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조별 과제 (2)
‘펫과의 주종 계약?’
지난 40년의 짧지 않은 레이드 역사 동안 몬스터와 대화를 나누거나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례는 단 한 건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물론 소환술을 전공한 일부 법사들이 몬스터를 불러내 딜러나 탱커로 활용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레이드의 조력자 역할을 담당하는 게임 속 펫처럼 훈련과 육성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 상호 작용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거 수락했다가 괜히 짐만 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손전등으로 쓰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가잖아. 은근히 영악한 구석도 있고.’
모든 계약이 그렇듯 태주 역시 꼬꼬로를 유심히 내려다보며 주종 계약의 손익을 따져보고 있었다.
‘아니지. 조금 전에 발산한 마력을 보면 분명 손전등 기능 말고도 숨겨진 능력이 있을 거야. 일단 할 줄 아는 말은 하나지만, 어찌 됐건 말이 통하긴 하니까.’
태주의 표현대로 귀여운 외모와 달리 영악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달리 말하면, 눈치가 빨라 태주의 니즈를 바로바로 캐치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태주의 입장에선 살짝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톡톡.
선택의 시간이 길어지자 꼬꼬로가 태주의 발등을 앞발로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 관심을 끈 뒤 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오디션에 지원한 참가자처럼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기 위한 새로운 스킬을 선보이기 위함이었다.
‘이번엔 또 뭘 보여주려고 그러지?’
왠지 모를 기대감에 태주의 시선이 꼬꼬로에게 고정됐다.
바로 그때.
“꼬꼬로!”
한쪽 벽을 등지고 선 꼬꼬로가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15미터 정도 떨어진 반대편 벽으로 비장하게 돌진했다.
‘으음?’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흡사 대기권으로 진입한 별똥별처럼 꼬꼬로의 몸 전체가 황금빛 오러에 휩싸여 있었다.
‘발산되는 마력의 크기도 그렇고, 스킬의 퍼포먼스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물론 상대를 위협할 만한 외형도 아니고, 탈 수 있는 크기는 더더욱 아니지만, 저 벽을 부술 수 있는 파괴력만 지니고 있다면, 그래서 방심한 적의 허를 찌름과 동시에 1인분의 역할만 수행해줄 수 있다면……’
수락의 기준을 정한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바로 그때.
쿵!
힘찬 발 구르기와 함께 벽을 들이받는 순간, 동굴의 울림에 놀란 박쥐 형태의 몬스터들이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찍찍찍찍!
‘뭐야, 이건 그냥 어그로 아니야?’
꼬꼬로의 돌진 스킬로 인한 몬스터들의 등장에 태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몸 풀기나 해볼까?’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몬스터 떼를 가뿐히 따돌린 태주가 동굴 안에 서식하는 거대한 나방의 몸통에, 게다가 즉사하지 않으면서도 화살이 잘 빠지지 않을 위치를 겨냥해 체이싱 애로우를 발사했다.
날개를 맞출 경우 발버둥을 치는 과정에서 달아날 가능성이 있지만, 몸통을 관통한 화살이 벽을 뚫고 들어가 단단히 박힐 경우 화살을 뽑아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발의 효과는 광범위 했지만, 지목된 대상에게 적의를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 박쥐 몬스터에게 도발을 걸어봤자 같은 편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어그로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기에 박쥐 몬스터의 먹이로 보이는 거대한 나방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었다.
쉬이익! 푹!
백발백중.
태주의 의도대로 화살의 힘에 밀린 나방이 동굴 벽에 그대로 꽂혔다.
바로 그때.
▶ 스킬 『도발』이 발동되었습니다.
태주가 동굴 벽에 고정된 거대한 나방을 3초간 응시해 어그로 상태를 만들었다.
찍찍찍찍! 찍찍찍찍!
그러자 태주와 꼬꼬로를 공격하려던 박쥐 떼가 일제히 방향을 틀어 도발 상태에 빠진 녀석에게로 홀린 듯이 모여들었다.
‘됐어.’
공격 대상을 바꾸는 데 성공한 태주가 이번엔 체이싱 애로우가 아닌 파이어 애로우를 장착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이어진 5초간의 차징.
화살촉에 붙어 있던 작은 불씨는 횃불처럼 커졌고, 태주의 손끝을 떠난 화살은 화염 방사기와 같은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벌떼처럼 모여든 박쥐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쉬이익! 푹! 화르르.
장비에 깃든 속성 대미지 버프들로 인해 증폭된 화염 효과의 위력은 실로 경이로웠다.
찍찍찍찍! 찍찍찍찍!
온몸에 불이 붙은 박쥐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칠흑 같은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고, 이들이 곧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파이어 애로우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 있던 녀석들에게까지 불씨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똑같은 패턴으로 박쥐 몬스터들을 공략한 태주가 마침내 활시위에서 손을 뗐다.
‘몸을 좀 과하게 풀었나?’
동굴 안을 가득 메운 매캐한 연기와 정적.
공개 화형식이 거행된 자리엔 새까맣게 그을린 박쥐 몬스터들의 사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야, 다 끝났으니까 나와.”
상황을 정리한 태주가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인 꼬꼬로를 불러냈다.
“꼬꼬로…….”
레이드 내내 태주의 다리 뒤에 숨어 있던 꼬꼬로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래도 내가 널 거둬주길 바래?”
태주가 길을 막고 있는 몬스터의 사체들을 발로 치워내며 물었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꼬꼬로가 바닥에 코를 박은 채 쥐 죽은 듯이 서 있었다.
바로 그때.
▶ 펫과의 주종 계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꼬꼬로와 메시지 창을 번갈아 바라보던 태주가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점을 Y로 옮겼다.
