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87화 (87/242)

087. 조별 과제 (9)

‘10미터면 설마…….’

거친 생각이 든 태주가 불안한 눈빛으로 반경 10미터 안에 있는 유일한 인물, 아니, 괴물인 오크 전사를 바라봤다.

‘그래도 인물이라고 했으면 최소한 사람이어야 되는 거 아니야?’

태주의 조력자가 된 꼬꼬로도 엄밀히 따지면 멧돼지 몬스터였지만, 오크처럼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몬스터와 팀을 이룬다는 건 게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시스템이 주는 과제가 현실 속 던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선 예외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것도 충분히 흥미로운 경험이었지만.

▶ [경고] 오크 전사가 곧 깨어납니다.

‘왜 조별 과제의 이름이 혼돈의 파티였는지 이제야 알겠네.’

현실을 받아들인 태주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 [경고] 오크 전사는 당신과 같은 목표를 부여받았지만, 당신과 함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목표라……. 으음. 따로 설명할 게 없어서 편하긴 하지만, 거절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게 좀 걸리네.’

▶ [경고] 오크 전사를 제거할 경우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을 새롭게 찾아내야 합니다.

‘아니면 말지 뭘 죽일 것까지야.’

설득하는 쪽은 태주로 정해졌지만, 대화의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 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크흠.”

헤드 랜턴의 불빛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오크 전사가 도끼를 들지 않은 왼쪽 팔로 황급히 눈앞을 가렸다.

“빛나는 얼굴을 가진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크 전사 역시 꼬꼬로와 마찬가지로 헤드 랜턴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어? 의사소통이 되네?’

말귀만 알아듣던 꼬꼬로와 달리 오크 전사는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시스템에 의한 과제 속 오크가 아닌 실제 오크들의 언어를 인간이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내 이름은 신태주.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를 함락시킬 동료를 구하고 있지.”

태주가 오크 전사의 말투를 따라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 나 또한 형제들의 복수를 위해 그곳을 향하고 있지만,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의 함락이라는 목표는 동일했지만, 함락의 동기 자체는 제각각이었다.

‘뭐야, 얜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에 대해 알고 있나 본데?’

조 편성에 적합한 인물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스템의 알림 덕분에 상대가 자신과 같은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메인 과제를 클리어하기 위한 나머지 정보들은 직접 알아내야 하는 태주였다.

물론 배경지식을 부여받은 조원 후보들이 태주에 대한 정보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죽음? 글쎄. 애초에 죽을 생각부터 하고 가니까 죽는 거 아니야?”

“내 형제들은 벨지오스의 계략에 속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발끈한 오크 전사가 바닥에 닿아 있던 도끼를 들어 오른쪽 어깨에 걸친 뒤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벨지오스? 속였다는 건 또 무슨 뜻이지?’

태주가 오크 전사의 알 수 없는 반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태주의 코앞까지 다가온 오크 전사가 뜨겁고도 세찬 콧바람을 황소처럼 뿜어내며 호전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아니. 근데 나랑 안 가면 너도 죽을 거야. 네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태주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오크 전사의 살 떨리는 얼굴을 덤덤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복수를 완성할 때까진 죽을 수 없는 몸이다.”

오크 전사가 날카로운 이빨을 악물며 비장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래? 그럼 잘됐네. 나도 성을 함락시키기 전까진 절대 죽을 수 없거든.”

“아니.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는 네게 과분한 묏자리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겐 그저 늑대 인간의 뱃속이 마지막 목적지일 뿐, 아마 성문을 보기도 전에 그 눈부터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태주의 실력을 알 리 없는 오크 전사가 무례한 호언장담으로 태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준비? 그럼 넌 얼마나 준비됐는지 한번 볼까?”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풀어준 태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그런 몸으로 나랑 싸우겠다는 건가?”

외형적으로 태주를 압도한 오크 전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웃으니까 훨씬 보기 좋네.”

무시무시한 건치 미소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태주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오크 전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 그 웃음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크흡!”

오크 전사가 목덜미를 따끔하게 압박하는 화살촉의 서늘한 감촉에 놀라 거친 호흡을 멈췄다.

“뭐야, 벌써 웃음기가 사라진 거야?”

상대방의 등 뒤로 순식간에 이동한 태주가 노멀 애로우의 화살촉 끝부분으로 오크 전사의 목덜미를 지그시 누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암살자인가?”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오크 전사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곁눈질로 물었다.

“아니. 궁수인데?”

“뭐?! 궁수?!”

어쌔신의 예리한 칼끝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착각한 오크 전사가 태주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 참고로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

태주가 오크 전사의 오른쪽 어깨에 얹어진 육중한 도끼를 힐끗 쳐다보며 경고했다.

“그럼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기 전에 형제들의 곁으로 가 있을 테니까.”

“……?!”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태주의 살벌한 비유에 오크 전사가 또 한 번 흠칫했다.

‘새끼, 제대로 쫄았네.’

