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조별 과제 (1)
시스템이 정한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옮긴 태주가 들숨에서 느껴지는 습한 공기에 서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드니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하늘과 구름이 보였고, 주위를 둘러보니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아마존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듯한 독창적인 형태의 동식물들이 익숙한 것들의 틈에 섞여 있다는 정도.
‘정글?’
일일 과제를 오랫동안 수행해 왔지만, 지금처럼 열대우림을 배경으로 한 필드형 던전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 과제를 시작합니다.
메시지를 본 태주가 액티브 스킬을 기계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희귀 등급으로 강화를 마친 고뇌하는 하급 정령의 활과 신성력이 깃든 행운의 목걸이가 각각 왼손과 허전했던 목에, 그리고 무려 전설 등급을 지닌 마르지 않는 풍요의 반지와 피닉스의 집요한 발톱이 태주의 양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장비도 장비지만, 액티브 스킬인 폭주와 패시브 스킬인 저항 역시 태주의 든든한 보험이었다.
‘근데 왜 미션을 안 주지?’
보통, 과제 시작 직후, 주변 상황의 변화를 알리는 경고 메시지들과 함께 목표가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전방을 주시한 채 메시지를 기다려 봐도 도무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태주의 어깨 높이 정도로 자란 풀숲 너머로 미세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태주와의 거리는 약 10미터.
점멸로 접근할 수도, 화살로 일격에 제거할 수도 있는 선택적인 상황이었지만, 감지되는 마력의 크기가 너무 미약해 활시위를 당길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스스스슥.
이윽고 풀숲 너머로 무언가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속도는 어린 아이의 뜀박질 정도.
태주의 예리한 눈동자가 찰나의 깜빡임도 없이 소리를 쫓고 있었다.
‘으음?’
멀어지는가 싶었던 정체불명의 마력이 방향을 바꿔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화살의 종류 정도는 선택해두었다.
▶ 체이싱 애로우[C]를 선택하셨습니다.
‘온다.’
활시위에 손가락을 걸친 태주가 발사 자세를 취하려던 바로 그때.
푸수수숙!
우거진 풀숲을 힘차게 박차고 나온 괴생명체가 태주를 보는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뭐지?’
새끼 멧돼지의 형상을 한 녀석은 온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여 있었고, 아래턱에서 자란 황금색 송곳니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아 엄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별다른 위협을 감지하지 못한 태주가 하트를 뒤집어 놓은 듯한 녀석의 납작한 코앞으로 이동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꼬꼬로.”
태주의 순간 이동에 깜짝 놀란 녀석이 짧은 다리로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연약한 울음소리를 냈다.
‘꼬꼬로? 몬스터치곤 그나마 귀엽게 우네.’
혐오스러운 아가리를 벌리며 날카롭게 울부짖던 기존의 몬스터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그나저나 명색이 조별 과제인데, 왜 조원들은 안 보이고 이 녀석만 있는 거지?’
이름 모를 생명체와 때 아닌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태주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삶은 고구마 한 개를 녀석의 발 앞에 살포시 내려놨다.
식단 관리용으로 보관 중이던 것이긴 하지만, 과제를 위해 소모된 시간과 스탯은 물론 소비된 물건들 역시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저절로 원상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긴, 조원들이 쉽게 모이면 조별 과제가 아니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태주가 별다른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꼬로.”
경계심에 한 발짝 물러났던 녀석이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지직!
좋아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고구마 앞에 들이댄 납작한 코를 바쁘게 움직이던 녀석은 앞발로 톡톡 건드리며 관심을 보이던 태주의 작은 선물을 발굽으로 매정하게 으깨버렸다.
‘생긴 것과 달리 육식성인가? 하긴, 얘가 진짜 멧돼지는 아니니까.’
몬스터의 식성까지 알고 싶진 않았던 태주가 조원들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나려던 바로 그때.
“꼬꼬로.”
발걸음을 돌린 태주의 등 뒤에서 소심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의사소통은 불가능했지만, 마치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뒤를 돌아본 태주가 녀석과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꼬꼬로.”
방향을 일러주듯 오른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던 녀석이 느닷없이 우거진 풀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건가?’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지만, 어차피 메인 과제에 대한 알림이 뜨지 않은 상태라 쫓아가 본다 한들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였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크기도 작고, 정글의 특성상 시야를 가리는 요소들이 워낙 많아 녀석이 발산하는 희미한 마력을 일종의 GPS처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돼비게이션 종료인가?’
녀석이 멈춘 곳에 도달한 태주가 이끼로 뒤덮인 커다란 동굴의 입구를 발견했다.
“꼬꼬로.”
앞발을 꼿꼿이 세운 채 엉덩이만 털썩 주저앉은 녀석이 이번엔 깜깜한 동굴의 입구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뭐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만 들어가라고?”
태주가 녀석의 뻔뻔한 태도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꼬꼬로.”