▶ 계약을 수락하였습니다.
▶ 펫과의 주종 관계가 형성됩니다.
계약의 성립을 알리는 메시지와 함께 태주의 손바닥과 꼬꼬로의 이마에 있던 붉은빛의 문양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꼬꼬로!”
태주가 내린 뜻밖의 결정에 놀란 꼬꼬로가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
“꼬꼬로!”
태주에게 달려온 꼬꼬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잘해서 뽑힌 게 아닌 건 알지?”
“……꼬꼬로.”
잠시 뜸을 들이던 꼬꼬로가 본인이 생각해도 민망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내 생각이 나서 뽑았어.”
태주는 결과를 떠나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애쓰는 꼬꼬로의 모습에서 회귀 전, E급 궁수였던 자신의 험난했던 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가자. 저 안에 뭐가 있든.”
어둠 속을 노려보던 태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꼬꼬로를 앞장섰다.
바로 그때.
▶ 튜토리얼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Y)
회귀 당일, 매직 아처만의 독특한 발사 방식을 일깨워준 튜토리얼 퀘스트, 전설의 시작 때와 똑같은 메시지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튜토리얼?’
발걸음을 멈춘 태주가 뒤따라오던 꼬꼬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도의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는 건 그만큼 펫의 활용도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꼬꼬로와의 만남을 단순한 이벤트 정도로 여겼던 태주지만, 튜토리얼까지 준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 모든 우연이 시스템의 의도적인 개입이자 훈련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튜토리얼 퀘스트는 늘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번에도 역시 태주의 의사를 묻는 선택지엔 Y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오른쪽에 있는 Y를 골라볼까?’
정말 예스만 있는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태주가 이전과 달리 N의 자리에 있는 Y를 선택했다.
▶ 튜토리얼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물론 창의적인 시도와 달리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 [튜토리얼 퀘스트] 펫은 훌륭하다.
‘그렇지. 세상에 나쁜 펫은 없지.’
튜토리얼의 제목에 고개를 끄덕인 태주가 퀘스트에 집중하기 위해 활을 집어넣었다.
▶ 펫은 표식을 통한 소환과 회수가 가능합니다.
‘회수라…… 그나마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일은 없겠는데?’
▶ 또한 표식은 펫을 소환하려는 의지와 함께 나타나며 펫을 회수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평생 안 없어지면 어떡하나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잘됐네.’
마법진과 같이 빛을 발할 뿐, 문신처럼 피부에 새겨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주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표식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다.
▶ 표식이 있는 손바닥이 펫을 향하도록 뻗으세요.
‘오른손으로 이렇게?’
태주가 시스템의 안내에 따라 동작을 취했다.
▶ 펫을 회수하시겠습니까? (Y/N)
예스를 선택하자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꼬꼬로의 몸이 태주의 오른쪽 손바닥에 나타난 황금빛 표식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 회수가 완료되었습니다.
‘어? 근데 진짜 회수와 동시에 표식이 사라졌네? 회수 속도도 생각보다 빠르고.’
태주가 깨끗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이번엔 펫을 소환하고자 하는 위치를 향해 표식이 있는 손바닥을 뻗으세요.
주의 사항을 확인한 태주가 조금 전, 꼬꼬로가 있던 자리를 향해 오른쪽 손바닥을 뻗었다.
‘펫을 소환하고자 하는 의지라……’
튜토리얼의 설명대로 정신을 집중하자 사라졌던 표식과 함께 소환 여부를 묻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펫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예스를 선택하자 회수 장면을 거꾸로 재생한 것처럼 표식 속을 빠져나온 꼬꼬로의 몸이 태주가 지정한 위치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으음. 기존의 인벤토리와는 또 다른 개념인데?’
▶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뭐야, 벌써?’
이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핵심적인 정보만을 공개한 채 튜토리얼 퀘스트가 종료됐다.
▶ 보상으로 새로운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순간, 태주의 눈앞에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황금색 송곳니가 나타났다.
‘이게 뭐지?’
태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송곳니를 움켜쥐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템의 정보가 떠올랐다.
[표식이 새겨진 황금 호각]
- 등급: 없음
- 효과: 멀리 떨어져 있는 펫을 거리와 상관없이 주인의 앞으로 단숨에 이동시킬 수 있음
- 소모 마나: 없음
- 재사용 대기시간: 60분
‘거리와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정찰을 보내거나 역할을 분담해서 개별적으로 활동할 때 좋겠네.’
호각의 표면엔 태주와 꼬꼬로의 이마에 나타난 것과 같은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잘 되는지 한번 시험해볼까? 아니야. 어쩌면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레이드의 시작인데, 쿨타임이 60분이나 되는 비장의 카드를 고작 테스트 따위로 허무하게 날릴 순 없지.’
호각의 성능은 궁금했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를 위기의 순간을 대비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꼬꼬로, 이제 진짜 출발해볼까?”
“꼬꼬로!”
꼬꼬로가 충성을 맹세하는 결연한 눈빛을 보내며 맹수인 양 포효했다.
“근데 설마 평생 그 모습은 아니지?”
성장과 진화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던 태주가 꼬꼬로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꼬꼬로.”
질문의 의도를 눈치챈 꼬꼬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혹시 몬스터를 잡고 경험치가 쌓이면, 성장 속도가 더 빨라져?”
게임 속의 펫을 떠올린 태주가 생물학적인 시간과는 무관한 레벨업 개념의 성장에 대해서도 꼼꼼히 짚고 넘어갔다.
“꼬꼬……로?”
꼬꼬로가 마치 한 번도 몬스터를 잡아본 적이 없다는 뉘앙스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확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럼 내가 직접 확인해봐야겠네.”
모호한 대답을 들은 태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꼬꼬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