헤드 랜턴이 비추고 있는 오크 전사의 초록색 등줄기에선 부끄러운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말이 통할 거 같으니까 하나만 물어볼게. 물론 대답은 ‘예’, ‘아니요’로만 들을 거야.”

“좋다.”

오크 전사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태주의 고압적인 태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은 죽어도 안 갈 거야?”

종종 쓰이는 표현이었지만, 오크 전사의 귀엔 거절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협박처럼 들려왔다.

“…….”

“내가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라고 그랬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는 안 한 것 같은데.”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오크 전사의 앞으로 이동한 태주가 목덜미가 아닌 이마에 화살촉을 갖다 대며 대답을 재촉했다.

“크흡!”

헤드 랜턴의 불빛으로 인한 눈부심과 화살촉에 의한 죽음의 압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오크 전사가 결국 태주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아니요.”

“진심이야?”

“예.”

“네 진심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치밀하고도 집요한 추궁으로 상대방의 배신에 대한 보험을 들어 두려는 태주였다.

“위대한 오크 전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뭐야, 그럼 아무런 담보도 없이 믿음으로 가자는 거야? 널 뭘 믿고? 솔직히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결국 말로 때우겠다는 거잖아. 안 그래?”

오크 전사의 말이 진심일 순 있었지만, 상대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리더십에 의거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조장의 직책을 맡았을 때도 팀원들을 수월하게 이끌 수 있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깐깐한 태도로 말꼬리를 잡은 태주였다.

“으음. 좋다. 그럼 내 목숨과도 같은 징표를 맡기도록 하지. 잠깐 움직일 수 있게 해주겠나?”

깊은 고민에 빠졌던 오크 전사가 태주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얼마든지.”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활시위를 당긴 채 뒤로 물러난 태주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충분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바로 그때.

오른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등에 짊어진 오크 전사가 왼쪽 손목에 끼워진 팔찌를 빼낸 뒤 태주를 향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도록 던졌다.

척!

활시위를 제자리에 놓아 화살을 사라지게 만든 태주가 날아오는 팔찌를 눈앞에서 낚아챘다.

“이게 네가 말한 그 목숨 같은 징표야?”

활을 거둔 태주가 목걸이 사이즈로 보이는 오크 전사의 커다란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용맹함을 증명한 오크 전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팔찌다. 내 선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목숨 같은 녀석이지.”

팔찌의 가치를 설명하는 오크 전사의 눈빛과 목소리에선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크 전사의 명예를 걸고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다. 나 티마란. 간악한 벨지오스의 성채를 함락시키고 형제들의 복수를 완성할 때까지 빛나는 얼굴을 가진 자, 아니, 신태주, 널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거창한 수식어와 함께 본명까지 밝혀가며 동맹을 맹세한 오크 전사, 티마란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태주에게 맡기며 진심을 증명했다.

“잠깐.”

태주가 티마란의 팔찌에 왼쪽손목을 집어넣자 꼬꼬로 때와는 달리 팔찌의 크기가 태주의 손목에 맞게 저절로 줄어들었다.

‘어? 이건 되네?’

이로써 오크의 물건이라 펫 전용이었던 게 아니라 송곳니 장식을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착용할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된 태주였다.

[영웅 오크의 혼이 담긴 포효의 팔찌]

- 등급: 전설

- 근력: 200% 증가

- 공격력: 250% 증가

- 치명타 확률: 75% 증가- 치명타 대미지: 250% 증가- 속성 대미지: 100% 증가

▶ 착용한 아이템으로 인해 전반적인 스탯이 상승하였습니다.

‘우와, 옵션 수치 한번 화끈하네.’

오로지 공격력에만 집중된 버프의 구성에 오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아이템의 경우 원칙적으로 과제 속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과제를 위해 소모된 시간과 스탯은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시스템의 원칙상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규칙이었지만,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원칙적으로’라는 표현이 태주에게 묘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물론 담보의 가치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잠시 착용해 본 것일 뿐, 태주가 오크의 팔찌를 소유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 단, 아이템마다 다른 최저 장학생 레벨을 충족시킬 경우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저 장학생 레벨? 약간 수능 최저 등급 맞추는 느낌인데?’

▶ 해당 아이템을 현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최저 기준은 Lv.20 이상입니다. (현재 Lv.19)

‘레벨 20이라……. 일단 조별 과제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스케일이면 클리어를 하는 순간 1단계는 올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 레벨을 못 맞춘다고 해서 아이템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다음 레벨로 넘어가기 위한 과제 점수 합산의 기준점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고작 1단계 차이라도 9에서 10로 넘어가는 것보다 19에서 20으로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수고로움을 요했다.

“좋아. 믿어줄게. 대신 이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다가 성채를 함락시킨 후에 돌려줄게.”

▶ 접촉한 장비를 인벤토리에 넣으시겠습니까? (Y/N)

스펙 감정을 통해 진정성을 확인한 태주가 티마란의 팔찌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아, 그리고 팔찌는 아공간으로 옮겨졌으니까 날 죽이는 순간 영영 찾을 수 없을 거야.”

마지막 보험까지 완벽히 들어둔 태주가 티마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잘해보자. 티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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