그러자 녀석이 태주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너 지금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꼬꼬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녀석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좋아. 그럼 내가 준 고구마를 짓밟은 것에 대해 얼른 사과해.”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엿보였던 녀석이 갑자기 딴청을 피우며 애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쭈, 이게 불리할 때만 못 들은 척 하네.”
태주가 앞발로 땅을 다지며 흙장난을 하고 있는 녀석의 능청스러운 모습을 내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태주가 녀석을 왼팔로 번쩍 들어 안아 옆구리에 밀착시켰다.
“꼬꼬로! 꼬꼬로!”
태주의 완력에 꼼짝없이 붙잡힌 녀석이 짧은 다리를 허공에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바동거렸다.
“내려줄까?”
“꼬로로.”
태주의 상냥한 물음에 의미 없는 저항을 멈춘 녀석이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녀석을 놓아주는 척했던 태주가 느슨해진 팔뚝을 타이트하게 조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꼬꼬로!”
*
*
*
입구를 통해 들어오던 희미한 빛줄기마저 잠식될 무렵.
▶ 선택한 물품을 소환하시겠습니까? (Y/N)
옆구리를 데우고 있던 녀석을 잠시 내려놓은 태주가 인벤토리에 보관된 생존 장비들 중 하나인 헤드 랜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딸깍.
착용한 모양새가 그리 근사하진 않았지만, 스위치를 켜는 순간, 한 치 앞도 안 보이던 칠흑 같은 어둠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꼬로로!”
신문물에 감탄한 녀석이 밝아진 동굴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야, 꼬꼬로, 정신 사나우니까 얌전히 좀…… 어?”
본격적인 탐험을 앞둔 태주가 라이트의 위치를 조정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일명 꼬꼬로의 새하얀 털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이내 헤드 랜턴의 밝기 못지않은 따스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
꼬꼬로의 재발견.
태주의 옆구리에 밀착된 채 짐짝처럼 동행하던 볼모가 유의미한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뭐야, 동굴 안이 어두워서 못 들어간 게 아니었어?”
꼬꼬로의 특별한 능력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태주가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꼬꼬로.”
태주의 말귀를 알아들은 녀석이 나름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똑같은 대답만 들을 수 있다 보니 물어보는 입장에선 질문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꼬꼬로.”
“좋은 거야?”
“…….”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하던 꼬꼬로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좋은 게 아니라……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헤드 랜턴을 과감히 끈 태주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동굴의 끝이 궁금하긴 했지만, 서브 미션도 아닌 이벤트성 도전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꼬꼬로!”
돌아가려는 태주를 쏜살같이 앞지른 꼬꼬로가 비장한 울음소리와 함께 길을 막아섰다.
“본인 문제는 본인이 해결하세요.”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꼬꼬로의 최후 저지선을 가볍게 무시한 태주가 냉정한 조언을 마지막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던 바로 그때.
‘……?!’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
꼬꼬로가 있던 바로 그쯤에서 발산되는 무시할 수 없는 마력에 태주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으음?’
발걸음을 멈춘 태주의 시야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꼬꼬로의 이상 행동이 포착됐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갈수록 증폭되는 마력의 크기에 활을 쥐고 있던 태주의 손아귀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인가…….’
결국 최악의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태주가 엄습하는 위기감에 활시위를 당기려던 바로 그때.
‘어? 저건 또 뭐야?’
마법진을 연상케 하는 동그란 문양이 꼬꼬로의 이마 정중앙에 붉을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네.’
알 수 없는 문양의 등장과 동시에 떨림을 멈춘 꼬꼬로가 이번엔 공격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태주의 발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뭐야, 제발 같이 가 달라고 이러는 거야?”
꼬꼬로가 태주의 정강이와 발등에 이마를 문지르며 뱅글뱅글 돌자 단호했던 태주의 마음도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데 이 정도 마력이면 그냥 너 혼자 가도 되지 않아?”
태주가 꼬꼬로를 옆으로 떼어놓기 위해 오른손을 뻗던 바로 그때.
“꼬꼬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꼬꼬로가 하이파이브를 하듯 태주의 손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야, 알았으니까 좀 얌전히…… 어?”
꼬꼬로의 돌발 행동에 황급히 손을 거둔 태주가 접촉 부위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열기에 미간을 좁혔다.
‘뭐지, 이 따스함은?’
순간,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한 태주가 오른손을 뒤집어 손바닥의 상태를 확인했다.
손 전체를 가리는 일반적인 장갑과 달리, 태주가 착용한 슈팅 글러브의 경우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세 손가락(검지, 중지, 약지)과 손등, 그리고 손목만 가려져 있어 따로 장갑을 벗지 않아도 손바닥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게 왜 여기에…….’
놀랍게도 태주의 오른쪽 손바닥엔 꼬꼬로의 이마에 나타난 신비로운 문양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 펫과의 주종 계약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N)
태주의 눈앞에 생소한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