뗀 뒤 발걸음을 돌리려던 바로 그때.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를 함락시키기 전까진 함께 싸우기로 하지 않았나!”
도와달라는 말을 상당히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한 티마란이었다.
“아참, 그랬지?”
티마란의 핑계에 모른 척 속아 넘어가 준 태주가 도발 스킬의 효력을 종료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사냥에 돌입하기 전, 인벤토리 안에 넣어둔 황금 호각을 꺼냈다.
‘거미들을 아주 깔끔하게 몰고 갔네.’
확연하게 줄어든 거미 몬스터의 숫자를 확인한 태주가 꼬꼬로를 소환하기 위해 황금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
순간, 바닥에 표식이 나타나기 무섭게 점멸을 사용한 것처럼 꼬꼬로의 몸이 순식간에 소환되었다.
“꼬꼬로!”
상당히 긴박한 타이밍에 소환이 된 터라 민망하게도 비명을 지르며 나타난 꼬꼬로였다.
“꼬꼬로, 아주 잘했어.”
태주가 꼬꼬로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꼬꼬로…….”
물론 지칠 대로 지친 꼬꼬로는 표식 안으로 회수 되고 싶다는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태주의 오른손에 들이밀고 있었지만.
“알았어. 그럼 티마란은 나중에 소개해 줄게.”
▶ 회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꼬꼬로를 회수한 태주가 티마란과 함께 지긋지긋한 동굴에서 그만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티마란, 하품이 날 정도로 지루하니까 그만 가자.”
티마란에게 몰려든 거미 몬스터들은 대부분 정리가 됐지만, 조금 있으면, 꼬꼬로를 쫓아갔던 녀석들이 거대한 구멍 안에서 다시 올라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겨우 몸이 풀렸는데 아쉽군! 크아! 크아!”
붕! 댕강! 붕! 댕강!
마지막으로 크게 도끼를 휘두른 티마란이 나가는 길을 알고 있는 태주의 뒤를 따라 있는 힘껏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