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 신입생이 되었다-78화 (78/242)

078. 던전 실습1 (6)

- “뭐야, 쟤 갑자기 왜 저래?”

순간, 대기실을 나서려던 아이들의 이목이 성규에게 집중됐다.

- “지금 태주한테 소리 지른 거야?”

- “새끼 적당히 좀 하지.”

- “야, 아까 신입생 앞에서 꼰대짓 할 땐 내가 다 쪽팔리더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성규였지만, 자신을 향한 동기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비밀 평가를 앞둔 시점에서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너 앞으로 말조심해라.”

태주의 작전에 제대로 말려든 박성규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물론 박성규의 일그러진 면전에 미소로 화답하고 있는 태주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봐선 딱히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후우.”

분을 삭이던 박성규가 긴 날숨과 함께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땅이라도 밟아 화풀이 하려는 듯 걸음걸이마다 감정이 실려 있었다.

“야, 성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장세종이 박성규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로 그때.

탁!

세종을 힐끗 노려본 성규가 날벌레를 쫓듯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세종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제 갈 길을 갔다.

“……?!”

성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세종의 두 다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씩씩거리며 나아가는 성규의 뒷모습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만큼이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따라가 이유를 묻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세종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태주에게로 향했다.

거리상 태주가 성규를 어떻게 자극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누가 주인이야’라는 고성과 손을 뿌리치는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에 대한 서운함이 유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급하니까 알아서 찾아오네.’

성향상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했던 세종을 자신이 있는 곳까지 친히 발걸음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제법이네. 성규를 두 번씩이나 매기고.”

먼저 입을 뗀 쪽도 역시 세종이었다.

“그래도 성규 선배는 참 좋겠네요. 이렇게 자신을 위해 분노해 줄 진정한 친구도 있고.”

“뭐?”

칭찬을 가장한 후배의 비아냥거림에 세종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나저나 흑막치곤 생각보다 일찍 등장했네요.”

태주가 성규와 세종의 비겁한 모의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주엽이 대단한 비밀인 양 귀띔을 해주긴 했지만, 앞서 다른 선배들의 잡담을 통해 성규와 세종의 존재를 알게 됐듯, 4학년들 사이에선 이미 태주에 대한 견제가 공공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사냥개가 도망치면, 주인이라도 총을 들어야죠.”

더구나 세종의 입장에선 태주가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사냥개와 주인…….”

태주의 비유에 확신을 얻은 세종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네가 성규를 흔들리게 만들었구나.”

“저도 그렇게 쉽게 흔들릴 줄은 몰랐어요.”

“하늘같은 선배님도 다 옛말이네. 까마득한 후배가 꼬박꼬박 말대답도 하고.”

“그러게요. 하늘같은 선배님이 까마득한 후배한테 망신이나 당하고. 이따 만나면, 꼭 장난이었다고 전해주세요.”

세종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던 태주가 성규를 암시하듯 입구 쪽을 슬쩍 쳐다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들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아주 뵈는 게 없구나.”

“그러게 왜 다들 잘한다 잘한다 하는데, 선배님만 인정을 못 하세요.”

“뭐?”

“와아, 두 분이 친구라 그런가? 서로 말투도 똑같네. 아니, 좀 전에 성규 선배도 계속 모른 척 뭐, 뭐, 거리다가 급발진하고 나갔거든요.”

“근데 이 새끼가 진짜.”

순간적으로 주먹을 말아 쥔 A급 무투가 장세종이 두 눈을 부릅뜨며 태주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던 바로 그때.

▶ 스킬 『폭주』가 발동되었습니다.

▶ 스킬 『점멸』이 발동되었습니다.

어느새 등 뒤에서 나타난 태주가 세종의 귀에 얼굴을 들이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흥분하지 마. 불안해 보이니까.”

“……?!”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위압감에 말문이 막힌 장세종이 경직된 고개 대신 눈동자만 돌려 태주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아, 그리고 선배 대접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작별 인사를 고하듯 세종의 한쪽 어깨를 의도적으로 움켜쥔 태주가 연속 점멸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바로 그때.

“크흡.”

긴장한 나머지 느끼지 못하고 있던 불쾌한 욱신거림에 세종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태주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찾아온 의문의 통증.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감싼 세종이 태주가 짚었던 부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검지로 슬쩍 옷에 가려진 부분을 들춰 보았다.

“……?!”

S급 어쌔신인 민주엽에 이어 A급 무투가인 장세종마저 당황케 한 압도적인 힘의 차이.

놀랍게도 태주의 손길이 떠난 자리엔 벌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뭐지, 이 미친 악력은?’

신체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클래스인 무투가의 단단한 근육에 찍힌 치욕적인 낙인.

자국은 곧 멍이 되어 시간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강렬한 충격은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거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되겠는데?’

태주의 발칙한 경고에 헛웃음마저 잃은 세종이 성규와의 갈등부터 해소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

*

*

그날 밤.

한국대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인 국대라이프에선 신입생 A군에게 굴욕을 당한 4학년 B군이란 제목의 폭로글이 폭발적인 관심을 얻고 있었다.

- 익명 57: 지인피셜 신입생 A군은 신태주, 4학년 B군은 박성규임.

┗ 익명 58: 우와, 쪽팔려서 학교 어떻게 다니지?

┗ 익명 32: 결국 조기 졸업만이 살길인가?

┗ 익명 59: 역시 헌터학과는 버라이어티해.

┗ 익명 60: 그러게. 첫 줄에 학과를 밝힐 순 없다고 했지만, 본문에 불화살이 나온 것이 킬포 ㅋㅋㅋ┗ 익명 24: 몬스터를 잡기 전에 선배부터 잡았네.

┗ 익명 61: 가끔 몬스터보다 악랄한 선배들도 있음.

┗ 익명 15: ㅇㅈ

┗ 익명 62: ㅇㅈㅇㅈㄹ ㅋㅋㅋ 중립기어는 무너졌냐? ㅋㅋㅋ┗ 익명 63: ㅇㅈㅇㅈㄹ? 오징어조림?

┗ 익명 24: 근데 내가 신입생의 입장이라도 처음 본 선배가 다짜고짜 시비를 걸면 가만 안 뒀을 것 같은데?

┗ 익명 62: ㅋㅋㅋ 실제론 24 같은 방구석여포들이 선배들 앞에서 찍소리도 못함 ㅋㅋㅋ┗ 익명 24: 62 혼자 급발진 안쓰럽네. 또르륵.

┗ 익명 62: 어, 울지 말고 얘기해 ㅋㅋㅋ 형이 졸사 찍기 전에 영정사진부터 찍게 해줄까? ㅋㅋㅋ┗ 익명 15: 62님 익명이라고 너무 막 나가시네.

┗ 익명 24: ㅇㅇ 같은 한국대 동문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임.

┗ 익명 62: 뭐야 이 단세포들은. 한국대 요즘 뺑뺑이로 뽑냐?

┗ 익명 64: 여러분 어그로엔 무시가 답입니다.

┗ 익명 62: 64 미쳤냐? 키배 말고 현피 뜰까?

┗ 익명 65: 근데 62 설마 본인 등판임? 거의 피의 실드 수준인데?

┗ 익명 66: <속보> 62 장판교 위의 장비 빙의.

┗ 익명 67: <종합> 62 한국대 헌터학과 4학년 박성규로 밝혀져.

┗ 익명 24: 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68: 근데 62 왜 갑자기 반응이 없냐?

┗ 익명 69: 뭐야 62 진짜 나갔냐?

┗ 익명 65: 그냥 해본 소린데 찐이었나 보네 ㅋㅋㅋ┗ 익명 24: 62 하는 짓 보니까 후배한테 개털릴 만함.

‘근데 이걸 누가 올렸지?’

침대에 누워 댓글들을 읽고 있던 태주가 동기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작성자의 의도에 의문을 품었다.

‘뭐, 나야 나쁠 게 없지만, 박성규의 성격상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들 텐데.’

걱정까진 아니지만, 신입생에게만 호의적인 댓글들의 분위기 상 박성규와 장세종을 비롯한 4학년 선배들 대부분이 폭로글의 작성자로 자신을 의심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거 또 귀찮게 생겼네.’

물론 게시글이 올라온 시점에 접속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만 입증하면, 쉽게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만, 익명 게시글의 성격 상 실제 작성자가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경우 진범을 색출할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잠깐.’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을 청하려던 태주의 무거운 눈꺼풀이 악몽을 꾼 사람처럼 번쩍 떠졌다.

‘이거 혹시 장세종이 올린 거 아니야?’

현장엔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고,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만한 결정적인 증거도 없었지만, 자신을 폭로자로 몰아갈 경우 단순한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던 여느 선배들과는 달리 장세종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한 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 선배의 치부를 드러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는 예의 없는 후배로 몰아간 다음, 이를 계기로 날 공공의 적을 만들어 박성규와는 화해를, 다른 선배들에겐 안 좋은 선입견을 주입, 이후에 있을 비밀 평가 점수에서 손해를 보도록 유도한다… 으음. 조금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여론 몰이에 능한 장세종이라면, 절친인 박성규의 체면을 희생하면서까지 날 음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장세종의 작성 사실만 밝혀낼 수 있다면, 박성규와의 연대도 영영 끝이고, 동기들에게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절친마저 웃음거리로 만든 잔인한 배신자로 낙인찍을 수 있겠지만.’

혹시 모를 거짓 선동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 대응 방안을 머릿속에 그려둔 태주가 개강 첫 주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던 바로 그때.

▶ 조별 과제가 도착하였습니다.

‘어? 뭐야, 과제가 또 있어?’

오전에 이미 일일 과제를 마쳤던 태주의 입장에선 살짝 당혹스러운 메시지였다.

‘그건 그렇고, 조별 과제는 또 뭐지?’

일일, 특별, 추가 과제는 경험해봤지만, 조별 과제를 부여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설마 나처럼 일일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나?’

자신이 유일한 회귀자라 여기고 있던 태주가 낯선 단어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지. 그랬으면 벌써 회귀와 동시에 얻은 능력으로 단번에 주목을 받았을 거 아니야.’

자신과 달리 힘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지만, 한편으론 조별 과제의 형식을 띤 개인 미션이길 바라는 태주였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벌의 등장은 좀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고민에 빠진 태주의 눈앞에 조별 과제의 내용이 떠올랐다.

▶ [조별 과제] 혼돈의 파티.

‘혼돈의 파티라… 이름부터 심상치 않네.’

[23:59:46 (정지)]

‘자, 그럼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 과제 수행을 위해 던전으로 이동합니다.

소개팅을 하는 심정으로 과제를 수락한 태주가 한낮의 태양보다 눈부신 빛에 휩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0